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리라이팅 클래식 3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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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중고교 시절에 거치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 역시 고등학생 때 처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만났다. 차라투스트라를 만난 것과 이해하는 것은 별개이다. 고등학생 때 만났지만 별 감흥이 없었고, 모리악으로 석사 논문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조금 더 진지하게 만났지만 음미하지는 못했다. 그 후 지금까지 니체는 언제나 내 마음 속 일순위를 차지하는 철학자라고나 할까. 니체 전집을 모으기 시작했고(읽진 않고-.-) 니체 해설서를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몇 권 읽은 해설서 중 가장 재미있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해제에서 저자는 하이데거의 니체, 데리다의 니체, 들뢰즈의 니체란 말을 사용한다. 나는 이 책을 고병권의 니체(고병권이 해석하고 다시 창조한 니체)라고 말하고 싶다.  니체는 어떻게보면 해체주의의 진정한 선구자인 것도 같다. 19세기에 이미 그는 창조를 위한 해체적 삶을 살았고, 글로 남겼다. 벤야민이나 바르트의 글쓰기 방식은 그에 비하면 전혀 새롭지 않다는 걸 재발견!

니체를 그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이유를 말하라고 하면, 명확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왜 니체에 마음이 기울고, 종교가 없는 내게 성경과 같은 역할을 했는지. 니체의 권력의지가 충만한 사람을 존경하고, 그런 삶을 동경한다. 존경과 동경이란 말 속에 내 좌표는 드러난다. 존경과 동경은 내가 속해 있지 않은 영역에서 가능하다. 내 존경과 동경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삶을 꾸리는 것이 내 일생의 과제일지도 모른다.

고병권이 다시 그린 니체는 오만하기만 한 니체가 아니다. 오만한 문체에서 이렇게 향이 퍼지는 문체를 찾아낼 수 있는 건 저자가 갖고 있는 니체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사랑은 숨기려해도 숨길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요즘의 내 촉각은, 나도 모르게 저자가 주제에 관한 글을 쓸때, 애정의 정도를 감지하는 데 곤두서 있다. 죽은 인물, 또는 과거의 유물에서 현재를 발견하고 사랑스럽게 껴안는 능력이 지금 내게 절실히 필요하다. 이런 시점에서 읽은 니체는 그 자체로도 좋지만 저자가 바라본 니체, 그리고 그 충만한 애정지수에 듬뿍 점수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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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 빼앗긴 들에 서다
강만길 엮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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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했던것과는 달리 논문 모음집이다. 아, 인터넷 서점의 불편함. 논문들이라 랜덤하게 읽었다. 내가 경제, 사회사에 대해 글을 쓸것도 아니니까 그냥 가볍게 읽었다. 사실 가벼운 책이 전혀아니지만. -.-

지배와 착취 구조에 대해 저 멀리 일본 식민시대와 개항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책을 읽다보면 아는 만큼 절망적이 된다. 후기 산업사회, 또는 소비 사회라고 불리는 현재의 지배와 착취 구조가 그 계보를 갖고 있다니 말이다. 게다가 아주 고착화된. 지나치게 물신주의에 우위를 두어 어떤 방법으로든 경제적 부를 이루거나 스타성을 갖고 있다면 영웅시하는 사회 풍조에 아주 멀미가 난다.

2월 작업실을 얻었다는 말에 세 사람의 반응을 보면, ㅇ은 글 쓰려면 다들 작업실 얻더라, 잘 했네. ㅁ은 그럼 이제 글 쓰는거야?ㅈ은 그럼 이제 당선되는거야? 상금 받으면 나 여행보내주는거지?

세 사람의 반응은 각기 다른 가치관을 보여준다. 나는 ㅈ에게 적잖게 실망을 느꼈고, 전형적인 파시즘형 인간을 그간 어떻게 사귈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 내게도 물론 ㅈ의 모습이 숨어있다는 걸 인정하지만 그 모습이 내 전부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이런 멀미 때문에 내가 제도권에서 부적응자로 살기로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 옳다고 믿는 내 가치관이 정말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지 흔들릴 때가 있다. 사람을 안만나고 살 수는 없으므로 내 삶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나는 강해지지 못하고 자꾸 움츠러든다.

쓰다보니 책 내용이 빠진 리뷰가 되었고나. 아무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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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1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9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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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는 박통의 시대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학교에서 근/현대사 부분은 늘 뒷부분에 배치되어 있었다. 2월이면 수업이 거의 이루어 지지 않았고, 근/현대사 부분은 늘 깨끗하게, 밑줄 하나 치지 않은 채 역사시간이 공식적으로 끝나곤했다. 그리고 새 학기가 시자되면 다시 고조선부터 배우는, 아니 암기하는 죽은 역사 교육이 반복되곤했다. 근/현대사는 그렇게 역사책에서 부록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기억된다. 어린 마음에 지루한 고조선이 나오는 앞부분만 맨날 반복하지말고 거꾸로 수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70년대는 내가 숨을 쉬고 있었던 시대이지만 사물의 이치를 판단할 수 없는 아기 때이다. 박통 시기를 살았지만 박통 시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당시의 사건들, 비화들이 80년대 후반 민주화란 이름하에 90년대에 걸쳐 에피소드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나왔었다. 90년대에는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할 수 있는 기쁨에 성찰보다는 센세이셔널한 효과가 더 컸었던 것 같다. 

2000년대 들어서 경제는 침체기고, 우리 사회와 개인의 삶 속에 깊숙하게 스며있는 파시즘의 근원을 추척하면서 박통 시기가 성찰되고 있다. 사실, 이 정도로 심각한 줄 몰랐다. 박통은 대통령이라기 보다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봉건시대의 군주와 같은 모습이다. 오늘날의 사회, 정치, 경제 문제는 최근의 일이 아니라 수십년 동안 계속되온 구조적 문제점 때문이다. 이 구조적 문제점을 인식하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역사를 반추하는 이유다.

이런 책을 읽고 숙지해야할 사람은 사실 정치권이나 지배층이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에 관심이 없을 것이고 현재 얻을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것이다. 국가는 개인이 만든다. 의식있는 개인이 없는 한 박통의 변종은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서 나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역시 내 앞의 이익을 챙기기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본다. 부르주아적 삶을 영위하면서, 또는 꿈꾸면서 의식의 한 귀퉁이에는 미미한 저항이 있다. 이 미미한 저항을 볼때마다 나는 이중인격자고 비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까뮈의 자살, 벤야민의 자살,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해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별개다. 나는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이해하는 인간으로 남아 하늘이 내게 준 생을 다 할 것이다. 이해하는 인간의 고통, 그것이 내 운명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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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탱 게르의 귀향
내털리 데이비스 지음, 양희영 옮김 / 지식의풍경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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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봤더라면 아마 사지 않았을 책이다. 제라르 드 빠르디유가 가짜 마르탱을 연기했던 <마틴 기어의 귀향>을 보면서 심하게 흥분했었다. 본지 몇 년이 흘렀지만 영화 내용보다는 영화를 보고 난 후의  흥분을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  나중에 리처드 기어가 주연을 하고 <서머스 비>로 리메이크 되었지만 할리우드 냄새가 솔솔나는 영화로 원작의 섬세함에는 견줄 수 없는 범작일 뿐이었다.

대략적 줄거리는 진짜 마르탱이 부재한 동안 가짜 마르탱이 나타나 아내와 상속될 재산을 가로채려하는데 진짜 마르탱이 나타나 전모가 밝혀진다. 현란한 상황 재연없이 법정에서 인물들이 증언을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그들의 얼굴표정에서 긴장감이 감도는 심리묘사가 빼어난 영화였다. (이 문장을 쓰면서 깨닫는데 난 법정 드라마를 좋아하는거 같다)

그리고 내가 충격적으로 기억하는 건 바로 베르트랑드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가짜 남편의 정체를 알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아는 사람"(내 기억력을 믿을게 못되지만 대략 이런 말이었다)이었기 때문에 가짜 남편을 진짜 남편보다 더 좋아했다.

이런 영화에 대한 기억에 힘입어 어쩌다 읽게 되었다. 영화가 만들어진 후 쓰여진 책은 흥미롭지 않은데 이 책은 다행히도 단순한 줄거리 나열이 아닌 것에 일단 안도했다. 역자 후기를 보니 미국인 프랑스 역사가인 저자는 영화를 만들 당시에 참여했는데 사실과 벗어난 극적 구성을 극복해보려고 쓴 책이란다.

한 사건을 두고 여러 사람의 진술을 객관적 사료를 바탕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지명과 여러가지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가 짧아서 두 번 읽었다. 분량이 짧아서 다행이지. 짧지만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먼저 16세기 결혼 제도에 대한 야만성. 마르탱이 아내와 아들을 남겨둔 채 홀연히 떠나는 이유는 바로 제도가 부과하는 가장이란 임무에 순응하지 못한 인물로 비춰진다. 그는 가족 밖의 세계에 대해 꿈을 꾸었고 결국 8년 동안 잠적한다. 베르트랑드 역시 마르탱이 없는 동안 아르노(가짜 마르탱)한테서 열정을 느꼈기 때문이고 의무적 결혼 생활이 아닌 자발적 결혼 생활로 주체적 삶을 꾸려간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 삶이 거짓에 기초한다할지라도.

마지막 부분에  몽테뉴가 이 사건을 언급한 에세이, 그리고 판사가 쓴 책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간의 객관성이란 취약하기 그지 없는 것으로 법정에서도 진실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시사하고 있다. 파스칼의 명언이 생각난다. "피레네 이쪽에서는 진실인 것이 피레네 저쪽에서는 거짓이다." 절대적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진실을 규정하는 것은 인간이 처한 상황이다. 또 며칠 전에 읽은 글귀도 떠오른다. 인간관계란 같은 방식으로 보는 것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보는 방식을 "존중"하는 데 기초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혼란스러웠던 이유가 독자에게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여러 시각을 조명하면서 존중하는 걸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명심하고 또 명심할지어다.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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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1-25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넙치님 탱스투~

넙치 2011-01-25 22:04   좋아요 0 | URL
저도 땡스투..ㅋ 오래 전에 끼적거린 걸 다시 읽어서 좋네요. 삼 년 전에는 이런 생각을 했구나...하고 근데 몹시 부끄럽네요. 사고의 폭이 좁아서.ㅜㅜ
반딧불이님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 궁금해요.
 
파놉티콘- 정보사회 정보감옥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3
홍성욱 지음 / 책세상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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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헤이워드의 책을 읽다가 시선의 권력에 관한 대목을 만났다. 거기서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에 관해 말하고 있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쓰기 전에 먼저, 수전 헤이워드의 글쓰기 방식이 사뭇 유행적 흐름을 타고 있는데 정이 쬐금 떨어졌다. 뤽 베송을 분석하는 두껍지 않은 책에서 그녀는 모든 사회학적 이론을 언급하고 있다. 부르디외의 문화계급론, 보드리야르의 소비사회와 시뮬라시옹, 로라 멀비의 에세이, 이제 벤담과 푸코의 파놉티콘까지...뭐 덕분에 파놉티콘 뿐 아니라 푸코의 <감시와 처벌>까지 들추어보긴 했지만 문제는, 수전 헤이워드가 이 방대한 개념들을 얄팍하게 다루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유행에 민감한 글쓰기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책 얘기를 정리해 보면, 정보화 사회의 감옥을 벤담의 원형 감옥과 연결짓고 있는 저자의 순발력과 재치가 번뜩인다. 인간은 어떻게 보면 이 원형감옥에 적합한 존재가 아닌가도 싶다. 어떤 제도든 시작할 때, 선의에서 시작하지만 적응의 동물 인간은 곧 어떤 제도에든 익숙해진다. 그리고는 변종을 만들어 그 순기능에 반대되는 역기능을 사용하는 자들이 권력을 획득한다. 이런 권력의 메커니즘은 벤담의 시대든 현대든 변함없이 이어져온 것처럼 보이고, 단지 도구만 '발전' 또는 '개발'이란 이름으로 치환되어오는 듯해 절망감이 든다.

저자는, 파놉티콘 개념을 통해 넷Net상의 감시 기능 수행을 말하고 사생활privacy 강화를 주장하지만, 나는 이 프라이버시 강화 필요성에 회의적이다. 누구를 위한 프라이버시인지 모호하고,  프라이버시의 정의 또한 분명하지 않다.

얼마전, S-Oil 카드를 만들었다. 에스 오일 주유소를 그동안 한 번도 이용하지 않다가 무려 50원!이나 저렴한걸 발견하고 기름을 넣으면서 만들었다. 그리고 적립금이 있다는 삼성카드로 결제 했다. 이로써 나는 삼성화재에서 한 통의 전화와 에스 오일로부터 세 통의 전화를 받았다. 물론 텔레마켓팅을 위한 전화였고, 나는 바쁘다고 약간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정보화 감옥이란 이런 것이다. 내가 적립금을 위해 삼성카드를 사용하면서 카드사가 아닌! 화재사에 내 정보를 누출했고, 역시 에스 오일 주유소 적립금을 위해 에스 오일사와 연계된 회사에 내 정보를 나도 모르게 내 준 것이다.  소비사회에서 공짜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이런 사소한 일에서도 드러난다. 모든 적립금은 내 정보를 팔아먹은 대가다. 그러니 적립금을 포기하고 내 정보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적립금은 그대로 두고 내 정보를 지켜달라고 항의할 것인가. 이런 종류의 항의란 너무 귀찮은 일이고, 그렇다고 소비사회 이전의 삶을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 선택의 여지가 있는가, 대안은? 솔직히 말하자면, 악당들에게 도용되지만 않는다면 나는 내 정보의 일부를 팔아먹어도 신경쓰고 싶지않다. 귀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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