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중고교 시절에 거치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 역시 고등학생 때 처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만났다. 차라투스트라를 만난 것과 이해하는 것은 별개이다. 고등학생 때 만났지만 별 감흥이 없었고, 모리악으로 석사 논문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조금 더 진지하게 만났지만 음미하지는 못했다. 그 후 지금까지 니체는 언제나 내 마음 속 일순위를 차지하는 철학자라고나 할까. 니체 전집을 모으기 시작했고(읽진 않고-.-) 니체 해설서를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몇 권 읽은 해설서 중 가장 재미있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해제에서 저자는 하이데거의 니체, 데리다의 니체, 들뢰즈의 니체란 말을 사용한다. 나는 이 책을 고병권의 니체(고병권이 해석하고 다시 창조한 니체)라고 말하고 싶다. 니체는 어떻게보면 해체주의의 진정한 선구자인 것도 같다. 19세기에 이미 그는 창조를 위한 해체적 삶을 살았고, 글로 남겼다. 벤야민이나 바르트의 글쓰기 방식은 그에 비하면 전혀 새롭지 않다는 걸 재발견!
니체를 그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이유를 말하라고 하면, 명확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왜 니체에 마음이 기울고, 종교가 없는 내게 성경과 같은 역할을 했는지. 니체의 권력의지가 충만한 사람을 존경하고, 그런 삶을 동경한다. 존경과 동경이란 말 속에 내 좌표는 드러난다. 존경과 동경은 내가 속해 있지 않은 영역에서 가능하다. 내 존경과 동경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삶을 꾸리는 것이 내 일생의 과제일지도 모른다.
고병권이 다시 그린 니체는 오만하기만 한 니체가 아니다. 오만한 문체에서 이렇게 향이 퍼지는 문체를 찾아낼 수 있는 건 저자가 갖고 있는 니체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사랑은 숨기려해도 숨길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요즘의 내 촉각은, 나도 모르게 저자가 주제에 관한 글을 쓸때, 애정의 정도를 감지하는 데 곤두서 있다. 죽은 인물, 또는 과거의 유물에서 현재를 발견하고 사랑스럽게 껴안는 능력이 지금 내게 절실히 필요하다. 이런 시점에서 읽은 니체는 그 자체로도 좋지만 저자가 바라본 니체, 그리고 그 충만한 애정지수에 듬뿍 점수를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