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영상자료원에서 봤는데 앞부분을 조금 놓쳤다. 영상자료원에 갈 때마다 멍청한 짓을 해서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가는데도 늦는다. 월드컵경기장에서 내리거나 반대방향으로 타거나하기 일쑤. 지난 번에는 삼각지에서 갈아타야하는데 갈월동까지 가버렸다. 찝찝하게 오프닝을 놓쳤는데 주문을 걸기로 한다. 놓친 부분은 안 중요하다..안 중요하다..최면덕분인지, 진짜로 안 중요했다ㅋ

 

감독의 초기작인데 영화가 아주 따뜻하다. 감독은 죽음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어떤 긍정성을 보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이 영화도 죽은 자들의 이야기다. 저승으로 가지 못한 이들이 저승으로 가도록 도와주는 곳이 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간직해야 비로소 저세상으로 출발할 수 있다. 이 모티브는 죽음은 암흑이나 무의 세계가 아니라는 가치관이 들어있다. 게다가 가장 행복한 기억을 지니고 저세계로 간다니.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공간은 버려진 건물로 언뜻보면 황폐해 보인다. 낡은 콘크리트벽, 건물 곳곳에 녹으로 부식된 철제 문이나 장식들, 잎이 없어 스산한 나무들, 이따금씩 안개도 끼고. 하지만 해가 넘어갈 때면 창으로 넘어들어오는 환한 빛. 황혼 무렵의 빛은 아침보다 밝다. 영화 속 인물들이 놓인 시간은 인생의 황혼 끝인데 어둠이 아니라 낮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환한 빛이 가득한 시간이다.

 

이 곳에 모인 이들은 일주일간의 유예기간을 가지고 행복했던 한 순간을 회상하는 시간을 보낸다. 길든 짧든 인생의 한 순간을 선택하는데 많은 고민이 있다. 선택한 순간을 다음날 자고 일어나면 바꾸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할아버지도 있고, 할머니도 있고, 청년도 있고, 여고생도 있고..구성원은 작은 가족, 나아가 한 사회의 구성원처럼 다양하다. 이들이 고민고민하며 선택한 순간에는 공통점이 있다. 큰 사건이나 에피소드가 아니라 곰곰이 돌이켜보지 않으면 잊고 사는 순간들이다. 한 남자는 경비행기 면허증을 따고 비행기를 조종할 때 구름 속에 들어간 느낌을, 할머니는 꼬마시절 빨간 원피스를 입고 오빠를 따라 클럽에 갔다가 오빠친구의 칭찬에 춤을 췄던 기억, 또 할아버지는 다른 남자를 평생 마음에 품었던 아내와 일몰 무렵에 벤치에 나란히 앉았던 순간 등등을 선택한다. 이런 순간들은 말로 전달하기 힘든 장면들이다. 프루스트의 마들렌느 과자를 찻잔 속에 담그는 순간 떠오르는 추억의 소환이 이성적으로 이해되지만 마들렌느 과자에 대한 개인적 추억이 선행되지 않으면 그저 지루한 이야기 일뿐이듯이.

 

감독은 이런 순간을 회상하는 인물들을 마치 사진관 의자에 앉아서 스냅사진 찍는 샷으로 프레임을 구성한다. 단조로우면서도 시선을 끄는 프레임 구성이다. 단조롭기에 인물의 얼굴을 유심히 보게 된다. 그들이 회상하면서 말을 하는 순간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그래서 그들이 이미 죽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잊고 그들이 결국 어떤 순간을 선택할지 더욱 궁금해진다. 갈팡질팡하는 이들의 마음을 단순한 프레임을 통해 엿보면서 내 마음도 갈팡질팡해진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한순간을 꼽는다면 어느 순간을 꼽을까....이 영화가 의도하는 바는 바로 이 물음일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순간이 가장 행복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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