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축 처져 위안을 좀 얻고 싶어서 음악영화인줄 알고 극장으로 갔다. 결론은 위안은 커녕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야겠니,라는 삐딱한 시선으로 관람했다.-.-; 검색을 좀 해보니 감독이 고등학교때 밴드에서 겪은 이야기를 기초로 했다고.
확실히 이 영화는 청자의 입장에서 음악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연주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한다. 음악은(혹은 예술)은 창작자가 보는 관점과 소비자가 보는 관점이 다르다. 예술 소비자는 가시적인 결과물에 대한 권리만을 확보할 뿐이다. 창작자는 결과보다는 과정에 더 몰입하는 속성이 있다. 드럼은 다른 악기와 조화를 이루는 보조적 악기라고, 평소에 생각해왔었다. 물론 그릇된 생각이다. 드럼의 영역은 넓고도 깊다. 영화에서는 드럼의 넓이와 깊이를 정말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폭풍우가 치는 듯한 템포를 표현하기 위해 땀과 피를 미장센으로 주로 사용한다. 귀로만 드럼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눈으로도 드럼소리를 볼 수 있게 연출한다. 음악영화에서 이렇게 많은 피를 보다니...실제 악기연주자들이 겪을 수 있는 상황일 것이다. 빠른 화면구성으로 드럼을 칠 때 필요한 에너지 고갈을 절절히 보여줘서 피를 보는데 취약한 나는, 내내 불편한 표정과 마음으로 영화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최고의 드러머가 되려는 야망을 품은 학생이 괴물같은 선생을 만난다. 선생은 학생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악마 역할을 한다. 이 장면을 상상하기란 어렵지않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긴장감까지는 아니어도 학창시절에 악마같았던 선생을 떠올리는 일은 비교적 쉽다. 영화가 끝나고 생각해보니 이 영화는 음악영화라기 보다는 두 사람의 관계에 관한 영화였다. 최고의 예술가가 될 잠재력을 시험하는 방법에서 의문을 품지않는 선생과 그 선생을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학생. 보는 내내 무슨 음악영화가 장르영화처럼 섬뜩했다. 전반부 한 시간은 정말이지 눈을 감아야하는 장면이 속출했다.
예술적 한계를 뛰어넘는 다는 것, 혹은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건 어떤 의미일까. 영화에서, 그 한계를 뛰어넘는데는 어떤 동기가 필요하다는 걸 암시한다. 이 영화에서는 특히 개인의 약점을 더 짓밟아서 분노할 때 형성되는 폭발적 에너지에 주목한다. 폭발적 에너지는 왜 분노에서 나와야하는가. 긍정적 성질은 소용돌이 치는 에너지를 담을 수 없는가. 도덕적 윤리와 예술은 공존할 수 없는 조합일까, 하는 비예술인이 할 수 밖에 없는 생각을 했다.
음악은 하는 이만이 아니라 듣는 이를 위해 존재한다. 화나 분노에서 나온 에너지는 결국 듣는 이한테 전달되고 아이러니하게도 최대의 에너지로 연주되는 곡을 들으면 그 화나 분노도 달콤하게 느껴진다. 감상자의 역할은 어쩌면 단순한 물건 구매자 혹은 소비자의 역할 이상은 될 수 없는걸까,에 대한 해결책을 영화는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의 전반부는 뮤지션의 육체적 고통을 잘 전달한다. 심리적인 부분도 있긴 하지만 연출기법상 악기를 다루는 이의 육체적 고통과 한계를 관객이 함께 견디게 한다. 꽤 오랜 시간 연주자의 고통을 함께 겪은 후 마지막 카라반 연주 장면에서는 심리적 고통이 어떻게 음악으로 바뀌나를 체험하게 된다. 감독은 음악 생산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함께 하고자 했다. 단순한 음악감상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