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 지성의 근본주의 비투비21 1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문성원 옮김 / 이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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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체로 월초에 책을 주문하는데 2월에 외서 한 권을 포함시키고 따로 배송을 안 눌렀는지 19일에나 책이 같이 도착할 예정이란다. 혹시나 해서 배송확인을 해보면 여전히 상품 준비 중ㅠㅠ 이번 달 주문서를 못 받으니까 너무 불안하다. 안 읽은 책도 수두룩하고 읽다만 책도 널렸으니 이성으로는 그 책들을 읽는 기간으로 정했지만 마음은 흡연자가 금연하기로 결심한 후 금단증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뭔가 마음이 안정이 안 되고 불안하기만 하다. 어차피 책이 와도 다 안 읽을 가능성이 많은데 이건 무슨 심리인지...어흑. 다음주에나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테니.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을 재밌게 읽고 주문했던 책이고 읽다 만 책이다. 가방에 넣고 다닐 가벼운 책으로 당첨된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집중해서 읽었다. 바우만의 개념은 새롭지는 않다. 후기자본주의 사회 현상을 분석한 글들이 이미 넘치고 있기에 시의성은 좀 떨어지지만 바우만의 언어로 정의하는 점이 바우만의 글을 읽는 재미라고 할 수 있다.

 

자유. 제목만 보면 마치 무슨 자기계발서같기도 한데 소비사회에서 소비자가 상품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뒤에 실은 사회구조적 권력이동이 있다는 걸 암시한다. 블링블링한 광고의 홍수 속에서 소비자는 선택의 자유를 누린다. 소비는 정체성이고 그 정체성을 구성하는데는 사회적 승인이 숨어있다. 우리는 소비자 이전에 노동자다. 노동자로서 작업장에서 위계질서에 복종하도록 훈련받고 권력 쟁취를 암묵적으로 포기하는 대신 임금과 보너스를 손에 쥐고 작업장을 나와 소비자가 왕인 시장세계로 걸어들어간다. 마치 내가 주체로서 노동을 제공하고 상품을 선택한 듯한 착각을 한다. 상품을 선택하는 자유는 작업장 밖에서 자본가한테 복종하는 가면이다. 구매행위만으로도 우리는 합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최면술에 빠져있다. 후기자본주의 사회는 바로 권력이 교묘한 가면을 쓰고 시장으로 이동하는 단계다. 제러미 벤담의 파놉티콘의 이론까지도 차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소비자는 상품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본가가 만든 시장감옥에서 각종 기호와 취향을 감시당하고 강요당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장감옥을 나오는 일은 지젝이 말했듯이 생태주의로 돌아가는 일이다.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건 물건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니라 물건 선택의 자유를 무시해야한다. 현실은? 물건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하면 빈곤해지고 소외감을 느낀다. 책을 손에 넣지 못해 불안한 건 아마도 내가 선택한 내 정체성을 구성할 자유와 소유권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잠재의식이 말하기 때문일 거다.

 

아무리 훌륭한 책을 읽으면 뭐하나. 태도를 안 바꾸는데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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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2-14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넙치님.. 저두요..잘 지내셨지요? ~~^^


바우만 책 저는 손도 안된것도 있는데 소비자에대한 시각이 그렇군요..음..~~


넙치 2014-02-14 21:41   좋아요 0 | URL
사진 속 분위기 있는 분이 새벽숲길님인가봐요. 근데 왜 이쁜 얼굴을 가리셨어요??? 얼굴을 공개하라, 하라^^

바우만 책들 재밌는데 잘 안 들춰보게 되네요. 저도 겨우 세 권 읽었어요-.-;
 

 

 

 

 

 

 

 

 

 

웬만하면 독립영화에 애정을 가지고 싶은데 자꾸 외면하게 된다. 이 영화는 영문제목 <Jesus Hospital>이 더 어울린다. 독립영화들은 대체로 메시지도 있고 어떤 이슈를 제기하면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기능적 측면에서는 훌륭하다. 어떤 도구를 위해 영화를 이용하는데 좀 영리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나는 보는 편이다. 한 편의 영화가 한 편의 논문이나 식상한 뉴스보다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이미지가 주는 효과를 극대화하는 예시가 종종 있어왔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문학작품에서 문체와 같은 역할을 한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신중하게 그 문체를 이용하는 게 작가인데 이 영화는 의문이 든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영리하지 못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클로즈업과 핸드헬드를 이용해 뭘 얻고자했으며 관객한테 뭘 전달하고자 했을지, 과연 고민했을까? 물론 독립영화라 제작상의 여건을 헤아려보려고 하는데 카메라 워킹의 단조로움은 감독의 게으르고 닫힌 사고의 결과물은 아닌지 묻고 싶다.

 

한국독립영화하면 이제는 답답함부터 떠오르는 건 내 게으른 사고 탓도 있지만 독립영화 감독들의 구태의연함도 한 몫한다. 말은 쉽게 한다고 테러 당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 톤 자체가 왜 이렇게 극한 지점까지 몰아 붙이며 유머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는가. 나는 유머야 말로 독립영화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본다. 독립영화는 동시대를 사는 이들한테 강력한 한 방을 먹이는 힘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 한 방이 힘을 발휘하기 전에 극한 리얼리즘에 번번히 파묻힌다. 코미디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힘을 빼고 유연할 필요가 있다. 장준환 감독의 <이매진>이 왜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지 좀 알았으면 좋겠다. 만들어진 지 십 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이 영화의 우의성과 창의성은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 뉴스나 신문에서 보는 사회적 사건들이 주는 피로감을 그대로 전달하는 일은 영화가 할 일이 아니라 기자들이 할 일이다. 그 피로감에 고개를 돌리는 독자와 시청자들한테 이건 외면할 일이 아니라 마주하고 생각해 볼 일이고 분노할 일이라고 사유하게 이끄는 게 영화 감독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피로감과 무기력에서 몸을 일으키고 두 눈을 크게 뜨고 필요하다면 두 주먹도 꽉 쥐게 하는 일.

 

이 영화는 혼수상태에 빠진 노모를 둘러싸고 안락사란 문제를 다룬다.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안락사 여부를 두고 촘촘한 관계를 다뤘고 그 촘촘한 관계 뒤에는 사회적 모순까지도 희미하게 다루는 훌륭한 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영화 촬영술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무거운 톤 탓에 장점보다는 피로감이 먼저 찾아온다. 영화가 다룬 여러 가지 문제들에 분노하기 보다는 영화에 분노하게 되며 씁쓸해지니 내 탓인가, 감독들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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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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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이다. 죽음의 집이란 시베리아 수용소를 의미한다. 늘 느끼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은 어마어마한 통찰력과 현재성을 지닌다. 이 소설 역시 시베리아 수용소란특정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어느 사회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법의 해석과 집행에 대한 이의제기로 볼 수 있다.

 

이 소설에는 현재는 사라진 태형에 관한 언급도 많다. 태형은 원시적 형태기도 하지만 러시아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아주 최근까지 고문이라는 형태로 우리나라에도 존재했고, 아직도 존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모르는 것일 뿐.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전쟁포로들을 학대했던 미군을 보건대 태형은 원시적 형태가 아니라 타자를 지배하려는 인간이 지닌 원시적 열정은 본능일지도 모른다. 육체적 학대가 20-21세기에도 유효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으로 언도받은 태형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한결같이 어떤 날카로운, 모든 정신적인 것을 짓눌러 버리는 육체적 고통에 대한 공포감과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생기게 마련이다."(308쪽)

 

그리고 이런 말도 쓰여있다.

 

"법규의 무능한 집행자는 법률의 정신과 의미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채 문자 그대로 법률을 집행한다는 것이 오히려 일을 무질서로 끌어들일 수 있있을 뿐 아니라 다른 결과는 결코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도 이해하는 능력도 없다. 그들은 법률 이외에 건전한 사고, 냉정한 판단이 자신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사실 때문에 적지 않게 놀라게 된다."(273쪽)

 

어제 자료원에서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을 봤다. 내 머리 속에는 매우 성능 좋은 지우개가 들어있어서 처음 보는 영화처럼 아주 재미나고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 지 흥미진진하게 봤다. 곽도원이 연기한 검사 캐릭터를 유심히 봤다. 처음 봤을 때 안 보였던 부분인데 검사가 바로 무능한 법 집행자다. 최익현(최민식)의 능청스러운 로비를 받아들이지 않고 깐깐하게 구는 캐릭터다. 그는 왜 최익현의 로비를 받아들이지 않았나? 검사는 처음부터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다. 그를 움직이는 동력은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른다. 가장 힘이 센 이의 말에 복종하는 게 검사가 대표하는 공권력이다. 검찰청장이란 타이틀에 야망을 품은 검사가 최익현이란 먹이사슬을 만났을 때, 최익현이 힘이 자신을 그 위치까지 데려다 줄 정도로 힘이 센지에 달려있다. 처음 보여준 검사의 모습은 법의 원칙에 따른 정의로운 집행자처럼 보이지만 곧 검사는 무질서를 일으키는 축이 된다는 걸 암시한다. 부패의 고리는 끊기지 않고 연속해서 뫼비우스의 띠가 돼버린다. 다만 그는 놀라지도 않는다. 그가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유일한 지점은, 자신의 경력에 어떤 장점으로 작용할지에 달려있다.

 

데리다도 말했지만 법 집행의 폭력성으로 법은 그 자체로 딜레마에 빠진다. 감옥이란 공동체 생활은 감옥 밖 공동체와 흡사하다. 감옥에서도 감옥 밖에서도 계급은 엄연히 존재하며 감옥에서 권력 역시 존재한다. 당연히 그 권력을 이용하는 무리도 있고 그 권력에 희생당하는 무리도 있다. 이런 부조리를 고발하는 소설이다. 공권력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문제점이 많다. 개선할 의지가 있는 지가 관건인데 네트워킹의 발달로 육체적 체형은 사라졌을지 모르겠으나 정신적 체형은 여전히 존재하고 가시적 체형보다 지능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고발한 사회보다 더 비극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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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목이 왜 이렇게 요상한가 했더니 영어제목이다. 원제는 <아델의 삶-챕터 1과2>이다. 이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나는 이 영화를 아델의 성장기로 보고 싶다. 챕터 1에서 고교생 아델이 성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는 중에 엠마를 만나서 사랑한다. 그 사이 고등학생이었던 아델은 교사가 되고 엠마와의 첫사랑의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야기가 챕터 2에서 이어진다. 오프닝이 고등학교 교실에서 프랑스 문학 시간에 책을 학생들이 읽는 장면인데 교사가 되어 아델이 아이들한테 책을 읽히는 장면이 영화가 끝날 무렵에 등장한다.

 

줄거리를 쓰면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중요한 점은 아델한테 첫사랑은 엠마가 여자라는 점. 엠마는 미술학도이고 지적이며 야망까지 있다. 아델은 독서를 좋아하고 엠마 전시회 때 엠마 친구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좋아하는 꼬맹이들을 가르치는데서 행복을 찾는다. 두 사람이 만나 첫키스를 할때  타오르는 해까지도 가릴 정도로 격렬하다. 시작은 태양에 맞설 정도로 눈부시고 격렬했지만 이성 커플처럼 권태기로 접어든다.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 차이의 틈이 점점 커지고 서로 한눈 팔기로 접어든다. 왜 아델의 성장기인가 하면 두 연인의 관계는 끝까지 회복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델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엠마의 전시회를 찾지만 관계 회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파란 원피스를 입은 뒷모습이 롱쇼트로 비춰지며 영화가 끝난다. 마침내 아델을 카메라가 놔주고 아델은 카메라를 벗어나면서 첫사랑과 작별을 고하는 법을 배운다. 모두가 그러는 것처럼.

 

이 영화 밖에 있는 아델의 삶 챕터 3에서는 새로운 사랑을 할 거고 아델의 삶의 챕터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언젠가 커밍아웃을 하든 아웃팅을 당하든 또 다른 시련을 겪고 아델은 계속 살아갈 것이다. 잠시 눈물이 흘러 콧물과 뒤범벅 될테지만 다시 긴 머리를 쓸어서 안 흘러내리게 묶는 일상적 행동처럼 관계의 상처에 딱지도 생기고 굳은 살도 박혀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2. 이 영화의 런닝타임도 3시간이다- 요즘 왜 이리 감독들은 영화를 길게 만드시는지. 하지만 완전히 몰입시킨다. 영화가 시작하면 제일 먼저 답답하다. 카메라는 아델의 클로즈업에만 관심이 있다. 카메라는 끝까지 아델의 얼굴에만 집중하고 카메라가 아델이 아닌 다른 피사체를 잡을 때는 아델이 보는 시점으로, 그것 역시 클로즈업으로만 잡아낸다. 게다가 핸드헬드다. 무슨 촬영을 이렇게 하나 투덜거리다가 영화 상영 한 시간쯤 후에는 완전히 아델의 심리에 말려든다. 내가 카메라고 아델이 된다. 카메라맨이 아니면 감독이 아델을 연기한 아델 에그자코풀로스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다가 어느새 아델의 자연스러운 매력에 완전히 빠진다. 이 소녀가 대체 연기를 하고 있는걸까, 아니면 실제 모습일까 혼동이 일기 시작한다. 숱많은 엉킨 짙은 금발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묶어 올리고 불안할 때면 초조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행복할 때 입술이 살짝 벌어지면서 머금는 미소, 그리고 엠마를 응시할 때 조차도 행복한 듯하면서 초조한 시선처리. 카메라가 클로즈업을 주로 사용하면서 아델의 섬세한 표정을 계속 보여주는 거에 적응하다보면 지속적인 핸드헬드 클로즈업 울렁증에서 어느새 벗어나있다. 이런 집요한 한 가지 촬영술은 위험한 모험이었을 텐데 이 영화는 승리한 것 같다. 엠마를 연기한 레아 세이두 역시 아델만큼 매력을 뿜어낸다. 아델과 달리 창백하고 쇼커트를 하고 한번씩 씨익하고 미소를 날리는데 아델과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게다가 카리스마까지.

 

3. 이 영화는 레즈비언 커플의 정사씬이 꽤 길고 자세히 묘사된다. 왠만한 베드씬은 영혼 없이 보는 편이라 지루한데 이 영화는, 충격적이었다. 깐느 영화제 상영 당시에도 논쟁이 가장 많았단다. 정사씬 촬영을 할 때 감독이 두 여배우를 강압적으로 대하고 촬영하는데 열흘이나 걸렸다고 한다. 보면서도 두 배우들 몹시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의 특이한 점 또 하나가 음악을 최소한 사용한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음악은 양날의 검이라고, 늘 생각한다. 지나치면 영화의 무게를 덜고 너무 없으면 건조하고. 정사씬에서 전혀 음악이 사용되지 않고 두 배우의 숨소리가 마치 사운드트랙처럼 사용된다. 신체 페티쉬도 극단적이라 비난해야하지만 비난하기 전에 시각적으로 아름답다. ㅠㅠ인체비율을 중요시하는 그리스 조각들처럼 두 여배우의 나체가 묘사된다.ㅠ

 

4. 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은 식사 장면이다. 식사 장면 역시 클로즈업인데 스파게티티를 끊어 먹거나 쭉 흡입하는 장면이 인물을 바꿔가며 반복해서 나온다. 소스가 인물들의 입술에 묻고 면이 입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성적이면서도 이상하게 불안한 파티의 소란스러움을 전해준다. 보통 파티 장면을 묘사할 때 음악이라든지 전체 분위기를 보여주기 마련인데 감독은 특이하게 스파게티 면 흡입 장면으로 파티의 시끌벌적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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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짐 자무쉬 감독의 스타일을 누가 따라갈 수 있을까. 키치적이고 미니멀하면서도 꽉 찬 듯한 화면구성. 흑백이든 컬러든, 좁은 닫힌 공간이든 열린 거리든 자무쉬 감독표 스타일이 있다. 이 영화 오프닝은 아찔하게 아름답다. 엘피 판이 돌아가는 장면에 아담과 이브가 머리를 맞대고 표정없이 널브러져있고 음악이 흐르면서 두 사람이 널브러져있는 바닥이 돌아가는 장면이 겹친다. <지상의 밤>이란 영화에서 탐 웨이츠의 <Night on Earth>가 흐르면서 인물이 밤이 내린 거리를 걷는 걸 카메라가 쭉 따라가는데 모든 체세포가 흐물거렸었다. 이 영화의 오프닝도 <지상의 밤>을 볼 때 너무 좋아 체세포가 무기력하게 널브러진 것처럼 또 한 번 널브러진다. 아담과 이브가 디트로이트 밤거리를 차를 타고 드라이브하면 카메라가 거리를 따라가는데 헤드라이트 불빛과 죽어가는 네온사인이 켜진 콘크리트 건물들이 간신히 살아가는 뱀파이어의 운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투브에 링컨 센터 필름 소사이어티(Film Society of Linchon Center)에서 올린 프레스 컨퍼런스 Q&A가 있다!-세상 참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링컨 센터에 가지 않아도 짐 자무쉬와 틸다 스윈튼을 볼 수 있다니. 일단은 유투브 만세. 사람들의 눈은 다 비슷한 지 아담과 이브, 이브의 동생 에바가 쓴 가발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인모와 염소털, 야크털을 섞어 만든 가발로 사람같으면서도 동물 털의 질감을 살렸다고 한다. 뱀파이어의 사랑 이야기다. 뱀파이어, 사랑, 둘 다 많이 다뤄지는 소재고 같은 걸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 지가 감독이 고민해야할 몫이며 감독의 역량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자무쉬 감독은  뱀파이가 지닌 외형적 전형의 관습을 따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단다. 침대에서 자고 송곳이가 없다가 피를 마실 때만 살짝 드러난다. 감독은 뱀파이어들이 등장하는 호러 영화가 아니라 수백 년 간 지속된 사랑을 담고 싶었다고 한다. 뱀파이어는 원래 사람이었고 사람의 다른 형태라는 말을 한다. 그렇지. 기원은 사람이지. 그래서인지 두 연인의 이름도 아담과 이브다.

 

아담과 이브는 얼굴은 창백하고 몸은 길다랗고 머리칼은 독특하다. 뱀파이어들이라 어둠의 세계를 살아가는 공간을 담는다. 디트로이트의 버려진 건물들이 즐비한 넓은 밤거리, 헤시시 문화가 있는 탕헤르의 좁은 골목. 두 공간은 전혀 닮은 점이 없는데도 비슷한 정서를 환기한다. 황량하고 쓸쓸함. 자무쉬 감독이 잘 다루는 정서가 바로 번잡한 도시에 매복해 있는 황량함이다.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지만 인물들이 외모에서 주는 유약함이 더해진다. 아담과 이브과 비행기를 타고 선글라스를 껴고 힘없이 축 늘어져 자는 모습에서 이들의 나이가 수 백 살이고 햇빛에 맥 못추는 뱀파이어란 사실을 잊고 그냥 살 곳을 찾아 고난을 극복해야 슬픈 한쌍의 연인을 만나게 된다.

 

2. 감독은 또 이런 말도 한다. 지성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직관이나 본능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다고. 자무쉬 감독의 영화를 보면 계획된 듯하면서도 줄거리의 흐름이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 아담은 음악을 만들고 이브는 활자 중독처럼 보인다. 오프닝에서 기타의 역사가 나열되는데 나야 모르지만 뮤지션들이나 기타 덕후들이 보면 기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장면들은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기도 하는데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카메라에 담긴 모든 미장센과 인물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다. 이 분위기를 즐기는 게 자무쉬 영화의 진정한 감상법이다. 자무쉬 영화들에서 많은 도시들이 나오고 인물들이 다른 도시로 이동한다. 공간 이동으로 고립감과 동시에 낯섦이 주는 긍정적 멜랑콜리가 풍기는데 낯선 환경에서 피어나는 긍정적 멜랑콜리를 격하게 애정한다.

 

 

3. 아담과 이브는 사람을 좀비라고 부른다. 우리한테는 아담과 이브가 좀비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신은 아니지만 인간사를 경험하고 꿰뚫고 있어서 인간의 의도가 담긴 제스처를 좀비스럽다고 여길 수 밖에 없는 지경. 에덴 동산에서처럼 좀비 세계에서 서로를 의지할 수 밖에 없고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이브의 동생 에바는 사건을 일으키고 아담과 이브가 이동을 하게 하는 작인이다. 에바는 아담과 이브에 비해 충동적이고 악가를 아끼고 아담과 책을 애정하는 이브를 속물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눈에 절대 가치는 다른 이의 눈에는 속물이고 좀비처럼 보인다는 말도 되겠다. 혹은 다 아는 척하는 하는 나이든 이의 기존 질서는 충동이 미덕인 젊은이한테는 기존 질서가 무의미가 될 수도 있고. 그러나 에바야, 너도 곧 나이들어 충동성과 즉흥성이 속물화될 때가 있을테니  언니와 형부를 너무 몰아붙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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