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오리 바람 - Eigh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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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열여덟살 겨울방학, 난 뭘 했던가. 집과 독서실을 오갔고 김기덕의 두시의 데이트에서 방학특집으로 했던 빌보드 차트 100위를 녹음하는 데 열을 올렸다. 주말이면 극장에 갔고 주말의 명화를 보고 노트에 감독이름을 꼬박꼬박 적어놓았다. 한달에 한 번은 <스크린>지를 탐독했다. 뭘할지 몰랐고 주어진 코 앞의 과제를 당연히 받아들이며 입시생으로 비교적 착실히 살았다. 스트레스로 병원을 들락거리기도 했지만 즐거웠던 기억은 거의 없다. 나중에 영화감독이 되겠다던 친구(지금은 한 아이의 엄마가 됐다)랑 극장에 오가면서 영화 속 세계에 대해 허무맹랑하게 재잘거렸던 기억만이 미소를 짓게 한다. 가끔씩 까닭없이 찾아오는 목졸림 현상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모두가 그러려니 했다.  

2. 

이 영화는 열여덟살 한 남학생의 겨울방학 이야기다. 공부는 물론 학교 자체에 흥미가 별로 없는고 여자친구랑 일주일동안 바다를 보러갔다온다. 십대에게 일주일간의 여행은, 어른한테는 가출이다. 집안은 발칵 뒤집어지고 두 십대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사랑이다. 이 영화가 십대의 사랑이야기는 아니다. 공부에 흥미없는 남학생이 흥미를 갖게 된 대상이 미정이란 여자친구일 뿐이다.  

주인공들이 십대라는 물리적 한계를 제한하지만 이 영화는 십대의 성장영화라기 보다는 뭘 해야할지 모르는 막연함, 세상이 모두 내 편이 아닌 거 같을 때의 황망함과 적막함 때문에 어른 영화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끝 없이 펼쳐진 고요한 지평선 속에 남학생이 걸어들어가 한 가운데 서 있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두 고등학생이 키스를 하는 장면이나 상반신을 노출하는 장면이(꿈처럼 처리되기는 하지만) 꼭 필요해보이지 않는다. 이 장면은 완전 전체 영화흐름을 잡치게 했다. 십대의 질풍을 잔잔함 속에서 처리했으면 내 취향의 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대사대신 인물의 사소한 행동을 배치하는 방식은 아주 좋지만 전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아이의 시선보다는 어른의 시선의 느낌이 강하다.   

3.  

이십대 초반에 삼십세인 학과조교 선배를 보면서 나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삼심세만 되면 뭐든 정확한 길이 당연히 있을 거고 뿌연 안개같은 길은 이십대에 안녕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철이 없었다. 삽십대를 마감했어도 여전히 안개는 걷히지 않고 앞으로 가고 있다기 보다는 한 자리를 맴돌고 있는 거 같다. 부모님의 간섭이 사라진 걸 빼고는 십대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여전함을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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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 - Milk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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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개봉이 안 돼서 파일을 다운받았지만 자막이 없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전작들을 볼 때 대사의 양이 적어서 걱정도 안 했는데 전작들과 다르게 대사가 아주 많고 게다가 숀 팬의 웅얼거리는 말투는 청취 불가로 좌절감을 맛보게 했다. 영화가 개봉하거나 dvd를 입수할 날을 기대했다. 당장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은 크게 마련이어서 <밀크>에 대한 기대도 컸다. 이번에는 구스 반 산트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카메라를 사용했을까. 

구스 반 산트의 영화라면 무조건 봐야한다는 편이다. 그의 장기는 내러티브의 정교함이나 스릴이 아니라 한 에피소드에 대한 심리 묘사다. 이러쿵 저러쿵 늘어놓기보다는 흔들리는 카메라로 인물이 걸어가는 길이나 벽을 감성적 음악과 배치해서 에피소드 속 인물이 어떻게 느꼈을지 가상의 체험 세계로 끌어들인다.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 <파라노이드 파크>, <밀크>에 이르기까지 공통분모는 죽음이다. 각각 다른 사건을 통해 인물들이 죽음과 마주하고  죽음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상황에서 인물들이 겪는 무심, 공포, 좌절을 선명하게 묘사한다. 일반적 기준에서 악이나 범죄인 행동이 겪는 이의 입장에서는 더 큰 공포와 공허에서 출발하는데, 이래도 비난할 수 있겠니, 라고 말 하는 거 같다.

<밀크>는 70년대 게이 인권운동가였던 하비 밀크의 전기다. 평범한 영화는 아니지만 감독의 전작들이 너무 좋아서 좀 아쉬운 영화다. 성적 소수자에 대해 차별을 행사하는 제도권과 맞서 싸우는 내용들이다. 기록필름을 삽입해서 당시의 분위기의 치열함을 재연한다. 

영화를 함께 본 후배한테, 하비 밀크처럼 사명감을 갖고 불의에 맞서는 건 성격이 많이 좌우할 거 같다고 했다. 후배 왈, 불의라기 보다는 견뎌야할 상황으로 판단하고 힘들지만 받아들이는 쪽이라고 했다. 투쟁의 시작은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했다. 같은 현실도 각자 다르게 인식하고 투쟁방법도 다르다. 하비 밀크는 격렬하게 투쟁하다 숨을 거두었고 또 누군가는 눈에 띄지 않게 투쟁하면서 숨을 거두고 있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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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의 시선>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메두사의 시선 - 예견하는 신화, 질주하는 과학, 성찰하는 철학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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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과학, 예술은 계몽주의 이전에는 원래 한 몸이었다. 예술과 과학은 모두 인간 활동의 산물이고 예술과 과학에 대한 성찰은 필요하니 철학은 필수였다. 요즘은 과학어와 예술어 철학어가 분리돼서 서로를 이질감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고 한계에 부딪친다.  

따라서 이 책 구성의 시도는 크로스 스터디. 아주 흥미롭고 바람직하다. 신화를 준거 틀로 삼아 과학, 예술, 철학을 논하려고 한다. 그런데 요즘 과학과 예술과 철학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았다. 일반인이 보기에 이 책은 너무 생략이 많아 내용이 쉽게 전달되지 않고 전문가가 보기에는 난삽하고 논지도 없고 일관성도 없는 에세이로 보인다.  

게다가 신화라는 게 까다롭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서 익숙하면서도 파고들면 무궁무진한 이면을 담고 있다. 신화가 여러 장르의 분석의 틀로 종종 사용되는 이유도 해석의 여지가 많기 때문인데 그만큼 신화는 복잡한 텍스트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데에 다시 복잡한 과학과 철학을 끼워 넣었다. 독서를 하는데 여정을 마치기 위해 오딧세우스한테 필요한 인내와 의지를 요구한다. 이 인내와 의지가 즐거운 게 아니라 계속 미궁을 헤매서 지치게 한다.  

이 책의 최대 문제는 독자층을 정확히 설정하는 데 실패한 데 있다. 에세이란 트를 택한 건 전공자보다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했을 거다. 그렇다면 저자의 필력이나 지식을 뽐내기 보다는 저자의 필력이나 지식이 조금 감춰질지라도 문장과 문장 사이가 친절해야 했는데, 아쉽다. 많이 아는 것과 잘 전달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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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동문선 현대신서 102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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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 너무나 익숙하지만 바흐 전문 피아니스트로 고작 알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의 삶과 음악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된다. 그는 연주가의 일생을 추구한 게 아니라 음악을 텍스트로 삼는 철학가로서 살고자 했던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과학적이지도 못하고 실체를 지니지도 못한, 우리가 음악이라 부르는 이것이 왜 우리를 감동시키고 그처럼 깊은 영향을 미치는지를." 

토론토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때 했던 강연의 일부이다. 음악의 실체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가 그의 일생과 연주를 지배한다. 악보-연주자/피아노-손 이란 관계를 도식화하고 각 관계를 탐색한다. 손은 연주자의 일부이지만 연주를 하는 순간 손과 연주자는 별개로 각기 다른 역할을 한다. 그가 연주하는 장면을 유투브에서 찾아봤다. 그의 왼손은 오른손의 지배를 벗어나 건반 위에서 춤을 춘다. 건반 위에 있지 않을 때도 왼손은 혼자 공연을 하고 있는 중이다. 악보에 대한 해석은 연주자의 머리를 필요로 하지만 건반을 두드리는 손은 더 이상 연주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관계.  

그의 청명한 연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게 도와준 건 저자 미셀 슈나이더다. 전기문이지만 에세이 자체로도 탁월하다. 글렌 굴드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한테도 애정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미문들로 가득하다. 미셀 슈나이더가 본 굴드의 모습은 이랬다.

" 굴드는 악기의 고독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어했다. 헐벗은 연주. 악기가 미혹시킨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장식적인 기능을 삭제하게 된다. (....) 그는 음악의 몸이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를 원했다. 우리의 몸이 인위적인 장식을 박탈당한 채 벌거숭이가 되어, 살덩이의 치욕 속 버려져 죽음으로 가듯이." (102)

굴드는 세상과의 단절을 필요로 했지만 그의 재능은 그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는 예정된 고통 속에서 살았고 그의 고통이 만들어낸 연주를 우리는 즐겼다. 그리고 저자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문장으로 또 한번 굴드가 느꼈을 고통을 음미하는 잔인한 독서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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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속의 세상, 세상속의 교회>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 법학자 김두식이 바라본 교회 속 세상 풍경
김두식 지음 / 홍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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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교인이 아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는 아니다. 예수님이나 하나님, 부처님을 믿는다는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구체적 행위를 안 하지만 만물을 지배하는 신은 존재를 믿는 편이다. 특정 종교에 소속되 있지 않아서 신의 이름도 없고 교리도 없다. 하지만 인간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일과 신의 자기장 아래서 할 수 있는 일은 다르다고 믿는다. 나는 왜 신을 믿으면서 예수나 부처에 대한 '헌신'을 기꺼워하지 않는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내 마음을 적극적으로 증명하는 게 귀찮기도 하고 그 보다는 교리에 맞춰 일상을 재단할 신심이라고 부를만한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영화관 교회"라는 말을 사용한다. 목사의 성경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관객같은 태도를 지닌 신도들이 있는 교회를 지칭한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일방적 설교를 감상하고 목사의 설교와 지침을 따르는 신도들만이 이상적이라는 말이다. 이런 주입식 해석은 비종교인이 봤을 때, 굉장한 거부감이 든다. 마음 속으로 인간의 영역 밖을 인정한다해도 그걸 표현할 단련된 매끄러운 말을 안 갖고 있을 뿐인데 교인들은 설교와 성경공부로 다져진 기름진 언어로 교회 밖 사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모른다고 해서 사탄은 아닌데 사탄의 기운을 받은 사람 취급 받기 쉽고, 그로 인해 교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쌓기 쉽다. 비종교인이 인정하는 신은 사탄의 신이라고 단정해버리는데 말을 이어가고 싶은 의지를 싹둑 잘라버리는 거다.

사실 교회가 교리 해석에 대한 자유를 준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을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절대자에 대한 존경심을 성경에 적힌 문구에 따라 보여야하고 성경 해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하는 게 실천은 아니지 않는가. 가족과 친구에게 양보하고 진심으로 아끼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인다면 교회가 말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중일텐데 교인들은 교회 밖에 있는 걸 커다란 행복을 놓치고 있다면 안타까워한다. 저자의 말대로 교회는 세상 속에 있는 한 공동체일 뿐이데 말이다.

이 책의 챕터 중 4,5,6 장은 기독교 역사에 관한 간략한 개괄이다. 이 챕터들을 읽으면서 기독교의 본질이 뭘까, 떠올렸다. 역사 속에서도 교회는 늘 권력과 공조체제였다. 왕들은 국익이나 사익에 따라 신을, 교리를 바꾸길 주저하지 않았다. 좋게 보면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지만 나쁘게 보면, 인간이 속한 사회가 신을 우선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 혹은 기독교가 속 좁아보이는 건 기독교의 뿌리인지도 모른다. 한국교회에 관한 담론이 있어왔지만 교회 체제는 점점 더 편협한 공동체가 돼고 있다. 견고하고 높은 담을 쌓고 담 밖의 사람들을 배척하면서도 담장 안으로 안 들어온다고 손가락질하는 모순된 공동체. 교인이 아닌 사람한테 이런 이미지를 주는 교회는 분노나 훈계보다는 담장을 허무는 자세가 마땅하다. 한국교회의 권위적 태도는 이런 일이 당분간은 어렵다는 걸 예측할 수게 한다.

김두식 씨가 썼듯이 교회가 의식과 겉치레를 벗어버리고 인간 사이에 나눌 수 있는 공감과 사랑을 강조한다면 교회 속에 세상이 들어가는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더불어 김두식 씨같은 사람들이 있는 교회라면 내 발로 찾아가게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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