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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 현암사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 비트겐슈타인과의 우정을 빗대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글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름이 아니라 성이다. 루트비히나 조카 파울 모두 비트겐슈타인 가문이다. 그러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란 제목은 모순이다. 원제를 찾아 봤더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Wittgensteins Neffe다. 제목에서 나온 모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베른하르트가 말하는 루트비히와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파울은 사실 삼촌 루트비히 만큼이나 미치광이였다. 루트비히는 그의 철학으로 유명해졌고 파울은 그의 광기로 유명해졌다. 루트비히는 어쩌면 더 철학적이었을 것이고 파울은 어쩌면 더 미치광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적인 비트겐슈타인이 자기의 광기가 아닌 철학을 종이에 옮겨 놓았기 때문에 철학자라고 믿고 파울이 자기의 철학을 억눌러 세상에 알리지 않고 오직 광기만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미치광이라고 믿는지도 모를 일이다. 두 사람의 두뇌는 모두 너무 비상했지만 한 사람은 자기의 두뇌를 세상에 알렸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 나는 심지어 한 사람은 자기의 두뇌를 세상에 발표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의 두뇌를 실천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38-39)
파울이 정신병으로, 베른하르트가 폐병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두 사람이 알게 됬다고 한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의 광기를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루트비히와 파울은 공통점이 있다. 오스트리아 명문가인 비트겐슈타인 가문 사람들은 두 사람을 철저히 무시했다고 한다. 제목도 모순되지만 제목도 루트비히의 조카 이야기를 통해 베른하르트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치부를 드러낸 작가라고-베른하르트의 소설 한 권만 읽어보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오스트리아 내에서는 비난을 받았던 모양이다. 신랄하고 이보다 더 혹독할 수 없을 정도로 비판해댄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우정이란 혹은 성인 사이에 교감이란 어떤 교집합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루트비히, 파울, 베른하르트의 공통분모는 일종의 광기일지도 모른다. 광기의 정의는 푸코가 말했듯이, 대상에 대한 타자화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 구조에 기반해 있다. 세 사람은 광의로는 오스트리아 내에서, 협의로는 주변 사람들한테서 배척받는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유명한 사람들이다. 파울은 막대한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주고 자신도 가난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입지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걸 에둘러 말하는 대목이 있다.
"나는 늘 내가 없는 곳에, 이제 막 도망쳐 나왔던 그곳에 있으려 한다. 나는 내가 금방 떠나 온 곳과 달려가는 곳 사이, 자동차에 앉아 있을 때만 행복하다. 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불행하게 도착하는 사람이다. 내가 도착하는 곳이 어디든 상관 없이 도착하면 나는 불행하다. 나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견뎌내지 못하고 떠나 온 곳과 가는 곳 사이에 있을 때만 행복한 인간 중 하나다."(119)
공감 백만 개를 누르고 싶은 대목이다. 그 여러 인간 중 한 명에 나도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내 삶의 스케일이 이들과 다르지만 삶의 스케일이 좁아도 이러저한 일이 있기 마련이다. "떠나 온 곳과 가는 곳 사이에 있을 때만 행복한 인간"을 위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덧. 베른하르트의 문체는 아주 독특하다. 동어반복을 늘어놓으면서도 변주를 해서 음악처럼 읽힌다. 같은 멜로디를 듣고 있는가 하면 어느새 변주 파트로 넘어가서 재잘거리는 문장들이 늘어서 있다. 내용은 무거운데 정작 문장을 읽을 때는 경쾌한, 묘한 매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