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예술작품의 흥행/성공은 결국 불행으로 귀착한다. 여기서 불행의 정의가 아주 주관적이고 모호하긴 한데 관객의 외면이라고 해 두자. 흥행 성공은 작가가 다른 길을 모색하는 도화선이 된다. 새로운 길은 종종 관객의 이해심을 넘어서는 급진적인 것일 때가 많다. 새로운 길을 못 찾거나 안 찾고 기존 작품과 비슷해도 관객은 외면한다. 결국 한 작품의 큰 성공 이후는 어느 모로 보든 실패하기 마련아닐까. <나의 삼촌>으로 흥행에 성공한 자크 타티는 새로운 걸 원했다. 미니멀리즘에 코미디였던 <나의 삼촌>에 비하면 <플레이 타임>은 대작이다. 파리 근교에 타티빌이란 터다란 세트를 유리와 철로 지었고 이 영화는 <나의 삼촌>에 비하면 블록버스터급이었다. 그러나 관객은 숨은 그림 찾듯이 스크린에서 윌로 씨를 열심히 찾아야하는 영화를 좋아할 리 없었다. 타티는 파산했고 말년에 곳곳에 공연을 다니면서-타티는 마임 코미디언이기도 했다- 딸한테 편지를 남겼고 그 편지를 바탕으로 <일루셔니스트>란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졌다. <플레이 타임>을 보면 그래서 좀 슬프다.

 

2.

<플레이 타임>에서 소비사회로 이행하는 도시를 시각화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이 영화 역시 특별한 줄거리가 없다. 줄거리가 없기에 주인공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어떤 목적을 위해 한 공간에 모인 이들이다. 파리 관광을 하는 미국인 관광객, 최신식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식당 내부에 모인 손님들, 그리고 행인들이 등장한다. 윌로 씨의 행보를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사방이 유리로 된 사무실로 가득한 회사, 식당, 미국 관광객을 태운 버스. 사무실 씬은 획일적이면서 익명적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 윌로 씨는 첨단 사무실에서 우왕좌왕하는데 사실 이 부분에서 딴 생각 엄청 많이 했다.ㅜ.ㅜ

 

식당 씬에서 꽤 많은 소소한 웃음이 발생한다. 부실한 실내 인테리어 탓에 유리문은 깨지고 천정 마감재가 무너져 내리고, 의자는 옷에 자국을 남긴다. 식당 직원은 이런 결함을 숨기려고 애쓰고 손님들은 테이블 앞에 있는 공간에 춤을 추느라 정신이 없다. 마치 음악이 나오는 한 몸이 부서질 때까지 춤을 추겠다고 다짐한 것처럼 보이고 이 소란함을 배경으로 처리하는 게 아니라 주요 장면으로 채택한다. 클럽에 처음 발을 들여 놨을 때 그 얼떨떨한 기분을, 영화에서 느끼게 된다. 비틀거리면서도 춤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소비행위로 에너지가 소진되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하일라이트 버스. 영화 속 배경이 파리라는 걸 단 두 컷만으로 보여준다. 유리문에 비친 에펠탑과 성심성당으로 이곳이 파리라는 걸 알 수 있다. 도시화는 세계를 모두 닮게 했다. 미국의 대도시나 서울이나 파리나 본질은 비슷하다. 사무실 풍경, 쇼핑가. 다만 관광객은 비슷한 풍경에서도 소비자로 행동하려는 적극성을 지닌다. 길에서 꽃을 파는 이를 세워두고 사진을 찍는 장면이라든지 지나가는 풍경에 시선을 돌리고 거두는 지점이 같아서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걸 연상시키는 유명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놀이기구란 게 제한된 좁은 공간에 갇혀서 몸을 소유한 이의 의지가 아니라 기계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게 된다. 관광객은 도보가 아닌 버스를 타고 관광을 하고 버스는 하나의 놀이기구가 된다. 그러니까 차창을 통해서 미국인들은 파리를 바라보고 잠깐 쇼핑몰에 내려 기념품을 산다. 행락객으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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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파가니니에 대해 좀 찾아 봤더니 하이네가 영혼을 팔아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듯한 신들린 연주라고 했단다. 음악 영화는 만듬새가 아무리 거칠어도 음악의 후광으로 보는 동안은 좋다. 이 영화 역시 음악이 주는 즐거움이 4할 정도 되고 황당함이 6할 정도 되겠다. 일단 파가니니를 아이돌처럼 묘사했다. 좋게 말하면 현대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과한 면이 있다. 배우들이나 배경은 19세기인데 인물들이 행동하는 방식은 21세기의 선정성이 있다.

 

런던에서 콘서트를 열기로 했는데 파가니니의 도덕성에 문제 제기를 하는 여성단체의 시위, 약속이나 규칙에 대한 파가니니의 무개념과 환각제에 빠진 방탕한 일상. 그의 연주를 듣는 순간 모두 매혹되서 마차 주위로 달려드는 팬들, 콘서트를 보면서 열광하는 모습이 지나쳐 기절까지도 하는 스탠딩석 팬들. 실제로 스탠딩석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모든 미장센들이 현대 아이돌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독창적 해석이라고 하기에는 진부하다고 하겠다. 무엇보다 파가니니의 심리묘사에 구멍이 많다. 파가니니는 왜 자유분방한 태도를 지녔는지 설명은 못해도 적어도 자유분방한 태도에 관객이 공감을 할 수 있게 묘사해 줘야하는데 그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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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4-28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 댓글을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글과 서재가 살갑지 않고, 삭막하여 댓글을 남겨 주신 분이 드뭅니다. 메일을 통해 일부 내용만 확인하였습니다.

넙치 2014-05-06 23:35   좋아요 0 | URL
제 서재도 삭막한데 일부러 찾아 오셔서 댓글 남겨주시니...삭제한 댓글에 죄송하네요..^^;;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자동차 페어에 참가하기 위해서 알트라란 자동차 회사가 캠핑카를 전시하기 위해 직원들이 파리에서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동안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담은 영화다. 도로에서 차들로 꽉 막힌 아무 것도 아닌 풍경을,  섬세한 시선으로 경쾌하게 담아낸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자신만의 공간을 할애받는다. 코를 후비든 하품을 하든 담배를 피우든 그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는 자유를 얻는다. 혼자만의 공간에 있다보면 타인에 대한 배려심은 줄어든다. 보행자가 서로 부딪치면 미안합니다,를 말하기로 되어있다. 앞차와 뒷차가 부딪치면 운전자들은 소리부터 지르거나 자신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시끄러운 경적으로 불쾌하다는 의사를 표현한다. 자동차로 자유를 얻지만 이웃과의 연대감을 잃는다.

 

중간에 검문에 걸려 경찰서에서 캠핑카의 존재에 대해 해명하는 에피소드가 꽤 길게 이어진다. 캠핑카의 기능을 하나하나 경찰한테 설명하는 과정을 보다보면 사람은 왜 캠핑을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알트라 회사가 만든 캠핑카는 집에서 누릴 수 있는 사소한 기능까지 조그만 차 안에 설치했다. 며칠 쯤, 텔레비전, 전기 면도기, 커피머신, 뜨거운 샤워 없이 사는 자잘한 불편도 감수할 필요가 없다고, 알트라 캠핑카는 말한다. 그럼 왜 캠핑을 가나. 그냥 호텔에서 자거나 집에 있지. 캠핑에서 필요한 건 이런 전자기기들이 아니라 전자기기들과 거리를 두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알트라 캠핑카를 실은 차가 암스테르담에 도착하기 전에 고장이 난다. 차를 고치기 위해 네덜란드의 한 시골에서 윌로씨 일행이 머문다. 차가 없는 짧은 시간동안 낯선 이들간에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잠자리를 제공하고 제공받고 식사를 함께 하고 이야기를 한다. 차를 잊어버린 순간 사람들이 서로한테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이건 지나간 과거에 대한 향수일 뿐. 알트라 캠핑카를 실은 차는 마침내 자동차 페어에 도착한다. 박람회가 끝난 후에 도착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관심은 폭발적이고 다시 도로는 주차장처럼 꽉 막힌 차들로 가득하다. 각자 작은 공간에 앉아 운전자들은 고독한 자유를 즐기면서 오도가도 못한 채 앉아 있다. 보행자는 우산을 들고 불평없이 막힌 차들 사이로 곡예를 하며 길을 건넌다. 편리함은 인간의 인내심을 빼앗아 버리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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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 혹은 청정 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타티의 <윌로씨의 휴가>와 <나의 아저씨>를 고르겠다. <나의 아저씨>는 타티를 대중한테 다가가게 해 준 영화로 아마 가장 많이 알려져 있을 거다. 하지만 난 어제 처음 봤다! 오프닝에서 비어있는 아스팔트 위를 개 무리가 즐겁게 활보한다. 음악도 옛날 유원지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멜로디다. 뭐가 저렇게 경쾌한가 유심히 들어보니 실로폰(?)에 준하는 투명한 음색이 나는 악기를 사용한다.

 

영화는 당시 직면한 자연주의와 소비주의 사회에 대한 선명한 대조가 주제다. 윌로가 사는 개발 전 동네-파졸리니 영화에서 빈민촌같은 분위기-와 윌로의 여동생 부부가 사는 고급스런 갤러리같은 현대식 집이 주요 배경이다. 두 장소는 시각적으로만 대비되는 게 아니라 청각적으로도 대조적으로 묘사한다. 윌로가 사는 동네가 화면에 나오면 음악이 언제나 뒤따른다. 윌로씨가 사는 다락방 건물이 있는 건물, 그 옆에 동네 주민이 모이는 카페, 아침마다 장이 서고 투닥거림이 있다. 활기와 소란의 중간쯤에 음악은 계속 나온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나 있는 길은 주민들의 대화하며 모이는 장소다. 이웃은 사촌이란 말이 어울리는 동네다.

 

반면에 동생 남편은 성공한 사업가로 현대식 동네에 산다. 대문도 버튼으로 열고 닫고, 요리로 버튼으로 작동하는 기계식 삶을 선호한다. 윌로씨가 사는 동네는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데 이 부부네 집이 나오면 음악은 사라지고 기계음의 사운드가 등장한다. 소음을 비롯해서 버튼을 누를 때 과장된 사운드로 청각을 자극한다. 이 부부가 사는 집은 차도 앞에서 커다란 대문으로 안과 밖이 분리된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마당이 넓은데 이 너른 마당에 통로란 규정을 한다. 잔디를 심고 발을 닿게 콘크리트로 호 모양의 길을 현관까지 만들고 돌바닥판을 만들어 연못 옆을 지나간다. 이 집 구조가 바로 타티가 만드는 웃음의 원천이다. 파티를 연 어느 날, 넓은 공간을 두고 발이 닿아야하는 길 위에서 손님들이 종종 걸음을 치는데, 이는 마치 차가 가득찬 도로를 연상시킨다. 기계 문명이란 게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당혹시키는 때가 종종 있다. 가령, 버튼 도어락은 숫자로 열리고 닫혀서 실수로 다른 번호를 누르면 내 집에 내가 못 들어가는 일이 발생한다. 누구를 위한 편리인지 헷갈릴 때가 종종 있다. 이 부부한테도 이런 일이 있다. 센서로 작동하는 주차장 문을 달았지만 센서 사이를 개가 지나가버리는 바람에 문이 닫히고 갇혀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센서한테는 개인지 사람인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무언가가 센서를 지나갔다는 사실만 중요할 뿐.

 

큰 줄거리 없이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나열하는데 물질문명 비판하는데도 이렇게 경쾌할 수 있다니. 이 영화에서도 역시 자동차는 중요한 조연이다. 앞으로  볼 <트래픽>과 <플레이 타임>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할 것이다. 타티 감독의 영화 특징은 롱쇼트다. 프레임 안에 여러 사람들이 무리지어 나왔다 사라졌다한다. 교실 창으로 멀리 있는 운동장에서 무음으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묘하게 반복적이지만 동적이고(음악 탓일 수 있다) 무엇보다 피로하지 않다.

 

덧.  영화 속에 묘사되는 공간이 어디인가 찾아 봤더니 니스 근처에 세트장을 지었단다. 영화 촬영 후 해체되고. 요즘이라면 또 다른 관광지로 꾸며졌을 텐데 볼 수 없다니 아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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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6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7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The Theory of Light & Matter (Paperback)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원서
Porter, Andrew / Vintage Books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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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온라인의 관계를 안 믿는 사람이다.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이 하는 언행을 주의해서 보는 편이라 내 눈과 귀를 전적으로 믿는 편협한 인간이다, 나란 인간은. 그러나 가끔 온라인에서 오랜 시간을 봐 온 친숙하지만 낯선 이들이 선사하는 선물, 책을 넙죽 받곤 한다. 쌓아둔 책을 처분해야할 경우 은둔형 외톨이같은 나를 떠올리는 게, 먼저 고맙다. 그리고 그 분들이 보내 온 책 리스트를 훑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나를 모르지만 나를 아는 이들한테 내가 읽으면 좋을 만한 책들을, 정말이지 두 팔 가득 보내오셨다. 이 책은 갖고 싶다고 뻔뻔하게 말한 책이긴 하지만 보내주신 목록에는 내 취향만이 아니라 보내는 분의 취향도 드러나있다. 이런 생각을 했다. 오프라인의 지인들보다 어쩌면 인터넷 접속으로만 안부를 알 수 있는 이들이 내 취향을 더 정확히 알 수도 있겠다는. 오랫동안 누군가의 글을 읽으면서 나 역시 상대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나 또한 다른 이웃들한테 상상의 대상이 될 터이고. 사실 나는 소통을 위해 서재나 블로그를 꾸리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소통을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미묘한 감정을 묘사한 단편들 모음집이 바로 이 소설집이다.

 

이 책은 웹서핑 중 좋다는 글을 보고서 도서관에서 잠깐 두 세 편 읽었는데 원서로 읽고 싶었다. 현대미국소설의 경향인지 단정하기에는 위험하지만 지극히 묘사적인 글들이라 번역서로는 감흥이 전혀 없는 걸 몇 번이나 경험했다.ㅠㅠ 최근에 레이먼드 카버 소설집을 읽었는데 레이먼드 카버 단편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레이먼드 카버 단편들이 서늘하면서도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기괴하다면, 앤드류 포터의 단편들은 눅눅한 감정들이 절제된 듯하면서도 행간마다 뚝뚝 떨어진다. 현대미국소설, 특히 단편을 재밌게 읽은 기억이 거의 없다. 소설에서 내가 기대하는 점은, 재미라기 보다는 인문학의 연장이나 유머일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현대미국소설은 철처하게 내 기대를 배반하는 편이다. 이 소설집은 예외가 되겠다.

 

책 내용을 좀 적으면, 대체로 막장 드라마격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사가 중심이고 특히 잃어버린 가부장제에 대한 향수가 가득해서 좀 마뜩잖기도 하지만 가족해체의 원인을 보면 특이하다. 소외에서 나오는 불륜, 퀴어코드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일부일처제 사회에서 교감을 하는 이를 만나는데  그 대상이 배우자가 아니라 다른 이성이나 또는 동성이다. 윤리적으로 부도덕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뭔가? 불완전하고 나약해서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불륜을 저지르는 인물들을 굉장히 처연하고 유리처럼 섬세하게 묘사해서 비난보다는 인물이 지닌 우울한 분위기에 젖어들게 된다. 때로는 친밀한 사이에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게 있다. 우리한테 빛이라는 대상이 그럴 수 있다. 빛이 뭔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빛을 설명하라고 하면 물리적 설명 외에는 더듬거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모두한테 빛이 필요하지만 그 빛의 밝기, 색, 파장은 모두 다를 것이다. 일상을 깨뜨릴 수 있는 강한 빛도 있고  일상적 스탠드나 늘 켜게 되는 형광등도 있다. 우리는 여러 종류의 빛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딱 집어서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떠남Departure>에서 이런 구절이 있다. 외곽에 살면서 행정 편의상 부유층 자녀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아미쉬 여자 친구를 여름 내내 만난다. 이따금식 어두운 밤, 버려진 기찻길 위 다리를 걷는다. 삼십 피트 아래로는 강이 흐른다. 어둠 속에서 발 밑이 보이지 않아서 발을 잘못 디디면 물 속으로 떨어지지만 주인공과 아미쉬 여자 친구는 마치 발밑을 볼 수 있다는 확신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젊음이 주는 치기일 수도 있지만 살면서 이런 치기가 없으면 살기 힘들 때가 있다. 두려우면서도 확신에 찬 걸음을 내딛으면서 타인만이 아니라 자신도 속여야하는 때.

 

"At that moment all I care about is standing there with Lynn, holding her close while she'll let me. And the two of us look on, watching Jose's lips, the sudden shifting of his brow, a boy unable to communicate with the world around him, speaking in a language no one knows."(136쪽 -Merkins 중)

 

이렇게 막다른 순간에 있는 인물을 보는 건 참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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