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을 모르고 봤던 터라 아주 흥미롭게 봤다.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다루는 건 언제나 재밌는 소재다. 불면으로 고생하던 에드워드 노튼은 모임 중독자가 된다. 낯선 사람들로 구성된 일종의 치유 모임에서 낯선 사람의 품에 안겨 울면서 심신의 안정을 찾는다. 노튼은 왜 익숙한 것들에서 불안을 느끼고 낯선 이의 품에서 안정을 느끼나. 모든 모임에서 마주치는, 아마도 그와 같은 영혼의 소유자인 여자를 만나면서 그의 평온은 곧 깨진다. 노튼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고 찾는다. 무식의 자아를 소환해서 파이트 클럽을 조직하는 리더가 된다. 그의 의식은 이성을 이용해 평온을 찾고자 했지만 무의식은 이성 따위가 아니라 반사회적 폭력으로 안정을 추구한다. 반사회적 폭력은 은밀해야한다는 건, 무의식마저도 인정한다. 회원들한테 절대 복종과 개인 정보의 비밀을 사수시키는 행동지침을 전달한다.
규율을 따르는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VS 규율을 위반하고 동물적 본성에 따라 야수성을 드러내는 세계. 사실 모든 인간은 이 두 세계의 경계를 넘나든다. 문명화란 이름으로 무의식적 폭력을 억누르도록 훈육되지만 완전히 거세하지는 못한다. 이따금씩 혼자라도 꺼내보는 게 인간의 폭력성이다. 이 영화는 폭력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살아가는 가는 이성적 인물을 시각화했다. 영화 후반부에 깜짝 놀라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의식과 무의식의 자아 같은 얼굴일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같은 인물을 두 명의 다른 배우를 통해 묘사한다. 영화적 재미를 위한 혼동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실제로 우리는 전혀 다른 얼굴을 주머니에 갖고 있기도 하다.
감독은 자신까지도 파괴하는 폭력성을 부각시킨다. 강도 높은 폭력 대신, 우리들 대부분은 온건한 자아 분열 세계를 창조한다. 각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증명하는 게, 블로그나 SNS라고 생각한다. 실제 자아와 블로그에서 활동하는 자아는 같으면서도 다른 행동기준을 가지고 있다. 글이나 사진에는 글쓴이가 편집을 하면서 이미 자신의 여러 면 중 단면만을 노출하기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든 결정한다. 그러면 블로그 이웃이나 SNS 팔로워는 그가 노출하기로 작정한 면만 보게 되어 있다. 가령, 내 알라딘 블로그를 보면 내 삶은 독서와 영화보기로만 이루어져있다. 이건 실재하는 내가 당연히 아니지만 블로거로서는 실재다. 책과 영화 보기로 윤리적,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추구하고 지지하지만 현실(의식) 속의 나는 그 반대의 행동을 빈번하게 한다. 이 이중적 자아는 모두 한 인물이다. 폭력이라는 말은, <파이트 클럽>에서 처럼 직접적일 수도 있지만 내 경우처럼 간접적이고 은밀할 수 있다. 에드워드 노튼이 폭력적인 테일러(브래트 피트)라는 걸 자신도 못 알아릴 차릴 정도로. 무의식은 의식이 말하지 않는 걸 말하기도 한다. 에드워드 노튼이 일상적 관계에 혐오를 드러내고 모임 중독자가 되기를 선택한다. 왜 낯선 사람인가. 왜 나는 친구들한테 수다 떨지 않고 이렇게 불특정 다수한테 수다를 떠는가, 라고 물어보면 답이 나올 수도 있겠다.
덧. 올해는 몇 편이나 봤나 집계 좀 해보려고 번호를 붙여 봤는데 이제 뒤죽박죽 되어 번호를 붙이는 게 무의미하게 돼버렸다.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