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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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지 모르겠다. 텔레비전에서 김훈, 그를 보았다. 예상치 못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한 여성 사진작가와 유럽 여행을 하고 있었다. 베를린이었던 거 같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그는, 쭈뻣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여성작가는 그와 대조적으로 베를린 거리에 아주 잘 어울렸고 흰머리의 그를 그녀는 보호자처럼 이끌었다. 벼룩시장같은 곳에서 그는 연필파는 노점을 발견하자 어색함이 사라지고 얼굴에는 굵게 주름잡힌 얼굴에 미소가 살며시 피어났다. 그리고 또 다른 날인가, 아님 같은 날인가..모르겠지만 유럽의 자전거 소개를 하면서 그의 표정은 자신의 문장처럼 강렬하게 살아났다. 오랜만에 그의 정갈한 문장을 읽으면서 쭈뼛거리던 그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많이 낯설고 조금 재미있었다. 글로는 모든 것을 알아버려서 체념한 것 같았던 그가 낯선 거리에서 어린 아이처럼 약간의 불안과 부적응을 보여준 게 아이러니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김훈이란 작가한테 얻는 위안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는 서사에 결코 능숙하지 않다. 소설이란 장르는 그에게 맞지 않는 장르일지도 모른다. 산문의 연장된 형태가 필요해 그는 소설이란 장르를 빌려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그의 소설을 읽게 되지 않을 뿐더러 소설적 영역의 부실함에 대해 말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진다.  내가 그의 글에서 얻는 위안은, 내가 내 자신만의 언어로 말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충분히 감각으로는 껄끄럽게 느끼는, 그런 공감 때문에 그의 문장들에 신뢰를 보내고 있는 거 같다.

인간은 비루하고 던적스럽다고 압축할 수 있는 말을 324페이지에 걸쳐 펼쳐놓는다. 문장을 읽고 페이지를 넘기면서 입안에 모래가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침을 삼키기 힘들다. 침을 삼켜도 찝찝해서 깨끗한 물로 입안을 헹구고싶었다. 현재성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신문을 펼치고 텔레비전을 켜면 세상은 사건과 사고로 가득하고 내가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사건과 사고로 이루어진 미디어속 세상은, 실제이면서도 비실제같다. 현실을 살아가려면 현실을 타자화하는 게 필요한 요즘이다. 자고 일어나면 울부짖는 사람들이 쏟아지고 그들의 울음과 통곡에 잠시 생각하다 곧 잊어버린다. 울음과 통곡은 주체를 바꿔가면 순환하고 고통과 한의 깊이는 익숙해져서 무뎌진다. 미디어 속 세상과 내 현실과는 이제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문정수가 기사화하지 못한 일들을 노목희에게 쏟아내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노목희가 되어 냅둬라고 말한다.  

글을 쓰는 김훈과 카메라에 비친 김훈이 다르듯이 비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와 비루한 일상을 바라보는 우리는, 서로 다른 것럼 살아간다. 인정하고 싶지않지만 <공무도하>를 읽으면서 인정하고 싶지않은 사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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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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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베스트셀러고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해서 그렇고 그런 소설인 줄 알았다. 1부를 읽는 중에는 내 추측이 틀리지 않잖아, 했는데 2부로 넘어가면서는 이런 편견이 싹 달아났다. 단순한 연애소설 이 아니라 역사 속에 위치한 한 개인의 삶이 집단적 수치와 고통의 참회수단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담겨있는 특별한 소설이다.  

우리가 판단하기에 분명히 그 사람한테 좋은 데 그 사람은 원하지 않는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 사람을 설득해야 하나? 그 사람에게 좋은 게 과연 뭔가? 그 사람이 원하는 게 좋은 거 아닌가? 우리의 관점과 타인의 관점이 틀릴 때, 우리는 선이나 정의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우리의 생각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생각이 관철과 타인의 행복은 사실 관계가 없다. 미하일은 계몽/공공의 선과 개인의 자유의지 사이에 있으면서 그 경계에서 갈등하고 독자에게 고민을 떠넘긴다.    

먼저 열다섯살 미하일과 서른여섯살의 한나의 사랑이다. 두 사람은 공공의 선에서 보면, 한나는 부도덕할 뿐 아니라 파렴치한이다. 미성년과 섹스를 했다. 미성년이 스무살이나 많은 사람을 애인으로 만나면 안되는가. 서로 사랑하는 그들만의 세계에서 그들의 나이는 서로 다른 옷을 입은 거에 불과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옷을 입는 게 당연하지 않는가. 기존의 질서는 미성년의 사랑을 왜 금기시하는가. 미성년은 판단능력이 성숙하지 못했다고, 전통적으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판단력은 꼭 성숙하는가.(명박을 보시라!) 그리고 사랑이 학업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는데 사랑을 하는 어른도 때로는 일을 수행하지 못할 정도로 흔들리고 불안할 수 있다. 미하일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한나가 책을 해석하는 방식에 오히려 영향을 받는다. 누가 두 사람의 사랑을 부도덕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둘째, 나치하에서 호송대원으로 근무했던 한나는 유태인 학살의 주범인가. 그녀는 유태인을 증오했는가. 전쟁 중 아우슈비츠 위성 수용소 호송대로 일했던 한나가 자신이 안 쓴 보고서를 썼다고 시인하고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미하일은 한나가 문맹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생각했고, 판사에게 사실을 알리면 형을 감량받을걸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형량 감량이 한나가 원했던 것인지, 감추려했던 사실을 그가 밝혀 가벼운 처벌을 받는 걸 기뻐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한나를 포함한 호송대원들이 포로들을 호송하는 동안 한 교회에 머무는 동안 화재가 있었고 화재로 단 두 사람이 살아남았다. 호송대원들이 기소당한 이유는 그들을 구하려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거다. 불의 규모는 여자 여섯명이 진압하기에 너무 컸다. 그들은 교회 밖에 있었고 포로들은 잠긴 문 안에 있었다. 피고인들은 어떤 명령도 받지 못했고 뭘 할지 몰랐다. 그들은 유태인 포로들과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포로들을 어떻게 다뤄야하는 지에 관해서라면 가장 멀리 있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살해자지만 사실은 포로들에 대해 어떤 의지도 갖고 있지 않았다.  

작가가 의도하는 게 나치하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을 옹호하려는 건 물론 아니다. 작가는 우리가 익숙한 관점에서 벗어나는 길을 안내한다.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도록 만들어진 이미지를 봐왔다. 그들 뒤에 숨겨진 진짜 원인을 보기보다는 학습되고 만들어진 이미지로 판단하고 우리의 판단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한나가 문맹인 건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문맹이기 때문에 오히려 왜곡된 이미지를 형성할 기회가 적었다. 그녀가 재판을 받는 동안 자신이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을 분리해 내는데 에너지를 쏟았다. 이미 옳고 그른 걸 정해놓고 재판을 보는 다른 사람과 달랐다. 한나는 감옥에서 혼자 글을 배웠다. 원했다면 진작에 배울 수도 있었을텐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않다. 미하일이 확신하지 못하는 세상의 확실함을 배우는 시기를 의도적으로 늦췄는지 모른다. 출소하기 전날, 미하일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순간, 글을 알고 세상에 나와 글로 된 왜곡된 진실을 알기를 거부하기라도 하는 것럼, 한나는 자살했다. 그녀는 죽음으로 자신이 끝까지 동일한 존재로 인식되기를  바랬다.  

겉으로 보기에는 미하일과 한나의 사랑이지만 그 사랑 속에는,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책 읽어주는 남자가 감옥의 한 여죄수와 책으로 소통한 것처럼 우리도 책 읽어주는 남자란 책으로 우리 자신과 소통하는 끈을 만들 수 있다.  

*영문판으로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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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09-11-30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저런 생각을 참 많이 해주는 영화였던것 같아요. 저는 아직 책은 못읽었지만 아마도 이 영화의 모델이 되었을것만 같아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책을 다시 읽고있습니다. 리뷰를 읽다보니 영화와는 관점이 조금 다른듯도 해서 책도 읽고 싶어졌습니다.

넙치 2009-12-01 11:59   좋아요 0 | URL
저는 영화는 아직 못봤습니다. 영화가 어떤 부분에 방점을 두었는지 궁금하면서도 책이 주는 감동과 같은 질량이 아닐테니 꺼려지기도 합니다.^^

반딧불이 2009-12-01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과 영화와의 간극을 저도 많이 경험하지만 이 영화는 사랑을 통한 소년의 성장과 문맹의 한나가 겪는 고뇌가 팽팽하게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어요. 여력이 되시면 보시는것도 유익하실듯 싶어요.

넙치 2009-12-02 13:10   좋아요 0 | URL
언젠가는 볼 생각입니다.^^
 
여행자 - A Brand New Lif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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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로 입양된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다. 미국에서 자란 한국계 감독<나무 없는 산>도 그렇고 그들의 기억은 우울하다. 두 영화 모두 가난이 만들어낸 비극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가오는 지 카메라에 담은 수작들이다. 그런데 이 우울한 그들의 기억이 그들 것만이 아니어서 불편하다.  내가 아직도 살고 있는 나라의 과거는 아직 완전히 과거가 아니다.  

아빠가 여행을 간다는 말에 진이는 신이난다. 예쁜 옷도 사고 불고기도 먹고. 그러나 진이는 혼자 외로운 여행을 한다. 양부모를 만나기 까지 아홉 살 꼬마한테 보육원은 즐거운 여행지가 아니다. 아빠와의 이별을 시작으로 기르던 새도 죽고, 믿도 따랐던 두 살 위 언니도 양부모를 만나 미국으로 가 버린다. 너무 어린 나이에 줄줄이 겪은 이별은, 크든 작든 힘겹다.  

보육원에 왔을 때 아무데도 안 가고 끝까지 아빠를 기다릴 거라는 굳은 결심은 여러 가지 이별 후, 흔들린다. 진이는 수줍고 불안한 눈동자로 프랑스행 비행기를 탄다. 양부모를 만나기 위해서. 정말 새로운 여행의 첫 발을 내딛는다.  

진이가 아빠와 헤어질 때, 보육원 보모와 헤어질 때 멍한 시선으로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거야를 부른다. 이 노래가 이렇게 슬픈 노래였나.  

당신은 모르실 거야 얼마나 사랑했는지

세월이 흘러가면은 그 때서 뉘우칠 거야

  

마음이 서러울 때나 초라해 보일 때에는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서 있을게요

두 눈에 넘쳐 흐르는 뜨거운 나의 눈물로

당신의 아픈 마음을 깨끗이 씻어드릴게

당신은 모르실 거야 얼마나 사랑했는지

뒤돌아 봐주세요 당신의 사랑은 나요
 

두 눈에 넘쳐 흐르는 뜨거운 나의 눈물로

당신의 아픈 마음을 깨끗이 씻어드릴게

당신은 모르실 거야 얼마나 사랑했는지

뒤돌아 봐주세요 당신의 사랑은 나요

당신의 사랑은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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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코브 : 슬픈 돌고래의 진실 - The Cov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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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누리고 많은 걸 소유하는 데도 왜 더 탐욕스러워지기만 하는가? 타자에 대한 배려란 말을 외치면서도 왜 배려하지 않는가? 이 영화를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탐욕을 덜려고 하지 않는 한 모순은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이 영화는 바다보호협회에서 돌고래 산업의 숨겨진 진실을 밝혀 돌고래를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동참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든다.  

타이지란 일본 마을은 돌고래 수족관이 있고 전세계 수족관에 살아있는 돌고래와 돌고래 고기를 공급하는 곳이다. 일년에 2만3천마리의 돌고래가 포획된다고 하니 돌고래 수요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럼 돌고래는 왜 인기가 있게 되었나. 물론 미디어의 힘이다. 60년대<플리퍼>라는 미국 인기드라마 때문이다. (96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돌고래와 인간의 우정을 다룬 드라마로 사람들은 돌고래를 친숙하게 여기고 돌고래를 좋아하게 되었다. 비극은 시작된다. 사람들은 환상을 현실에서 체함하기 위해 돌고래 쇼를 관람한다. 전세계에 있는 많은 수족관들이 돌고래가 가져다주는 수익성을 놓칠 리 없다. 돌고래가 필요한 수는 급증했고 사람들은 기꺼이 환상을 현실화하는 데 돈을 지불했고 지금도 기꺼이 지불한다.   

세계 최초의 돌고래 조련사(플리퍼에 출연한)는 10년 간 인기를 누렸고 매년 새 포르쉐를 샀다. 다행히도 그는 돌고래의 고통을 알아차렸다. 돌고래는 지능만 높은 게 아니다. 한 때 조련사였던 그가 말하는 돌고래의 정서적 면은 인간과 같다. 돌고래가 하루에 65km를 이동하는 활동적 동물인데 밀폐된 수족관 갇히는 것 만으로도 스트레스인데 수족관 정화펌프의 초음파가 청각이 예민한 돌고래한테는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극도의 스트레스다. 심지어 돌고래는 자살도 할 수 있단다! 그는 돌고래의 죽음을 보고 돌고래 놓아주기 운동을 30년 째 하고 있다. 물론 불법이다. 체포당하고 풀려나고를 반복하는 삶을 살고 있다. 자신이 젊은 날 한 일에 대한 반성으로 돌고래 해방을 위해 살고 있다.  그의 노력이 헛되지만은 않지만 희망적이지도 않다. 그가 풀어줄 수 있는 고래의 수는 세발의 피니까.

왜 일본은 돌고래 산업을 이어가고 있는가. 첫째, 수익성이고 둘째는 민족주의다. 일본은 돌고래 뿐 아니라 포경산업 대국인데 포경산업에 많은 세금을 지원한다고 한다. 서구국가들이 이래라저래하 하는 데 대한 일종의 보이코트다. 제국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집단 이기심이다.  

크래딧이 올라가면서 www.takepart.com/thecove에 참여하라는 자막이 뜬다. 영화를 보고 무언가 행동을 한다는 건 고무적이고 바람직하다. 그러나 인터넷 사이트에서 지원의 글을 남기고 후원금을 내는 것 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우리 모두 돌고래 쇼를 보러가지 않는 거다. 돌고래 쇼 수입이 감소하면 수족관은 돌고래 쇼를 취소할 것이고 수족관은 당연히 고래를 타이지에서 돌고래를 사지 않을 것이다. 타이지 어부들은 돌고래 학살을 해 봤자 골치아픈 시체만 될 뿐이니 흥이 나지않으니 그만 둘 것이다. 우리의 실질적 작은 실천만이 돌고래 학살의 연쇄고리를 붕괴할 수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피로 물든 타이지 만을 보고 분노를 느끼지만 돌고래 쇼를 보는 쾌락은 포기할 수 없다. 탐욕은 탐욕이고 분노는 분노다.  이 영화를 보고 더 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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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개 2009-11-09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보고 왔는데요, 돌고래 쇼를 안볼수 있죠. 뭐 그걸 포기 못할건 없죠. 안보면 죽는 것도 아니고. 사실..본 적도 없습니다만.ㅋ 이건 그냥 하는 말이구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해 봤습니다. 울산에 고래생태체험관인가 만들어서 며칠전에 바로 그 타이지에서 고래를 사왔더군요. 고래의 수입경로 등에 대해 정보공개 청구라도 할 생각입니다. 항의서한도 보내야겠죠.

넙치 2009-11-10 12:57   좋아요 0 | URL
저는 항의서한보다도 고래의 수입경로를 일반인이 알고 우리가 고래생태체험관을 이용하지 않는 게 더 빠른 해결책이라고 여깁니다. 찾는 이 없는 체험관이 살아남을 이유가 없겠죠...
 
파주 - Paju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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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핵심어는 '오해'다. 오해의 본질은 파주의 이미지처럼 안개와 비가 가져다주는 모호하고도 축축한 분위기다. 오해, 질투, 거짓말은 사랑을 풍부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상대의 마음을 알려고 안달하고 조바심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언니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과 거짓 속에 들어있는 사랑의 모습을 말한다. 은모와 중식, 공식적으로 처제와 형부라는 시선, 그리고 여자와 남자라는 시선이 공존한다.

 

1. 은모의 시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언니와 단둘이 살아가던 중에 은모 언니는 결혼을 한다. 언니는 형부때문에 울기도 하고 웃기도한다. 어린 은모의 눈에는, 형부는 사랑하는 언니를 괴롭히는 침입자다. 오해는 비극적 결말을 만들기 쉽다. 언니를 구출할 작전을 세우지만 실패하고, 오해의 댓가로 언니를 잃는다.  언니가 없는 자리에서 형부는 더 이상 침입자가 아니다. 형부에 대한 묘한 감정이 자라기 시작할 즈음, 형부의 첫사랑이라는 침입자가 다시 등장한다.

 

2. 중식의 시선

대학시절 운동권이었던 중식은 선배의 아내를 사랑했고, 깊은 상흔을 남긴다. 윤리의식에 배반하는 행동과 죄값을 치루는 식의 행동. 그러나 결심과 행동은 동시에 수반되는 게 아니다. 커피를 줄여야겠다고 결심하고도 변함없이 커피를 마셔댈 수 있다. 행동은, 어떤 때는 의식이나 결심보다도 강력하다. 중식은 도의적 행동을 자발적으로 떠맡지만 그의 의식은, 행동을 따르지 않는다. 비극은 그를 따라다닐 수 밖에 없다.

 

3. 은모-중식의 시선

은모에 대한 중식의 사랑은 고통스럽다. 은모 역시 중식의 사랑을 알든 모르든 고통스럽다. 은모는 여행자다. 마을 사람들의 말대로 집을 밥 먹듯이 나간다. 은모는 왜 집을 나가는가. 사랑의 대상은 끊임없이 떠나며 여행상태에 있다고 바르트는 말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의 천직은 칩거자고 꼼짝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일이다. "항상 현존하는 나는 끊임없이 부재하는 너 앞에서만 성립되기" 때문이다. 중식은 은모의 결백을 완성시키고 이상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중식의 숙명이다.

 

극이 전개되는 전체 배경은 재개발을 막는 주민들과 개발을 진행하려는 일당 간에 벌이는 혼란스런 투쟁이다. 짙은 안개와 어두운 조명, 축축한 비는 혼란을 가속한다. 개발이라는 대상을 두고 주민과 개발자의 화살표가 다를 때 빚어지는 대립과 갈등 팽팽하다. 결국 누군가가 항복할 때까지. 사랑하는 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의 화살표가 다른 곳을 향해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질투는 나의 힘>과 같은 감독 작품이라고 생각못할 정도다. 많은 걸 담으려고 했지만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짙은 안개처럼 영화는 뿌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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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2009-11-26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article_id=58690&mm=100000006 정한석이 쓴 글. <파주>에 내가 별을 셋만 준 이유..다 좋게 평하는 영화인데 나는 왜 이영화가 허전한지 실체를 잘 몰랐다. 정한석의 글을 읽고 유레카를 외쳤다.

yamoo 2010-03-21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실패했다고 봅니다. 감독이 생각한 것을 영화에 담질 못했습니다...은모는 박제화되었다고 봅니다..안타까운 영화지만 그래도 나름의 점수를 주고 싶은 영화입니다~

넙치 2010-03-21 23:46   좋아요 0 | URL
형편없는 영화는 아니지만 확실히 밀도가 떨어지는 허전한 영화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