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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는 집 앞 멀티플렉스는 유난히 커플들이 많이 오는 극장이다. 오늘 발렌타인 데이고 토요일이며 저녁이라 왠만하면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짬나는 시간이 아까워 극장으로 향했다. 영화 시작 30분 전에 도착했고 역시나 커플들이 득실거렸으며 <벤자민 버튼>은 딱 1좌석 남아있었다. 좌석이 나쁘면 다시 돌아오려고 했는데 남아있는 좌석은 '명당'이었다. 예매했던 누군가가 커플들 꼴보기 싫어 취소한 건 아닐까 상상했다. 한 가운데 좌석은데 양 옆으로 커플들의 대화까지 엿들으면서 기나긴 영화를 봤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로 적절한 감동과 교훈이 곳곳에 드러난다.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해, 그러니까 부러워할 것도 없고 슬퍼할 것도 없어. 그저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다해 살아가면 돼, 하고 말한다.
거꾸로 가는 생체 시계를 가지고 태어난 벤자민. 늙은 모습으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나이들수록 젊어지는 벤자민의 일생 주기는 어쩐지 처절하다. 나이드는 게 그러니까 꼭 나쁜 것만은 아니고, 젊다는 게 꼭 좋은 게 아니야,하고 역설하고 있지만 나이들어가고 있는 내 입장에서, 맞아하고 맞장구가 잘 쳐지지 않는다. 세월의 두께가 눈가를 비롯한 얼굴 곳곳에 드러나는 요즘은, 흥분도 덜하고 욕심도 적어졌지만 동시에 감동도 덜하고 희망도 절망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계속 살아가도 좋지만 다른 삶을 살아도 괜찮아(평소에 이렇게 생각했는 데 세상에나, 이 말이 영화 속에 나온다!)하는 태도는 젊음이 사라져가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태풍 태양>에 이런 대사가 있다. 젊음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과거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이십 대에 가졌던 자신감은 사라진지 오래고 그 자리를 체념으로 채워 넣는다. 체념은 자신의 좌표가 어디에 있든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다. 젊은 외모를 잃어버려서 슬픈 게 아니라 어린 시절에나 가질 수 있는 무모한 열정을 잃어버려 나이든다는 건 슬프다.
이렇게 심각한 영화는 아닌데, 혼자 심각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