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신아가, 이상철 감독이 만든 <밍크코트>는 문제 제기에서는 탁월한 시점을 보여줬지만 영화적으로는 실패했다고 썼다. 이 영화를 보면 <밍크코트>가 왜 영화적으로는 실패했는지 답이 나온다.
이 영화, 역시 엄청 어둡고 우울하다. 전쟁의 고통을 진지하게 다룬다. 그러나 영화란 매체는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는 절묘하게 플래쉬백과 현재를 교차 편집해서 배치한다. 할리마의 현재를 과거를 통해 유추하게 한다. 이 영화는 미국식 스릴러가 아니기에 초반에 줄거리를 다 짐작할 수 있지만 줄거리로 판단하는 추리 영화가 아니다. 어떤 감춰진 사실을 따라가면서 인물들이 감당했을 존재의 무게를 가늠하는 게 이 영화의 주목적이다. 전쟁은 부조리는 사랑 만큼이나 흔히 다뤄지는 소재인데 감독이 지향하는 표현 방법에 따라 관객의 감정은 춤을 춘다.
이 영화가 이용한 략은 시간을 재구성하는 방법이다. 할리마와 딸, 사피아, 그리고 그녀들의 아들 미르자의 죽음과 얽힌 전쟁의 상흔을 읽도록 서사가 짜여 있다. 보스니아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개인적 갈등을 극적으로 보여주면서 전쟁의 직접적인 장면은 배제한다. 전쟁 씬을 배제했지만 등장인물들은 전쟁의 자장권 아래 놓여 있다는 걸 절절히 보여준다. 우리는 미국의 자장권 아래 있어서 보스니아 내전에 대해 무감한 편이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지양해야할 과제에는 민감하다. 한 나라의 내전을 묘사하는 시점은 보편적이어야한다고 믿는 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보편적이다. 전쟁 못지 않게 두드러진 배경은 가부장적 사회다. 지독한 가부장제에서 여자의 사회적 위치를 미루어 짐작하는데 21세기에도 이런 일이 있다니, 놀라우면서도 영화를 위해 극단적 관점을 택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딸의 남자친구 종교가 다르다고 결혼에 반대하는 아버지를 어떻게 21세기에 받아들일 수 있나..그러나 영화는 허구기도 하지만 터무니없는 허구에서 구성되는 경우는 없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 만큼 충격적인 구조인데 <그을린 사랑>보다는 확실히 덜 충격적이다. 이유는 초반에 결말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사고를 시각화라는 거라고 믿는다. 시각화하는 방식도 주제 만큼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물이든, 미장센이든, 정서를 움직이게 배치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힘을 좀 잃지만 여전히 시네마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