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가 이야기되는 시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72년. 바로 닉슨이 워터케이트 사건을 만들고 있었던 때다. 영화 시작에서 "닉슨은 나쁜 놈"이란 말로 슬쩍 흘려준다. 나쁜 놈이 대통령인 사회에서 나쁜 놈들이 판을 칠 수 밖에 없다. 이 영화는 너나 할 것 없이 나쁜 놈 천지다.

 

영화는 절박한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사기를 치는 커플에서 시작한다. 명예욕에 불타는 FBI 요원은 이 사기꾼을 이용해서 부패한 정치인을 잡으려고 한다. 부패한 정치인을 잡으려는 건 사회정의 구현인데 뭐가 나쁜가. FBI요원 리치의 의도가 문제다. 리치는 사회정의 구현에 일조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스타 요원이 되려 발버둥친다. 그가 동원하는 방법은 사기꾼과 다름없다. 상사한테 지원을 받기 위해서 협박을 일삼고 시민의 세금을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도박을 한다. 범죄조직 혹은 부패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작전이란 이름으로 속임수를 쓰는 일을 많이 봐왔다. 여기서도 작전은 속임수를 쓰는데 이 속임수를 바라보는 시선이 사기꾼을 바라보는 시선과 일치한다. 그래서 관객도 FBI 요원이 사기꾼들과 한탕 하려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는 정의 구현을 잊게 하고 판단력없고 조급한 요원이 허둥거리는 걸 보게 된다. 더 웃긴 건 이 허둥거리는 요원의 말이 책상에 앉아 결정만 내리는 상사한테는 그럴듯하게 보인다는 사실. 일개 요원만이 아니라 FBI 전체가 결과만 얻는다면 어떤 수단이든 받아들이는 경박함을 보여준다. 칸트가 본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 연속해서 벌어지는 요지경 세상이다.

 

뉴저지 시장과 마피아 두목, 그리고 고작 아랍어 몇 마디 하는 요원을 섭외해서 원탁회의를 한다. 감독은 코믹한 요소에 긴장 한 스푼을 넣었다. 마피아 두목을 가장 판단력 있는 인물로 배치하는 수를 썼다. 요원의 신분이 노출될 위기에서도 관객은 긴장을 하지 않고 웃게 된다. 감독의 시종일관 이런 조롱하는 시각을 취한다. 그래서 옳은 사람은 없고 인물 모두를 한통속으로 바라보게 된다. 인물들한테 선이나 악에 대한 성찰은 없다. 선과 악의 기준은 전적으로 개인이 정당화하는 대의명분이다. 로잘린한테 국세청 직원이나 마피아 보다 더 나쁜 사람은 남편이다. 자신한테 불충실하고 바람피우는 게 로잘린한테는 최고의 악이다. 로잘린은 일차원적 사고를 하는 인물인데 이 영화에서 가장 선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술수를 쓰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의 70년대 버전 같다. 미장센은 섬세하게 70년대를 재현하했지만 속고 속이는 사회 분위기는 비슷하다. 소란하고 질퍽하고. 영화가 대사도 엄청 많은데 인물들이 잠시 대사를 쉬고 있는 사이에 흐르는 70년대 팝들은 깜짝 선물로 다가온다.

 

그리고 로잘린을 연기한 제니퍼 로렌스. <윈터스 본>에서 아버지를 찾아 헤매는 핏기 없고 진지한 소녀 가장으로 나왔었는데 이 영화에서 같은 인물이 맞나 싶게 미친 존재감을 드러낸다. 발성자체도 다르다. 혀로 말을 밀어내듯이 하는데 이런 발성법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거의 녹는다.-_-;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4-02-24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넙치 2014-02-25 14:46   좋아요 0 | URL
영화가 볼 때는 별로 재밌는지 몰랐는데 집에 와서 생각하니 잘 짜여진 한 판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요.ㅋ

자신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일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거 같아요. 가장 적극적 솔직함이란 말씀에 공감해요.
 

 

 

 

 

 

 

 

 

 

1.

어제 이 영화를 보면 영화 제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선댄스 영화제 펀딩으로 제작 되고 관객상과 심사위원상을 받은 영화다. 선댄스 영화제는 어떤 면에서 아주 미국적이라는 편견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ㅠㅠ 어떤 면인가 하면, 마틴 스콜세지가 미국이 아니라 독일에서 태어났다면, <어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를 다른 관점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영화를 통해 접하는 미국이란 나라의 정서는 매우 피상적이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사총사의 삶을 보고 뉴요커의 아침으로 베이글과 커피 한 잔을 먹어도 근사하게 보이게 하는 블링블링함이 존재한다. 실제로 매일 아침 베이글과 커피 한 잔을 마시면 하루가 우울한 게 아니라 삶 자체가 우울하다. 그러나 그곳이 뉴욕이라고 말하면 뉴요커가 아닌 이들의 눈에는 우울은 낭만으로 둔갑한다. 뉴욕, 아침, 베이글, 커피란 단어가 연상케하는 이미지가 미국 영화를 망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극단적 생각까지 들었다.

 

이 영화는 런닝타임 대부분을 오스카 그랜트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에 보낸다. 한 시간까지는 인물을 참 잘 설명하고 있다고 감탄했다. 오스카는 대마초 중개인이지만 생계를 위해서고 실제 성격은 다정다감하고 평범하다. 다정하고 현명한 엄마가 있고 사고쳐서 얻은 딸일 걸로 짐작되긴 하지만 총명한 딸한테는 자상한 아빠다. 즉 오스카는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인물이다. 오지랖도 넓다. 하지만 직장에 지각해서 해고당하기도 한다. 그는 마트 직원인데 지각으로 짤린다. 즉 오스카의 다정다감한 성격은 마트 근무에는 무용지물이다. 근무에 필요한 조건은 다정다감 같은 특성이 아니라 정시 출근이다. 노동자의 삶이 피곤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성격이 아니라 규격화된 인간이라는 걸 늘 보여줘야 하는 탓이다.

 

아무튼, 오스카의 성격은 충분히 묘사되고도 남았는데 영화는 계속 오스카의 성격만 묘사한다.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하고 한 시간 반이 지나서야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고 문제 제기를 하자마자 영화가 끝이 난다. 이 영화는 인종차별에 관한 시선을 담고 있고 감독이 의도한 게 인종차별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백인 경찰이 흑인을 대하는 데 왜 그런가에 대한 묘사가 전무하다. 그래서 보는 이한테 인종차별적 문제제기 보다는 총기 소지 문제점으로 보게 한다.물론 이 문제 제기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오스카와 친구들이 새해 첫날 카운트다운을 기념하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가 우발적 싸움에 이르고 백인 경찰은 과잉 대응을 한다. 그러나 백인 경찰이 과잉 대응에 이르는데 집중하지 못했다. 영화에서만 묘사된 과잉대응의 첫번째 원인은 감정 자극이다. 감정 자극은 인종간의 문제라기 보다는 개인 성향의 문제로 볼 수도 있다.

 

이 영화도 독립영화고 영화 언어를 꽤 잘 사용한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방법에서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워밍업이 너무 길다. 관객은 이미 지친 상태라 마지막 한 방을 보고도 덜 반응하게 된다.

 

2.

나는 미국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무의식 중에 미국적인 것을 은연 중에 경멸과 증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습관을 가졌다. 왜 그런가. 영화 탓이다. 개신교를 기반으로 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영웅을 꼽는다. 이야기의 중심이 영웅을 탄생시키 위한  것일 때가 많다.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한 인간상을 꼽으니 영웅이 아닌 사람을 묘사하는데는 서투른 면이 있다. 그래서 미국영화 하면 영웅이 떠오르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얼마전 신아가, 이상철 감독이 만든 <밍크코트>는 문제 제기에서는 탁월한 시점을 보여줬지만 영화적으로는 실패했다고 썼다. 이 영화를 보면 <밍크코트>가 왜 영화적으로는 실패했는지 답이 나온다.

 

이 영화, 역시 엄청 어둡고 우울하다. 전쟁의 고통을 진지하게 다룬다. 그러나 영화란 매체는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는 절묘하게 플래쉬백과 현재를 교차 편집해서 배치한다. 할리마의 현재를 과거를 통해 유추하게 한다. 이 영화는 미국식 스릴러가 아니기에 초반에 줄거리를 다 짐작할 수 있지만 줄거리로 판단하는 추리 영화가 아니다. 어떤 감춰진 사실을 따라가면서 인물들이 감당했을 존재의 무게를 가늠하는 게 이 영화의 주목적이다. 전쟁은 부조리는 사랑 만큼이나 흔히 다뤄지는 소재인데 감독이 지향하는 표현 방법에 따라 관객의 감정은 춤을 춘다.

 

이 영화가 이용한 략은 시간을 재구성하는 방법이다. 할리마와 딸, 사피아, 그리고 그녀들의 아들 미르자의 죽음과 얽힌 전쟁의 상흔을 읽도록 서사가 짜여 있다. 보스니아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개인적 갈등을 극적으로 보여주면서 전쟁의 직접적인 장면은 배제한다. 전쟁 씬을 배제했지만 등장인물들은 전쟁의 자장권 아래 놓여 있다는 걸 절절히 보여준다. 우리는 미국의 자장권 아래 있어서 보스니아 내전에 대해 무감한 편이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지양해야할 과제에는 민감하다. 한 나라의 내전을 묘사하는 시점은 보편적이어야한다고 믿는 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보편적이다. 전쟁 못지 않게 두드러진 배경은 가부장적 사회다. 지독한 가부장제에서 여자의 사회적 위치를 미루어 짐작하는데 21세기에도 이런 일이 있다니, 놀라우면서도 영화를 위해 극단적 관점을 택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딸의 남자친구 종교가 다르다고 결혼에 반대하는 아버지를 어떻게 21세기에 받아들일 수 있나..그러나 영화는 허구기도 하지만 터무니없는 허구에서 구성되는 경우는 없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 만큼 충격적인 구조인데 <그을린 사랑>보다는 확실히 덜 충격적이다. 이유는 초반에 결말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사고를 시각화라는 거라고 믿는다. 시각화하는 방식도 주제 만큼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물이든, 미장센이든, 정서를 움직이게 배치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힘을 좀  잃지만 여전히 시네마틱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시각

애니매이션을 워낙 안 좋아하고 특히 디즈니 애니매이션은 안 볼까 하다가 지디가 나오는 유플러스 광고를 큰 화면으로 보려고 봤다.ㅋ 그런데 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해서 봤더니 어느새 영화가 끝났다. 심지어 3D로 볼 걸 하는 후회까지 했다. 실사가 해내려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얼음궁전의 황홀함. 엘사가 손바닥을 쫘악 펼쳐서 주변에 얼음 기둥과 바닥을 만들 때마나 홀린듯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아름다운 장면을 봤다. 그러면서 주책맞게 D. W. 그리피스 감독이 떠올랐다. <인톨러런스> 세트를 만드는데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투입하고 흥행 실패로 불운했던 감독. 그가 살아서 애니매이션 장르를 접했다면 어땠을까.

 

2. 음악

전형적인 미국식 뮤지컬하면 연상되는 멜로디와 감성이다. 나는 미국식 뮤지컬 음악은, 이상하게 느끼하고 가식적으로 들린다. 다만 이미지와 음악은 잘 맞아서 이미지를 보는 동안 음악을 듣는 건 거부감이 덜 한데 음악만 듣는 건 참을 수 없다. let it go만 해도 좋다고들 난리인데 스크린을 이탈한 노래는 집을 찾아 헤매는 것 처럼 들린다. 특히 효린의 내지르기만 하는 창법 너무 싫다.ㅠ 노래가 높이 올라가는 성대 자랑이 아니지 않나.

 

3. 줄거리

아주 많이 흥미롭다. 비극의 발단을 살펴보면 금세 사랑에 빠지는 동생 안나가 중심에 있다. 안나는 명랑하고 낯선 사람한테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몽상가다. 우리는 이런 캐릭터를 철이 없다고 부른다. 이렇게 철이 없는 캐릭터는 본인은 편한데 주변사람들이 고통스럽다. 정작 본인은 주변 사람이 왜 힘들어하지 알지 못한다. 안나는 처음 본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언니한테 말해 언니가 지닌 초능력을 세상에 알리는 꼴이 돼 버린다. 그리고는 언니를 구하겠다고 눈보라 속을 헤매고. 언니의 불행을 나 몰라라 하는 캐릭터보다는 인간적이고 사랑이 넘치지만 자기중심적 인물이 아닌가. 반면 언니는 은둔형 사색가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모른 채 자신이 행한 일에 괴로워하고 고립을 선택한다. 그 선택이 국민을 겨울 속에 가두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네 공주가 연상됨) 그리하여 본인도 모르게 동생한테 얼떨결에 마법을 걸기도 한다. 은둔형 사색가가 왜 결국에는 파멸할 수 밖에 없는가를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은둔형 사색가는 자기 발로 세상에 걸어나오지 못한다.

 

이 영화는 동화다. 그러므로 현실보다는 낭만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언니는  자신의 힘으로 그 마법을 푼다.이 지점 <겨울왕국>에서는 지닌 신선함이다. 보통 마법은 왕자가 푸는 게 정석인데 이 영화에서는 죽은 안나를 안고 눈물을 흘리자 마법이 풀린다. 진정한 사랑은 왕자가 아닌 자매였다. 각자 성격적 단점이 있는 두 자매가, 나만 사랑하는 왕자의 사랑이 아니라 보편적 사랑이라는 매개를 통해 단점을 보완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디즈니는 동화를 만들었지만 적어도 신데렐라 컴플렉스를 조장한 동화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동화답게 영화는 해피엔딩.

 

4. 잉여로운 짓

다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흐믓하게 웃으며 걸어나오는데, 삐닥하게 보는 짓거리. 뭐할라꼬.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4-02-16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눈하나 깜빡이지 않고 보셨군요.. 그정도라는 말씀이시군요.. 음..



" let it go만 해도 좋다고들 난리인데 스크린을 이탈한 노래는 집을 찾아 헤매는 것 처럼 들린다"


저 그 음악 들으며 운동하는데 ㅎㅎ 집찾아 헤메는 ㅋㅋ

게다가 안나네요..제가 .. 읽으며 왜 이리 뜨끔하나요 ㅠㅠ


" 이렇게 철이 없는 캐릭터는 본인은 편한데 주변사람들이 고통스럽다"


넙치 2014-02-19 10:58   좋아요 0 | URL
ㅋㅋㅋ뜨끔하네요, 막말 써놔서. 운동하며 듣는 분도 있는데ㅎㅎ;;

아, 새벽숲길님 안나 캐릭터시구나! 그래도 본인의 장단점을 알고 계시니 진화된 안나시네요.ㅋ 저는 은둔형 외톨이 캐릭터.ㅎㅎ;
 

 

 

 

 

 

 

 

 

 

 

 

내용을 모르고 봤던 터라 아주 흥미롭게 봤다.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다루는 건 언제나 재밌는 소재다. 불면으로 고생하던 에드워드 노튼은 모임 중독자가 된다. 낯선 사람들로 구성된 일종의 치유 모임에서 낯선 사람의 품에 안겨 울면서 심신의 안정을 찾는다. 노튼은 왜 익숙한 것들에서 불안을 느끼고 낯선 이의 품에서 안정을 느끼나. 모든 모임에서 마주치는, 아마도 그와 같은 영혼의 소유자인 여자를 만나면서 그의 평온은 곧 깨진다. 노튼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고 찾는다. 무식의 자아를 소환해서 파이트 클럽을 조직하는 리더가 된다. 그의 의식은 이성을 이용해 평온을 찾고자 했지만 무의식은 이성 따위가 아니라 반사회적 폭력으로 안정을 추구한다. 반사회적 폭력은 은밀해야한다는 건, 무의식마저도 인정한다. 회원들한테 절대 복종과 개인 정보의 비밀을 사수시키는 행동지침을 전달한다.

 

규율을 따르는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VS 규율을 위반하고 동물적 본성에 따라 야수성을 드러내는 세계. 사실 모든 인간은 이 두 세계의 경계를 넘나든다. 문명화란 이름으로 무의식적 폭력을 억누르도록 훈육되지만 완전히 거세하지는 못한다. 이따금씩 혼자라도 꺼내보는 게 인간의 폭력성이다. 이 영화는 폭력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살아가는 가는 이성적 인물을 시각화했다. 영화 후반부에 깜짝 놀라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의식과 무의식의 자아 같은 얼굴일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같은 인물을 두 명의 다른 배우를 통해 묘사한다. 영화적 재미를 위한 혼동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실제로 우리는 전혀 다른 얼굴을 주머니에 갖고 있기도 하다.

 

감독은 자신까지도 파괴하는 폭력성을 부각시킨다. 강도 높은 폭력 대신, 우리들 대부분은 온건한 자아 분열 세계를 창조한다. 각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증명하는 게,  블로그나 SNS라고 생각한다. 실제 자아와 블로그에서 활동하는 자아는 같으면서도 다른 행동기준을 가지고 있다. 글이나 사진에는 글쓴이가 편집을 하면서 이미 자신의 여러 면 중 단면만을 노출하기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든 결정한다. 그러면 블로그 이웃이나 SNS 팔로워는 그가 노출하기로 작정한 면만 보게 되어 있다. 가령, 내 알라딘 블로그를 보면 내 삶은 독서와 영화보기로만 이루어져있다. 이건 실재하는 내가 당연히 아니지만 블로거로서는 실재다. 책과 영화 보기로 윤리적,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추구하고 지지하지만 현실(의식) 속의 나는 그 반대의 행동을 빈번하게 한다. 이 이중적 자아는 모두 한 인물이다. 폭력이라는 말은, <파이트 클럽>에서 처럼 직접적일 수도 있지만 내 경우처럼 간접적이고 은밀할 수 있다. 에드워드 노튼이 폭력적인 테일러(브래트 피트)라는 걸 자신도 못 알아릴 차릴 정도로. 무의식은 의식이 말하지 않는 걸 말하기도 한다. 에드워드 노튼이 일상적 관계에 혐오를 드러내고 모임 중독자가 되기를 선택한다. 왜 낯선 사람인가. 왜 나는 친구들한테 수다 떨지 않고 이렇게 불특정 다수한테 수다를 떠는가, 라고 물어보면 답이 나올 수도 있겠다.

 

덧. 올해는 몇 편이나 봤나 집계 좀 해보려고 번호를 붙여 봤는데 이제 뒤죽박죽 되어 번호를 붙이는 게 무의미하게 돼버렸다.쩝.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4-02-16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나 사진에는 글쓴이가 편집을 하면서 이미 자신의 여러 면 중 단면만을 노출하기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든 결정한다. 그러면 블로그 이웃이나 SNS 팔로워는 그가 노출하기로 작정한 면만 보게 되어 있다. 가령, 내 알라딘 블로그를 보면 내 삶은 독서와 영화보기로만 이루어져있다. 이건 실재하는 내가 당연히 아니지만 블로거로서는 실재다. 책과 영화 보기로 윤리적,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추구하고 지지하지만 현실(의식) 속의 나는 그 반대의 행동을 빈번하게 한다. 이 이중적 자아는 모두 한 인물이다.

맞아요... ~~넙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