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영화는 다른 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같은 선상에 있다. 이틀 간격으로 두 영화를 봤다. 두 영화 속에서는 최소한의 정의가 살아있다. 송우석의 세계관을 바꾸는 계기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란 말이 있다. 송우석이 세무변호사에서 인권변호사로 시각을 전환하는 일은 정치적이지만 개인적 동기가 그 추진력이다. 국밥집 아주머니에 대한 의리는 공권력의 어둠을 보게 이끌었다. <용의자>에서 역시 지동철이 탈북하게 된 계기와 북진회를 운영하는 이중간첩을 쫓는 동기는 가족을 잃은 데 대한 복수심에서다. 그리고 지동철을 돕는 해직 기자 역시 자신의 복직을 위해 지동철을 돕는다. 사회 정의를 구현하거나 모순을 폭로하려는 의도는, 이렇게 개인적 동기가 없다면 이루어지기 힘들다. 그래서 혁명도 내게 즐겁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라고 하지 않나.

 

두 영화로 위안을 좀 받았다. <변호인>에서 송우석이 법정에서 검사와 판사한테 직접적으로 소리치는 장면이 꽤 있다. 실제 재판과정을 본 적이 없지만 사실 안 이럴 것이다. 영화 속에서 법정에 있는 순간만큼은 변호인이 절대적 힘을 행사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에두르지 않은 강하고 직설적 화법으로 뭐가 잘못인지 시원스럽게 말한다. <용의자>에서 민대령(박희순)이 지동철한테 김실장(조성하)를 죽이게 하고 지동철이 도망가게 놓아 준다. 김실장은  민대령을 약올린다. 윗선에 든 보험이 많아 법으로 하면 금방 풀려날 거란 암시를 하면서. 민대령은 지동철한테 총을 건네 주고 결국 지동철은 김실장의 머리를 날린다. 이 장면에서 일종의 징벌적 성격이 드러나서 통쾌하면서도 씁쓸했다. 법이란 필요한 순간에는 무력하고 법을 만든 이들이 사용할 때만 강한 성격을 지녔다는 걸 영화의 낭만성 속에서도 인정을 한다. 

 

멀티플랙스 영화관은 크래딧이 다 올라가기도 전에 불을 켜고 어둠 속에서 잠시라도 느낀 쾌감은 극장 안에 두고 가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잠시 위안을 받았지만 나와서는 그 위안이 스펙터클이라는 걸 깨닫고 허둥댔다. 영화적 낭만성이 주는 긍정적 유통기간이 짧나? "스펙터클은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라고 기 드보르가 말했다. "스펙터클은 기만되는 시선과 허위의식 양자의 공통지반이며 그것이 달성하는 통일이란 일반화된 분리의 공식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영화와 현실의 간극은 메꿀 수 없는 심해처럼 깊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긍정을 영화 속 인물들이 대신해 주고 있다. 이에 우리는 값 싼 표값을 기꺼이 지불하기로 한다. 행동으로 무언가를 바꿀 수는 없지만 표만 있으면 잠시 정의로 넘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입장할 수  있으니까.

 

<용의자>를 본 날이 사랑의 레전드 예수 탄생일이었고 철도노조 지도부가 조계사로 들어간 날이었다. 사람들은 극장으로 몰려왔다. 작년 대선에 그네양을 찍은 이들한테 분노가 치밀었지만 씁쓸함같은 부작용은 곧 잊혀질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또 같은 재앙을 만드는 이한테 투표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 위안을 주는 영화는 또 흥행할 것이고. <변호인>같은 영화를 외면하는 날이 현실이 영화같은 날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