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로 히로카즈 감독 영화를 처음 접했었다. 아트시네마가 낙원동으로 옮기기 전이었다. 지금 아트선재였던 곳인데 그곳 공기는 정말 목이 칼칼해지고 영화를 보다보면 몸까지 근질근질해지던 기억이 있다. 영화는 한없이 지루하게 다가왔고 몸은 그 어떤 때보다 근질근질했고 극장에서 나온 후에는 유미코(에스미 마키코)의 뒷모습만 기억나는 영화로 남아있다. 지난 주에 후쿠오카에 잠시 다녀왔다. 텐진에서 유미코가 탔을 법한 낡은 전철을 타고 40여 분쯤 가면 있는 야나가와란 마을에 다녀왔다. 해질녘이라 찬찬히 둘러보지 못했지만 잠시 동네를 둘러보는데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한적하고 오래된 꾸미지 않는 집들이 있는 동네. 바로 이런 동네가 일본의 속살이 아닐까 싶다. 야나가와에서 다시 후쿠오카로 돌아와야하는데 발걸음이 안 떨어졌다. 집에 왔는데 야나가와 풍경 잔상은 여전히 찰랑이고 자꾸 <환상의 빛>이 떠올랐다. 

 

사람은 참 간사하다. 내가 야나가와란 작은 마을에 애정을 가지고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하니까 장면마다 감성으로 흘러넘친다. 이 영화의 배경은 아마도 오사카 근교로 짐작되는 작은 마을과 어느 작은 어촌 마을이다. 이 영화 속 배경이 주는 잔잔한 위안과 편안함을 전에는 미처 못 알아봤다. 배경 풍경이 <환상의 빛>의 서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영화 속 일상은 실제로 좁은 공간에서 일어난다. 기차가 지나는 소리가 늘 들리는 이층 방 안. 방에서 나와 좁은 계단을 내려오면 기차가 다니는 길이 위로 보이는 작은 골목. 그 골목 입구에 굴다리같은 게 있다. 일상과 일상 밖을 잇는 일종의 경계. 남편이 출근하거나 퇴근할 때 굴다리 밑으로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유미코는 바라본다. 깊숙한 골목에 자리잡은 집만큼 행복도 눈에 안 띄게 소소하지만 화면을 응시하면서 저런걸 행복이라고 부른다는 걸 우리는 안다. 행복한 신혼부부의 일상 속에 어느날 사건이 일어난다. 남편이 기차길에서 자살을 한다. 유미코가 겪음직한 충격의 강도를 간접적으로 알게 된다. 세 달된 아들마저도 돌보지 않은 채 넋을 놓고 있다고 친정엄마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시간은 흐르고 아들이 학교에 입학 할 무렵 유미코는 작은 어촌 마을에 살고 있는 한 남자와 재혼을 한다. 남자는 열 살된 딸이 있다. 유미코는 낡은 기차를 타고 오사카를 떠나면서 과거도 오사카역에 두고 온 것처럼 보인다. 새로 정착한 집 방의 창은 바다를 향해 나있다. 창을 통해 파도소리와 바람소리가 늘 들린다. 기차가 냈던 소음은 바다가 만드는 소리로 대체된다. 익숙한 소리가 바뀌는 건 익숙한 공간에서 빠져나왔다는 말이다. 다른 소리로 찬 공간이 원래 자리를 차지하면서 유미코의 일상은 잠시 출렁인다. 그러나 유미코는 곧 어촌마을에서 일상에 동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공간이동이 있었지만 오사카 마을에서나 어촌 마을에서의 일상은 대동소이하고 모두 서정적이다.

 

주로 롱테이크와 롱샷으로 이루어져있다. 멀리서 보면 인물의 움직임이나 동작은 모두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휘휘 부는 바람 소리 속에 대사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따금씩 인물이 빠져나가거나 혹은 인물보다 먼저 카메라가 자리잡고 무인의 풍경으로 프레임을 구성한다. 그 무인의 풍경은 전혀 화려하지 않다. 낡고 먼지낀 문이나 다다미 방이 있는 복도등(오즈 영화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샷들도 있다)을 보여준다. 이런 일상적인 무인의 풍경은 마음을 열고 다가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카메라가 이끄는대로 무인의 풍경을 응시하다보면 어느새 무인의 풍경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게 된다. 관객을 위한 무인의 풍경에 두 발을 다 담그는 순간 그 곳에 있을 인물들의 심리를 헤아리게 된다.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에 도달하는 여정에 속에 서정적 풍경이 펼쳐져 있는 셈이다.

 

이 영화는 죽음의 그림자로 시작한다. 할머니의 죽음을 암시하는 꿈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유미코의 전남편이 죽는다. 자살로 판명되는 죽음인데 자살의 원인을 아무도 모른다. 유미코는 상실감을 느낀다. 상실감은 주디스 버틀러에 따르면, "우리가 갖고 있었다는 것, 우리가 욕망하고 사랑했다는 것, 우리가 우리의 욕망의 조건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했다는 것"이다. 남편의 죽음은 유미코가 남편과 함께 공유했다고 믿었던 행복이 부정되는 사건이다. 유미코의 상실감은 남편이 죽은 지 수 년이 흐르고 재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서 잊은 듯 보이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문득문득 찾아오는 상실감은 전남편에 대한 애도로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애도란 자신이 겪은 상실에 의해 자신이 어쩌면 영원히 바뀔 수도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일어난다"(주디스 버틀러, <불안한 삶>에서)고 했다. 유미코는 자신의 삶이 남편의 죽음으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걸 인정하지 못한 채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누군가의 장례식 같은 장면이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다. 마을 공동체 일원일 누군가의 죽음에 전남편의 죽음이 오버랩되고 진정한 애도를 위한 발화를 한다. 왜 남편이 자살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남편은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는 평생 배를 탔는데 바다 한가운데 있으면 바다 밑에서 밝은 불빛이 비추면서 자신을 부르는 거 같다고 했단다. 유미코의 전남편도 그런 느낌으로 기찻길을 걸었을 것이고 기차가 와도 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리고 카메라는 유미코의 남편이 아이들과 집앞에서 노는 풍경을 바다 건너편에서 담는다. 다음 장면은 유미코 부부의 빈 방. 빈방 창으로 바닷바람이 들어와 언제나 그랬듯이, 커튼을 흔든다. 그리고는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일상의 풍경은 변함없이 늘 제자리에 있었다. 변한 건 유미코다. 유미코는 이제 어촌 마을의 진정한 아낙이 되어갈 것이다. 전남편에 대한 애도가 완성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해 고립되며 관계가 단절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관계가 파생되는 순간으로 전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죽음과 같은 상황의 끝이라고 여길만한 것에서 빛을 본다. 죽은 자 혹은 버린 것에 대한 애도로 바뀐 궤도를 직시하고 인정한다. 끝은 또 다른 시작점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오랫만에 히로카즈 영화를 다시 보고 굴다리 너머에 비추는 빛의 의미에 마음이 따뜻해지고 위안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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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영상자료원에서 봤는데 앞부분을 조금 놓쳤다. 영상자료원에 갈 때마다 멍청한 짓을 해서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가는데도 늦는다. 월드컵경기장에서 내리거나 반대방향으로 타거나하기 일쑤. 지난 번에는 삼각지에서 갈아타야하는데 갈월동까지 가버렸다. 찝찝하게 오프닝을 놓쳤는데 주문을 걸기로 한다. 놓친 부분은 안 중요하다..안 중요하다..최면덕분인지, 진짜로 안 중요했다ㅋ

 

감독의 초기작인데 영화가 아주 따뜻하다. 감독은 죽음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어떤 긍정성을 보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이 영화도 죽은 자들의 이야기다. 저승으로 가지 못한 이들이 저승으로 가도록 도와주는 곳이 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간직해야 비로소 저세상으로 출발할 수 있다. 이 모티브는 죽음은 암흑이나 무의 세계가 아니라는 가치관이 들어있다. 게다가 가장 행복한 기억을 지니고 저세계로 간다니.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공간은 버려진 건물로 언뜻보면 황폐해 보인다. 낡은 콘크리트벽, 건물 곳곳에 녹으로 부식된 철제 문이나 장식들, 잎이 없어 스산한 나무들, 이따금씩 안개도 끼고. 하지만 해가 넘어갈 때면 창으로 넘어들어오는 환한 빛. 황혼 무렵의 빛은 아침보다 밝다. 영화 속 인물들이 놓인 시간은 인생의 황혼 끝인데 어둠이 아니라 낮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환한 빛이 가득한 시간이다.

 

이 곳에 모인 이들은 일주일간의 유예기간을 가지고 행복했던 한 순간을 회상하는 시간을 보낸다. 길든 짧든 인생의 한 순간을 선택하는데 많은 고민이 있다. 선택한 순간을 다음날 자고 일어나면 바꾸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할아버지도 있고, 할머니도 있고, 청년도 있고, 여고생도 있고..구성원은 작은 가족, 나아가 한 사회의 구성원처럼 다양하다. 이들이 고민고민하며 선택한 순간에는 공통점이 있다. 큰 사건이나 에피소드가 아니라 곰곰이 돌이켜보지 않으면 잊고 사는 순간들이다. 한 남자는 경비행기 면허증을 따고 비행기를 조종할 때 구름 속에 들어간 느낌을, 할머니는 꼬마시절 빨간 원피스를 입고 오빠를 따라 클럽에 갔다가 오빠친구의 칭찬에 춤을 췄던 기억, 또 할아버지는 다른 남자를 평생 마음에 품었던 아내와 일몰 무렵에 벤치에 나란히 앉았던 순간 등등을 선택한다. 이런 순간들은 말로 전달하기 힘든 장면들이다. 프루스트의 마들렌느 과자를 찻잔 속에 담그는 순간 떠오르는 추억의 소환이 이성적으로 이해되지만 마들렌느 과자에 대한 개인적 추억이 선행되지 않으면 그저 지루한 이야기 일뿐이듯이.

 

감독은 이런 순간을 회상하는 인물들을 마치 사진관 의자에 앉아서 스냅사진 찍는 샷으로 프레임을 구성한다. 단조로우면서도 시선을 끄는 프레임 구성이다. 단조롭기에 인물의 얼굴을 유심히 보게 된다. 그들이 회상하면서 말을 하는 순간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그래서 그들이 이미 죽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잊고 그들이 결국 어떤 순간을 선택할지 더욱 궁금해진다. 갈팡질팡하는 이들의 마음을 단순한 프레임을 통해 엿보면서 내 마음도 갈팡질팡해진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한순간을 꼽는다면 어느 순간을 꼽을까....이 영화가 의도하는 바는 바로 이 물음일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순간이 가장 행복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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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 현암사 / 199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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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 비트겐슈타인과의 우정을 빗대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글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름이 아니라 성이다. 루트비히나 조카 파울 모두 비트겐슈타인 가문이다. 그러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란 제목은 모순이다. 원제를 찾아 봤더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Wittgensteins Neffe다. 제목에서 나온 모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베른하르트가 말하는 루트비히와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파울은 사실 삼촌 루트비히 만큼이나 미치광이였다. 루트비히는 그의 철학으로 유명해졌고 파울은 그의 광기로 유명해졌다. 루트비히는 어쩌면 더 철학적이었을 것이고 파울은 어쩌면 더 미치광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적인 비트겐슈타인이 자기의 광기가 아닌 철학을 종이에 옮겨 놓았기 때문에 철학자라고 믿고 파울이 자기의 철학을 억눌러 세상에 알리지 않고 오직 광기만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미치광이라고 믿는지도 모를 일이다. 두 사람의 두뇌는 모두 너무 비상했지만 한 사람은 자기의 두뇌를 세상에 알렸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 나는 심지어 한 사람은 자기의 두뇌를 세상에 발표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의 두뇌를 실천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38-39)

 

파울이 정신병으로, 베른하르트가 폐병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두 사람이 알게 됬다고 한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의 광기를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루트비히와 파울은 공통점이 있다. 오스트리아 명문가인 비트겐슈타인 가문 사람들은 두 사람을 철저히 무시했다고 한다. 제목도 모순되지만 제목도 루트비히의 조카 이야기를 통해 베른하르트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치부를 드러낸 작가라고-베른하르트의 소설 한 권만 읽어보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오스트리아 내에서는 비난을 받았던 모양이다. 신랄하고 이보다 더 혹독할 수 없을 정도로 비판해댄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우정이란 혹은 성인 사이에 교감이란 어떤 교집합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루트비히, 파울, 베른하르트의 공통분모는 일종의 광기일지도 모른다. 광기의 정의는 푸코가 말했듯이,  대상에 대한 타자화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 구조에 기반해 있다. 세 사람은  광의로는 오스트리아 내에서, 협의로는 주변 사람들한테서 배척받는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유명한 사람들이다. 파울은 막대한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주고 자신도 가난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입지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걸 에둘러 말하는 대목이 있다.

 

"나는 늘 내가 없는 곳에, 이제 막 도망쳐 나왔던 그곳에 있으려 한다. 나는 내가 금방 떠나 온 곳과 달려가는 곳 사이, 자동차에 앉아 있을 때만 행복하다. 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불행하게 도착하는 사람이다. 내가 도착하는 곳이 어디든 상관 없이 도착하면 나는 불행하다. 나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견뎌내지 못하고 떠나 온 곳과 가는 곳 사이에 있을 때만 행복한 인간 중 하나다."(119)

 

공감 백만 개를 누르고 싶은 대목이다. 그 여러 인간 중 한 명에 나도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내 삶의 스케일이 이들과 다르지만 삶의 스케일이 좁아도 이러저한 일이 있기 마련이다. "떠나 온 곳과 가는 곳 사이에 있을 때만 행복한 인간"을 위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덧. 베른하르트의 문체는 아주 독특하다. 동어반복을 늘어놓으면서도 변주를 해서 음악처럼 읽힌다. 같은 멜로디를 듣고 있는가 하면 어느새 변주 파트로 넘어가서 재잘거리는 문장들이 늘어서 있다. 내용은 무거운데 정작 문장을 읽을 때는 경쾌한, 묘한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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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을 나서면서 짜증이 났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짜증나는 영화다. 왜 짜증이 났나를 적어볼 것이다. 전반은 고건수(이선균)의 원맨쇼다. 고건수가 여러 가지 일들을 한꺼번에 겪고 은폐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음악은 과장되게 쿵쿵거리며 긴장감을 가지라고 명령한다. 음악과 신경질적인 고건수의 표정에 시계를 열 번 쯤 본 거 같다. 왜 이렇게 몰입이 안되나. 그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사건이 뻥뻥 터진다. 극의 흐름이 빠른데도 지루한 이유는 바로 관객이 관찰자 입장이 되게 연출했기 때문이다. 고건수가 처한 긴박한 상황에 같이 들어간 것처럼 맥박이 빨라지려면 최소한의 감정이입 내지는 공감할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극 안으로 관객이 들어갈 장치를 빼먹었다. 즉 기승이 없고 바로 전개로 들어가버린 느낌이다. 그래서 고건수는 좁은 공간에서 필사적으로 땀 흘리며 애쓰는데, 게다가 전반부인데 나는 언제 끝나나 시계만 보고 있었다.

 

전반에 고건수의 원맨쇼가 끝나고 협박범이 등장하면서 지루함은 조금 잦아들었다. 협박범에 대한 궁금증이 지루함을 달래고 있었다. 협박범의 정체와 잔인함은 곧 관객한테 제공된다. 즉 스토리는 짧고 후반부는 본격적으로 협박범의 잔임함이 드러나는 또 지루한 전개가 이어진다. 모든 사건은 고건수란 강력계 형사가 법질서를 무시하면서 시작된다. 음주운전에 사람을 치고도 뺑소니를 쳤다. 재수가 없다고 하기에는 고형사란 인물이 범법자를 가려내는 일을 하면서 자신은 정작 범법자인데도 요리조리 빠져나갈 궁리만 하니 자업자득이란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극의 흐름상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최초에 신고만했어도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 모른다. 물론 신고를 하려는 타이밍을 놓쳐버려 벼랑 끝까지 가버리게 된다. 교훈은, 작은 잘못을 했을 때 반성하자.

 

마지막 액션 장면은 감독이 공들였을 거 같은데, 또 지루했다. 집 안에서 두 사람이 꽤 긴 육탄전을 벌인다. 좁은 공간에서 육탄전이란 집안에 있는 여러 가구와 기물들에 온 몸이 예측할 수 없는 각도로 부딪친다는 말이다. 아, 이런 거 너무 짜증난다. 그리고 이제 끝났나 했더니 십 분이 남았더라. 마지막 십 분이 이 영화 중 가장 괜찮은 부분이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고형사가 모처럼 바르게 살겠다고 마음 먹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다짐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광경이었다. 고형사가 바르게 살지 않은데는 자신의 책임도 있지만 구조적 책임도 있나니 고형사는 끝까지 힘든 날을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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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2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13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4-06-12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한참 웃었어요. 넙치님. ~~
어째요. 시계만 보시고 또 나중에는 10 분 남았는데도 ㅋㅋ

넙치님께 제대로 미운 털 박혔네요.. ~~ 이글 보신 분은 아무도 안보실 듯~~

넙치 2014-06-13 14:27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이 글 안 보신 분이 더 많을테니 흥행에는 지장없을 듯하죠?ㅋ
 
잊고 있던 길 들추어 보기

 

 

 

 

 

 

 

 

 

 

 

책을 먼저 읽은 후, 영화가 개봉하면 안 보는 편이다. 책의 밀도를 두 시간 짜리 영화가 담아내는데는 데 무리가 있다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많이 궁금했다. 소설이란 틀만 빌린 철학서 같기에 어떻게 이미지로 만들어냈을까, 하는 궁금증과 리스본의 풍광을 배경으로 하는 이미지를 기웃거릴 수 있을 거란 호기심이 만나 극장을 찾았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영화는 책에 충실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소설은 추리극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느날 아침 우연히 만난 포루투갈 여인이 남긴 책을 찾아 그레고리는 충동적으로 리스본행 기차를 탄다. 그리고 책을 쓴 저자의 삶, 그러니까, 포루투갈 독재시기(아마도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저자의 흔적을 통해 역사 속에 얽힌 세 주인공의 사랑의 궤적을 찾아낸다. 소설은 줄거리 보다는 문두스의 사유가 중요해서 긴 사유를 옮긴 글에 집중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영화는 확실히 이미지라 사건 중심으로 간다. 사건과 사건 사이에 많은 갈등과 일반적 도덕성과 개인의 선택 사이에서 갈등하는 저자의 고뇌가 겹겹이 쓰여있는데 영화는 아무래도 시간 제한이 있다보니 고뇌와 갈등은 사라지고 허겁지겁 사건을 나열한다. 원작에 매우 충실하면서도 원작이 주는 무게와 울림에서는 거리가 멀어지는 비극이 벌어졌다. 심지어 지루하기도 하다. 스토리를 알고 있어서 그 부분을 어떻게 묘사하는 점을 중점으로 봤는데도 지루하다. 스토리를 몰랐다면 달랐을까.

 

원작이 있고 영화로 만들려고 각색을 하는 일은 흔하다. 영화는 원작에 충실하면 대체로 실패하는 거 같다. 두 시간 짜리 이미지가 절대로 글의 밀도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원작의 일부만을 취사선택해서 원작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올 때 영화는 그 자체로 생명력이 있는 거 같다. 물론 이러면 원작을 훼손했다는 둥 하는 비난을 받기도 쉽지만 영화는 책이 주는 정서를 전달하는 게 아니다. 영화가 완성됐을 때는, 전혀 다른 매체가 갖는 고유한 힘을 전달 할 수 있어야한다. 이 영화는 이런 점이 없어서 원작에 충실하지만 지루하고 깊이 없는 영화가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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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6-12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는 안 보았지만, 책은 읽었고, 두어번 더 읽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주 소중히 아끼는 책이었어요..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건지 이해가 될 것 같아요. 넙치님..

사유의 밀도가 들어가면 무엇이든 된장과 고추장처럼 맛에 깊이가 생기는 것 ... 어디즈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넙치 2014-06-13 14:29   좋아요 0 | URL
안 봐도 되는 영화 리스트에 올리셔도 될 거 같아요.^^;

책이 정말 울림이 있어 저도 보물을 찾은 거 같았아요. 글쵸, 키워드는 사유. 새벽숲길님 김치에도 사유가 들어갈 것만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