매체가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나는 관심이 많다. 팩트란 역사를 픽션화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펼칠 수 있는 상상력을 애정한다. 역사를 다룬 영화나 소설은 역사학자들의 비난을 받을 숙명에 처해 있지만 나는 역사를 비트느라 작가가 흘린 땀을 존중하는 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이야기는, 조선시대 등장하는 장희빈만큼 빈번하게 다뤄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잘 다룬 영화를 보지 못했다. 소피아 코폴라가 만든 <마리 앙투아네트>도 시각은 아주 훌륭했다. 어린 시절 타국으로 시집 온 소녀가 정쟁 속에서 외로움을 이기는 방법으로 사치에 탐닉하는 영화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내면을 접근하는 시도가 좋았지만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한계점이 보이는 영화기도 했다. 인간에 대한 통찰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게 묘사했다.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전달하는 방식이 소녀적이었다. 그저 쇼핑에 중독된 앙투아네트를 묘사했다. 이 영화만 보면 감독의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형당하는 게 마땅하게 그려졌다.
혁명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한 개인을 다루려는 시도는 많이 있어왔지만 역사와 개인을 섞는 게 결코 쉽지 않다. 이 영화도 한 개인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방식을 택한다. 마리 앙투아네트한테 책을 읽어 주는 하인, 시도니 라보르드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신선한 설정인데 원작 소설이 있다. 혁명이 일어난 1789년 7월 14일부터 단 4일 간에 시도니가 보는 베르사이유 궁의 모습이 담긴다. 시도니가 바라보는 궁의 혼돈과 변덕스런 그러나 자신한테 친절한 앙투아네트 왕비. 시도니는 친절한 왕비한테 존경과 헌신을 넘어서는 애정을 갖게 된다.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분량상 어떤 부분만을 확대 해석하고 다른 섬세한, 그러나 꼭 필요한 부분이 빠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보다는 앙투아네트에 대한 애정, 그리고 앙투아네트가 플라냐크 공작부인한테 보이는 사랑이라는 사랑의 삼각형을 축으로 한다. 입체적이지 못하고 좀 평면적이라 사랑의 삼각형이 가져 오는 밀당의 기쁨이나 슬픔이 잘 표현되지 못했다. 원작에는 없는 폴리냐크 공작부인과 앙투아네트의 애정관계를 부각시켰단다.
쓰다보니 계속 안 좋은 부분만 쓰게 된다. 엔딩 시퀀스에서 폴리냐크 부인을 살리기 위해 시도니한테 폴리냐크로 변장하라고 여왕은 명령한다. 주종관계에서 불복의 의지를 표현할 수 없었겠지만 여왕에 대한 무한 사랑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거는 시도니의 미묘한 심리가 좀 거칠게 다뤄졌다. 감독이 여자라면 어땠을까, 좀 더 섬세하게 다루지 않았을까. 소피아 코폴라를 보면 성별이 문제인 거 같진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