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The Trial (Paperback)
Franz Kafka 지음, Parry, Idris 옮김 / Penguin Classics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1. 카프카의 <성>을 읽는데 두 번이나 실패했다. 번역본을 읽는데 실패할 때, 영역본을 읽으면 실패할 확률이 줄어든다. 카프카의 글은, 소설이란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플롯을 파괴하는 형식이다.그래서 우리말로 휘리릭 책장을 넘기다보면 하품이 나고 개연성없는 흐름에 책을 덮데 된다. 영역본은 아무래도 외국어다 보니 한글자 한글자 꼭꼭 씹어 읽게 되고 찬찬히 읽는 게 카프카 글을 읽어내는데 반드시 필요한 거 같다.
이 소설을 환상소설로 분류해도 될 거 같아서 적잖게 놀랏다.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들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면이 있는데 <소송>도 그렇다. 읽는 내내 고골의 소설이 자꾸 떠올랐다. 뜬금없는 이야기 진행과 주인공 요제프 K를 빼고는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서로 전혀 관련이 없으면서도 한통속인 거 같은 느낌이 든다. 이는 K의 소외감 탓일 거다. 어느 누구도 진실을 말하는 거 같지 않고 K만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바둥거리며 허둥댄다.
2. K는 서른 살 생일날 아침에 체포됐다는 말을 전해 들으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체포된 상태고 재판을 해야하지만 은행 직원인 K는 일상을 꾸리는데는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무슨 일 때문에 자신이 체포되고 재판을 받는지 원인을 알 수 없다. 자신에게 이 일을 알리러 나온 감독관이나 경호원들도 어디 소속인지 알 수 없다. 나중에 봤더니 경호원은 같은 은행 하급직원들이기도 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인을 아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K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숙명에 처한다. 원인을 알 수 없기에 해결책은 없다. K는 점점 불안해지고 은행에서 쌓은 자신의 위치까지도 흔들리는 상상을 한다. 삼촌의 권유로 얼떨결에 변호사를 선임하지만 늙고 병약한 변호사는 적극적인 태도보다는 사법부의 관행인 관계망의 중요성을 강조할 뿐이다. K의 소송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진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소송과 소문으로 K는 자신이 소송을 해결하겠다고 급기야 결심한다. 하지만 자신이 소송을 직접 해야겠다고 하는 것과 결심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도움을 찾아 헤맨다. 판사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를 찾아가서 그의 말에 일말의 도움을 기대하는 필사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3. K가 소송 혹은 자신의 기소 이유를 찾으려고 할 때, 독자도 열심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책장을 넘긴다. 하지만 K가 노력하면 할수록 K는 점점 소외돼 가고 독자도 혼란에 직면한다. K는, 아니 카프카는 뭘 말하려는 걸까. 사법부의 뿌리 깊은 부정과 절대 권력으로서의 군림을 말하다가도 갑자기 K의 소외로 돌아오곤 한다. 모든 인물들이 사법부의 관행을 의심하지 않고 대처하는 법을 K한테 조언한다. 피고인으로서 K는 혼자 있을 수 밖에 없다. 관행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니까.
그의 소외는 처음에는 외부에서 온다. 기소란 보이지 않는 커다란 절대권력이 그를 일상에서 분리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이 흐르면서 K의 소외는 내면적인 것이 된다. 겉으로는 K는 어떤 변화도 겪지 않기에 K가 소송 중이라는 소문만이 있을 뿐이지만 그 소문에 K는 초조해진다. 난데없이 소설이 끝나기 전에 '성당에서In the Cathedral'란 챕터가 나타난다. 명목은 은행에 거래차 온 이탈리아인들을 안내하기 위해서였는데 이탈리아인들은 나타나지 않고 신부와 K의 대화가 길게 이어진다. 신부가 한 이야기는 이렇다. 한 남자가 법(원) 입구에 들어가기 위해 경비원의 안내를 받는데 그 경비원의 임무는 입구까지만 안내하는 거다. 안으로 못 들어간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평생 그 입구에서 기다리기만 하다가 생을 마감한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두고 마치 철학 수업을 하는 것처럼 두 사람이 서로 의견을 나눈다. 어느 누구도 입구를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지 않았고 경비원은 그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해서 입구까지만 안내했다고. 입구 안으로 안 들어간 건 바로 남자 자신의 선택이라고. 이 대목이 카프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절대 권력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무형이다. K가 이유없이 체포된 것 처럼. 절대 권력에 힘을 실어주는 건 절대 권력을 믿는 개인이다. K는 그 보이지 않는 힘을 의심하지만 의심만으로 보이지 않는 힘을 물리치기 힘들다. 행동을 하기 위해서 의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념이 필요하다. 하지만 신념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마지막에 결국 K는 죽는다. 두 사람이 K를 채석장으로 데리고가서 칼을 K의 눈 앞에서 주고 받을 때 K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칼을 주고 받을 때 어떤 위협적인 분위기는 묘사되지 않는다. 어쩌면 K가 그 칼을 뺏기를 바라면서 K 앞에서 칼을 보여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K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고 결국 그 칼의 희생자가 된다. 마지막 묘사 장면은 이렇다.
"With his failing sight K. could still see the gentleman right in front of his face, cheek pressed against cheek, as they observed the decisive moment. 'Like a dog!' he said. It was as if the shame would outlive him."(178)
K는 개가 안 되려고 발버둥쳤는데 보이지않은 것에 대한 불신 혹은 불안이 그를 갉아먹었다. 그를 둘러싼 소송이 그를 죽인 게 아니라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의 불안에 영혼을 잠식당했다.
4. 제도의 확고함 속에서 버텨보려는 개인의 불안에 방점을 찍으면서 한 개인한테 너무 많은 부담을 지게 하는 건 아닌지, 하는 결말이다. 물론 제도의 부패나 사람들의 굴욕적인 태도에 대해서 상세하게 묘사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제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순응적 태도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K를 비난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 모두 K 니까.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 앞에서 미리 위축돼서 불안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