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9월엔 아트나인에서 알랭 레네 영화 몇 편을 상영한다. 그 첫번째.
알랭 레네는 영화 이외의 매체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연극, 음악, 그림, 문학. 영화가 종합예술이기는 하지만 이미지 재현 방식은 회화랑 다르고 이야기 전달 방식은 문학이랑도 다르다. 배우들이 디제시스란 공간에서 연기를 하지만 연극하고 또 다르다. 즉 영화는 모든 걸 섞어 놓은 듯하면서도 독특한 문법을 지니고 있다. 레네는 영화에 이 모든 걸 섞는 방법을 택했고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영화를 만들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다방면에 호기심을 갖고 잡기로 흐르지 않고 하나로 집약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기란 쉽지 않은데 레네 감독은 문화간틔 경계를 넘나드는 진정한 능력자란 생각이.
2. 소설의 서사에 또 다른 소설을 진행시키는 걸 메타 소설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메타 영화란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메타 영화라고 부를만하다. 극작가 앙뜨완의 부음을 알리면서 영화가 시작한다. 생전의 친구들이 앙뜨완의 집에 모이고 앙투완의 유언대로 <에우리디스> 연극을 촬영한 영화가 상영된다. 이것이 영화인지 연극인지 경계가 불분명하고 이 영화를 보면서 지인들은 대사를 읊기 시작한다. 그들은 <에우리디스> 연극에서 배우로 공연한 적이 있다. 이들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의 대사를 말하면서 카메라는 슬며시 예전 배우들을 본격적으로 담는다. 관객이었던 그들이, 영화 내에서 실제로 연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또 다른 관객인 우리는 그들의 연극을 보고 있게 된다. 미장센도 미니멀해서 연극세트같다. 즉 진짜 관객은 두 개의 연극을 촬영한 두 편의 영화를 동시에 보면서 감독이 편집한 하나의 연극과 영화를 보고 있게 된다. 아무래도 형식이 독특해서 이런 진행 방식에 주목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이런 기법을 생각할 수 있는지, 그저 입 벌리고 감탄만 하게 된다. 관객이 뭘 보고 있는지 혼란을 겪는 사이에 극은 절정을 향해가고 영화 속 관객, 즉 앙뜨완의 친구들의 기억을 소환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건, 배우들의 추억 조각이기도 하다.
3. <에우리디스> 혹은 <오르페우스>는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 이 영화 속 이야기는 현대판으로 변형을 했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스의 옛연인의 존재를 알고 질투를 한다. 그러는 중에 에우리디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새벽3시까지 에우리디스의 얼굴을 보지 않고 밤을 보낸다면 에우리디스가 저승으로 가는 대신 이승에서 오르페우스와 아침식사를 하며 커피를 마실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오르페우스가 누구인가. 호기심의 대마왕이다. 이 극에서는 질투의 대마왕이다. 결국 오르페우스는 새벽 3시가 되기 전에 질투로 에우리디스를 돌아보게 된다. 내가 흥미롭게 본 점은 오르페우스의 질투다. 질투는 현실이 아니라 상상의 영역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보면, 사랑하는 이가 다른 도시에 있을 때 모든 게 질투를 유발하는 매개체가 된다. 사랑하는 이가 탔을 기차 시간표마저도 질투에 기름을 붓는 폭발적인 연료가 된다. 단순한 기차 시간표를 들여다보면서 자신이 부재한 시공간에 대한 통제 불가능에 분노가 극대화된다. 사랑하는 이는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실체는 상상을 통해 실제보다 더 현실적이 돼버린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스를 잃는 과정은 바로 자신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상상이 낳은 질투다.
4. 왜 제목이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일까....
5. 배우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를 연기한 배우들이 워낙 출중한 연기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극을 몰입시키는 힘이 두 사람의 목소리에 있다. 사실 표정보다는 목소리에서 나오는 힘이 상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