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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heory of Light & Matter (Paperback)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원서
Porter, Andrew / Vintage Books / 2010년 1월
평점 :
나는 온라인의 관계를 안 믿는 사람이다.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이 하는 언행을 주의해서 보는 편이라 내 눈과 귀를 전적으로 믿는 편협한 인간이다, 나란 인간은. 그러나 가끔 온라인에서 오랜 시간을 봐 온 친숙하지만 낯선 이들이 선사하는 선물, 책을 넙죽 받곤 한다. 쌓아둔 책을 처분해야할 경우 은둔형 외톨이같은 나를 떠올리는 게, 먼저 고맙다. 그리고 그 분들이 보내 온 책 리스트를 훑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나를 모르지만 나를 아는 이들한테 내가 읽으면 좋을 만한 책들을, 정말이지 두 팔 가득 보내오셨다. 이 책은 갖고 싶다고 뻔뻔하게 말한 책이긴 하지만 보내주신 목록에는 내 취향만이 아니라 보내는 분의 취향도 드러나있다. 이런 생각을 했다. 오프라인의 지인들보다 어쩌면 인터넷 접속으로만 안부를 알 수 있는 이들이 내 취향을 더 정확히 알 수도 있겠다는. 오랫동안 누군가의 글을 읽으면서 나 역시 상대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나 또한 다른 이웃들한테 상상의 대상이 될 터이고. 사실 나는 소통을 위해 서재나 블로그를 꾸리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소통을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미묘한 감정을 묘사한 단편들 모음집이 바로 이 소설집이다.
이 책은 웹서핑 중 좋다는 글을 보고서 도서관에서 잠깐 두 세 편 읽었는데 원서로 읽고 싶었다. 현대미국소설의 경향인지 단정하기에는 위험하지만 지극히 묘사적인 글들이라 번역서로는 감흥이 전혀 없는 걸 몇 번이나 경험했다.ㅠㅠ 최근에 레이먼드 카버 소설집을 읽었는데 레이먼드 카버 단편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레이먼드 카버 단편들이 서늘하면서도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기괴하다면, 앤드류 포터의 단편들은 눅눅한 감정들이 절제된 듯하면서도 행간마다 뚝뚝 떨어진다. 현대미국소설, 특히 단편을 재밌게 읽은 기억이 거의 없다. 소설에서 내가 기대하는 점은, 재미라기 보다는 인문학의 연장이나 유머일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현대미국소설은 철처하게 내 기대를 배반하는 편이다. 이 소설집은 예외가 되겠다.
책 내용을 좀 적으면, 대체로 막장 드라마격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사가 중심이고 특히 잃어버린 가부장제에 대한 향수가 가득해서 좀 마뜩잖기도 하지만 가족해체의 원인을 보면 특이하다. 소외에서 나오는 불륜, 퀴어코드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일부일처제 사회에서 교감을 하는 이를 만나는데 그 대상이 배우자가 아니라 다른 이성이나 또는 동성이다. 윤리적으로 부도덕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뭔가? 불완전하고 나약해서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불륜을 저지르는 인물들을 굉장히 처연하고 유리처럼 섬세하게 묘사해서 비난보다는 인물이 지닌 우울한 분위기에 젖어들게 된다. 때로는 친밀한 사이에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게 있다. 우리한테 빛이라는 대상이 그럴 수 있다. 빛이 뭔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빛을 설명하라고 하면 물리적 설명 외에는 더듬거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모두한테 빛이 필요하지만 그 빛의 밝기, 색, 파장은 모두 다를 것이다. 일상을 깨뜨릴 수 있는 강한 빛도 있고 일상적 스탠드나 늘 켜게 되는 형광등도 있다. 우리는 여러 종류의 빛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딱 집어서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떠남Departure>에서 이런 구절이 있다. 외곽에 살면서 행정 편의상 부유층 자녀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아미쉬 여자 친구를 여름 내내 만난다. 이따금식 어두운 밤, 버려진 기찻길 위 다리를 걷는다. 삼십 피트 아래로는 강이 흐른다. 어둠 속에서 발 밑이 보이지 않아서 발을 잘못 디디면 물 속으로 떨어지지만 주인공과 아미쉬 여자 친구는 마치 발밑을 볼 수 있다는 확신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젊음이 주는 치기일 수도 있지만 살면서 이런 치기가 없으면 살기 힘들 때가 있다. 두려우면서도 확신에 찬 걸음을 내딛으면서 타인만이 아니라 자신도 속여야하는 때.
"At that moment all I care about is standing there with Lynn, holding her close while she'll let me. And the two of us look on, watching Jose's lips, the sudden shifting of his brow, a boy unable to communicate with the world around him, speaking in a language no one knows."(136쪽 -Merkins 중)
이렇게 막다른 순간에 있는 인물을 보는 건 참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