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할 때마다 가방에 어떤 책을 넣을 지 고민한다. 책 내용도 중요하지만 휴대하기에는 책의 무게도 중요한 요소이다. 책 무게를 따지다 전혀 읽고 싶지 않은 책을 넣어서 나가기도 한다. 읽고 있는 책들은 대체로 무거워서 마치 1킬로 아령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기분이다. 어떤 날은 한 시간 가량의 독서시간이 있을 거를 예측하면서도 가벼운 책을 못 찾아 그냥 나갈 때도 종종 있다. 그런 날이면 별 목적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게 된다. 눈이 침침해지고 시간은 낭비되고...난 책을 읽고 싶은데....

 

영문판 페이퍼백들은 새털처럼 가벼운데 왜 우리 출판사들 책은 이렇게 무거울까. 영문판 페이퍼백들은 휴대하기에 전혀 부담이 없다는 걸 요즘 새삼 느낀다. 내가 알지 못하는 출판계의 사정이 분명히 있겠지만 요즘 책들은 터무니없이 무겁다. 빳빳한 표지와 두꺼운 내지는 심지어 자꾸 덮여서 신경질적으로 자꾸 손으로 누르게 되는 책도 있다. 표지가 두꺼운 거 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두꺼운 내지를 사용하는 건 왜 일까? 독서대에 책을 올려놓고 클립으로 고정시켜도 책이 자꾸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 덮이려고 하는 책도 많다. 마치 책은 펴서 읽는 게 아니라 책장을 덮어서 그대로 보기만 하라는 말인 것처럼.

 

언젠가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책 무게 때문에 출퇴근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인구가 줄었다고. 이 말이  빈말만은 아니다. 내가 그 줄어든 인구 중 1인이다. 제발 책 좀 가볍게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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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9-10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의합니다.
책세상문고의 책이 그래서 좋더라고요. 크기가 작거든요. 근데 페이지 수가 많아 두꺼운 책이 많아요. 두껍지 않게 1,2권으로 만든다면 가벼워서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어디 갈 때 가방에 꼭 책을 넣고 싶은 1인입니다. ^^

넙치 2014-09-11 14:58   좋아요 0 | URL
책세상 문고는 휴대하기에는 좋은데 그닥 독서 욕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게 함정..;;; 전문서는 어쩔 수 없더라도 문학만이라도 가볍게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그럼 지금보다 두 배는 책을 읽을 거 같아요!ㅎㅎ;
 
The Trial (Paperback)
Franz Kafka 지음, Parry, Idris 옮김 / Penguin Classics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1. 카프카의 <성>을 읽는데 두 번이나 실패했다. 번역본을 읽는데 실패할 때, 영역본을 읽으면 실패할 확률이 줄어든다. 카프카의 글은, 소설이란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플롯을 파괴하는 형식이다.그래서 우리말로 휘리릭 책장을 넘기다보면 하품이 나고 개연성없는 흐름에 책을 덮데 된다. 영역본은 아무래도 외국어다 보니 한글자 한글자 꼭꼭 씹어 읽게 되고 찬찬히 읽는 게 카프카 글을 읽어내는데 반드시 필요한 거 같다.

 

이 소설을 환상소설로 분류해도 될 거 같아서 적잖게 놀랏다.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들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면이 있는데 <소송>도 그렇다. 읽는 내내 고골의 소설이 자꾸 떠올랐다. 뜬금없는 이야기 진행과 주인공 요제프 K를 빼고는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서로 전혀 관련이 없으면서도 한통속인 거 같은 느낌이 든다. 이는 K의 소외감 탓일 거다. 어느 누구도 진실을 말하는 거 같지 않고 K만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바둥거리며 허둥댄다.

 

2. K는 서른 살 생일날 아침에 체포됐다는 말을 전해 들으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체포된 상태고 재판을 해야하지만 은행 직원인 K는 일상을 꾸리는데는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무슨 일 때문에 자신이 체포되고 재판을 받는지 원인을 알 수 없다. 자신에게 이 일을 알리러 나온 감독관이나 경호원들도 어디 소속인지 알 수 없다. 나중에 봤더니 경호원은 같은 은행 하급직원들이기도 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인을 아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K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숙명에 처한다. 원인을 알 수 없기에 해결책은 없다. K는 점점 불안해지고 은행에서 쌓은 자신의 위치까지도 흔들리는 상상을 한다. 삼촌의 권유로 얼떨결에 변호사를 선임하지만 늙고 병약한 변호사는 적극적인 태도보다는 사법부의 관행인 관계망의 중요성을 강조할 뿐이다. K의 소송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진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소송과 소문으로 K는 자신이 소송을 해결하겠다고 급기야 결심한다. 하지만 자신이 소송을 직접 해야겠다고 하는 것과 결심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도움을 찾아 헤맨다. 판사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를 찾아가서 그의 말에 일말의 도움을 기대하는 필사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3. K가 소송 혹은 자신의 기소 이유를 찾으려고 할 때, 독자도 열심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책장을 넘긴다. 하지만 K가 노력하면 할수록  K는 점점 소외돼 가고 독자도 혼란에 직면한다. K는, 아니 카프카는 뭘 말하려는 걸까. 사법부의 뿌리 깊은 부정과 절대 권력으로서의 군림을 말하다가도 갑자기 K의 소외로 돌아오곤 한다. 모든 인물들이 사법부의 관행을 의심하지 않고 대처하는 법을 K한테 조언한다. 피고인으로서 K는 혼자 있을 수 밖에 없다. 관행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니까.

 

그의 소외는 처음에는 외부에서 온다. 기소란 보이지 않는 커다란 절대권력이 그를 일상에서 분리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이 흐르면서 K의 소외는 내면적인 것이 된다. 겉으로는 K는 어떤 변화도 겪지 않기에 K가 소송 중이라는 소문만이 있을 뿐이지만 그 소문에 K는 초조해진다. 난데없이 소설이 끝나기 전에 '성당에서In the Cathedral'란 챕터가 나타난다. 명목은 은행에 거래차 온 이탈리아인들을 안내하기 위해서였는데 이탈리아인들은 나타나지 않고 신부와 K의 대화가 길게 이어진다. 신부가 한 이야기는 이렇다. 한 남자가 법(원) 입구에 들어가기 위해 경비원의 안내를 받는데 그 경비원의 임무는 입구까지만 안내하는 거다. 안으로 못 들어간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평생 그 입구에서 기다리기만 하다가 생을 마감한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두고 마치 철학 수업을 하는 것처럼 두 사람이 서로 의견을 나눈다. 어느 누구도 입구를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지 않았고 경비원은 그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해서 입구까지만 안내했다고. 입구 안으로 안 들어간 건 바로 남자 자신의 선택이라고. 이 대목이 카프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절대 권력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무형이다. K가 이유없이 체포된 것 처럼. 절대 권력에 힘을 실어주는 건 절대 권력을 믿는 개인이다. K는 그 보이지 않는 힘을 의심하지만 의심만으로 보이지 않는 힘을 물리치기 힘들다. 행동을 하기 위해서 의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념이 필요하다. 하지만 신념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마지막에 결국 K는 죽는다. 두 사람이 K를 채석장으로 데리고가서 칼을 K의 눈 앞에서 주고 받을 때 K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칼을 주고 받을 때 어떤 위협적인 분위기는 묘사되지 않는다. 어쩌면 K가 그 칼을 뺏기를 바라면서 K 앞에서 칼을 보여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K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고 결국 그 칼의 희생자가 된다. 마지막 묘사 장면은 이렇다.

 

"With his failing sight K. could still see the gentleman right in front of his face, cheek pressed against cheek, as they observed the decisive moment. 'Like a dog!' he said. It was as if the shame would outlive him."(178)

 

K는 개가 안 되려고 발버둥쳤는데 보이지않은 것에 대한 불신 혹은 불안이 그를 갉아먹었다. 그를 둘러싼 소송이 그를 죽인 게 아니라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의 불안에 영혼을 잠식당했다.

 

4. 제도의 확고함 속에서 버텨보려는 개인의 불안에 방점을 찍으면서 한 개인한테 너무 많은 부담을 지게 하는 건 아닌지, 하는 결말이다. 물론 제도의 부패나 사람들의 굴욕적인 태도에 대해서 상세하게 묘사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제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순응적 태도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K를 비난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 모두 K 니까.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 앞에서 미리 위축돼서 불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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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월엔 아트나인에서 알랭 레네 영화 몇 편을 상영한다. 그 첫번째.

알랭 레네는 영화 이외의 매체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연극, 음악, 그림, 문학. 영화가 종합예술이기는 하지만 이미지 재현 방식은 회화랑 다르고 이야기 전달 방식은 문학이랑도 다르다. 배우들이 디제시스란 공간에서 연기를 하지만 연극하고 또 다르다. 즉 영화는 모든 걸 섞어 놓은 듯하면서도 독특한 문법을 지니고 있다. 레네는 영화에 이 모든 걸 섞는 방법을 택했고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영화를 만들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다방면에 호기심을 갖고 잡기로 흐르지 않고 하나로 집약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기란 쉽지 않은데 레네 감독은 문화간틔 경계를 넘나드는 진정한 능력자란 생각이.

 

2. 소설의 서사에 또 다른 소설을 진행시키는 걸 메타 소설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메타 영화란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메타 영화라고 부를만하다. 극작가 앙뜨완의 부음을 알리면서 영화가 시작한다. 생전의 친구들이 앙뜨완의 집에 모이고 앙투완의 유언대로 <에우리디스> 연극을 촬영한 영화가 상영된다. 이것이 영화인지 연극인지 경계가 불분명하고 이 영화를 보면서 지인들은 대사를 읊기 시작한다. 그들은 <에우리디스> 연극에서 배우로 공연한 적이 있다. 이들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의 대사를 말하면서 카메라는 슬며시 예전 배우들을 본격적으로 담는다. 관객이었던 그들이, 영화 내에서 실제로 연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또 다른 관객인 우리는 그들의 연극을 보고 있게 된다. 미장센도 미니멀해서 연극세트같다. 즉 진짜 관객은 두 개의 연극을 촬영한 두 편의 영화를 동시에 보면서 감독이 편집한 하나의 연극과 영화를 보고 있게 된다. 아무래도 형식이 독특해서 이런 진행 방식에 주목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이런 기법을 생각할 수 있는지, 그저 입 벌리고 감탄만 하게 된다. 관객이 뭘 보고 있는지 혼란을 겪는 사이에 극은 절정을 향해가고 영화 속 관객, 즉 앙뜨완의 친구들의 기억을 소환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건, 배우들의 추억 조각이기도 하다.

 

3. <에우리디스> 혹은 <오르페우스>는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 이 영화 속 이야기는 현대판으로 변형을 했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스의 옛연인의 존재를 알고 질투를 한다. 그러는 중에 에우리디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새벽3시까지 에우리디스의 얼굴을 보지 않고 밤을 보낸다면 에우리디스가 저승으로 가는 대신 이승에서 오르페우스와 아침식사를 하며 커피를 마실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오르페우스가 누구인가. 호기심의 대마왕이다. 이 극에서는 질투의 대마왕이다. 결국 오르페우스는 새벽 3시가 되기 전에 질투로 에우리디스를 돌아보게 된다. 내가 흥미롭게 본 점은 오르페우스의 질투다. 질투는 현실이 아니라 상상의 영역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보면, 사랑하는 이가 다른 도시에 있을 때 모든 게 질투를 유발하는 매개체가 된다. 사랑하는 이가 탔을 기차 시간표마저도 질투에 기름을 붓는 폭발적인 연료가 된다. 단순한 기차 시간표를 들여다보면서 자신이 부재한 시공간에 대한 통제 불가능에 분노가 극대화된다. 사랑하는 이는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실체는 상상을 통해 실제보다 더 현실적이 돼버린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스를 잃는 과정은 바로 자신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상상이 낳은 질투다.

 

4. 왜 제목이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일까....

 

5. 배우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를 연기한 배우들이 워낙 출중한 연기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극을 몰입시키는 힘이 두 사람의 목소리에 있다. 사실 표정보다는 목소리에서 나오는 힘이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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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할 말이 많은 영화기도 하면서 또 할 말이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 무수한 말들이 떠오르고 책까지 뒤적여봤지만 도통 감독의 시각에 동의하기란 힘들다. 그래서 별로 말하고 싶지도 않다. 여성 해방을 성만을 통해 이야기하려 하나. 이야기를 하는 조와 이야기를 듣고 해석하려 애쓰는 샐리그먼의 구도다. 조와 샐리그먼은 대척점에 있다. 섹스 중독자와 무성애자. 두 사람이 추구하는 바는 같다. 둘 다 오르가슴을 추구한다. 다만 그 수단이 다를 뿐이다. 색정광은 가장 원초적인 본능을 수단으로 택한다. 무성애자인 샐리그먼의 무기는 이성이다. 그는 독서광이다. 조가 평생 오르가슴을 찾아 섹스 파트너를 찾아 헤맸다. 샐리그먼은 평생 독서를 통해 지적 쾌락을 추구하고 분석과 이성을 좇았다. 조의 이야기에 샐리그먼이 들이대는 분석틀을, 감독은 의도적으로 희화화한다. 즉 이성이나 지식은 본능보다 결코 우월하지도 않으며 때론 본능 앞에서는 무기력하다는 걸 조롱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이성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는 방법이 지나치게 극단적인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다. 게다가 결말에서 조의 선택이 아니라 샐리그먼이 본능적 행동을 취할 때 총으로 대응하는 조의 행동은 이성의 두 얼굴에 대한 복수이기도 하다. 이성은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하찮은 것쯤으로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맞는 말이지만 왠지 불쾌하다. -.-; 

 

2.

볼륨1과 볼륨2가 런닝타임이 길어 편의상 나눈거지 원래는 한 영화다. 볼륨1의 오프닝과 볼륨2의 엔딩은 똑같다. 암전으로 시작해서 암전으로 끝난다. 암전과 암전 사이에 긴 이야기가 있다. 그 긴 이야기는 실은 색정증이란 조의 섹스 라이프 일대기다. 표현 수위는 높지만(요즘 대세인지 수위 높은 영화가 많다) 보고서처럼 건조하다. 조의 심리를 표현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조는 한국식으로 말하면 옹녀쯤 되는데 옹녀하면 떠오르는 게 쾌락과 해학이다. 종종 유머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조를 보면서 옹녀의 고통은 간과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조가 만족할 줄 모르는 성욕의 소유자고 그 과도한 욕망으로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지쳐간다. 정신분석에서 "욕망은 충족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하는 것"이란 말을 철저하게 이행하는 인물이다. 존재의 근원적 물음과 회의를 지니는 인물로까지 상승시킬 수 있겠으나 나는 조를 표현한 감독한테 그런 지위를 주고 싶지 않다.@.@

 

3.

영화가 양괄식인 이유? 암전 전과 암전 후는 현실이고 암전 후와 암전 전은 영화다. 감독의 말대로 이건 말도 안 되는 한편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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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용하는 말인 '소수자'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영화다. 제목은 '야간비행'이란 이름을 가진 바에서 따왔다. 한때는 게이바였으나 영화 속에서는 철거를 기다리는 버려진 공간이다. 원칙적으로 아무도 못 들어가도록 폐쇄된 공간인데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 누군가가 다른 이를 데리고 와서 잠시 머물다 가는 상징적 공간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공간에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나 버려진 공간을 찾을 때 절박하거나 절망적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절망 속에서 갈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될 수 있는 함의가 있다. 이 영화는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네다섯 명이다. 이들 모두 어떤 의미에서 소수자다. 모의고사 1등급으로 서울대를 바라보는 용주. 그는 성소수자다. 모범적 학교 생활과는 별개로 실제로 용주가 뭘 좋아하고 어떤 아이인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낳고 기른 엄마도 용주를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용주의 주시를 받는 한기웅. 기웅 역시 학급에서 소수자다. 주먹을 쓰며 패거리를 몰고 다니지만 방과 후 택배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의 가정사는 서서히 드러나는데 노조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노조를 배신한 후 주변인들한테 받았던 멸시와 질타로 트라우마를 지니게 된다. 그 트라우마로 폭력이란 방어기제를 택한다. 폭력은 기웅을 세상과 더 멀어지게 하고 기웅은 고립된 세계에 서 있는다. 기웅을 따르는, 아니 실은 기웅의 폭력성을 이용해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반장. 그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법을 모르고 폭력의 잔인성에서 안도감을 얻는 가엾은 영혼이다. 반장 역시 다수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소수자다. 그리고 기택. 흔히 왕따인데 용주만이 기택을 친구로 여기지만 결정적 순간에 용주가 동성애자란 걸 밝히면서 용주를 배신한다. 기택은 오랜 왕따와 집단 구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용주의 비밀을 이용한다. 기택은 하나 있던 친구마저도 잃을 위기에 처한다.

 

모두 같은 반인 남고생들이다. 이들 사이에 힘의 역학과 관계의 그물망이 얽히고설켜있다. 청소년이 외부에 비춰지는 시선도 서늘하다. 학교와 선생님은 입시에만 관심이 있고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는 무관심하다. 아이들은 겉으로는 규칙을 지키며 사회화 과정을 잘 이행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내면은 전혀 그렇지 않다. 본인들도 모르는 폭력성에 노출돼서 상대를 위협하는가 하면 어느새 자신이 상처를 받고 있다.

 

영화가 남자고등학교란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지만 학교 밖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영화를 보는 동안 남고생 이야기라는 걸 잊게 된다.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이야기다. 영화는 다행히 약간의 희망을 던져준다. 용주가 아웃팅을 당하고 집단 폭력을 당한 후에 기웅을 찾아간다. 기웅은 용주가 아웃팅을 당했을 때, 억제했던 분노를 마구잡이로 분출한다. 그 분노가 용주를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엔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으니까. 트라우마로 친구가 늘 없었던 기웅이 마음 속으로 유일하게 친구라고 받아들인 인물이 아마도 용주가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용주를 지키는 건 바로 기웅 자신의 친구를 지키는 거니까. 외롭지 않냐는 용주의 물음에 기웅은 처음으로 울먹이며 말한다. 외롭다고, 늘. 영화는 여기서 끝이난다. 그래서 약간 희망적인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서로의 결핍을 인정했고 그것만으로도 한걸음씩 서로에게 다가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삶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기웅은 소년원에 가야할 거고 더 깊은 외로움의 늪으로 빠질 것이다. 성소수자인 용주 역시 자퇴할 거고 이성애자 사회에서 동성애자로 살아야하는 형벌을 평생 짊어질 것이다. 내가 어른이 되보니 어른은 훨씬 더 외롭다. 자존심때문에 안 외로운 척 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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