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개봉이 안 돼서 파일을 다운받았지만 자막이 없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전작들을 볼 때 대사의 양이 적어서 걱정도 안 했는데 전작들과 다르게 대사가 아주 많고 게다가 숀 팬의 웅얼거리는 말투는 청취 불가로 좌절감을 맛보게 했다. 영화가 개봉하거나 dvd를 입수할 날을 기대했다. 당장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은 크게 마련이어서 <밀크>에 대한 기대도 컸다. 이번에는 구스 반 산트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카메라를 사용했을까.
구스 반 산트의 영화라면 무조건 봐야한다는 편이다. 그의 장기는 내러티브의 정교함이나 스릴이 아니라 한 에피소드에 대한 심리 묘사다. 이러쿵 저러쿵 늘어놓기보다는 흔들리는 카메라로 인물이 걸어가는 길이나 벽을 감성적 음악과 배치해서 에피소드 속 인물이 어떻게 느꼈을지 가상의 체험 세계로 끌어들인다.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 <파라노이드 파크>, <밀크>에 이르기까지 공통분모는 죽음이다. 각각 다른 사건을 통해 인물들이 죽음과 마주하고 죽음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상황에서 인물들이 겪는 무심, 공포, 좌절을 선명하게 묘사한다. 일반적 기준에서 악이나 범죄인 행동이 겪는 이의 입장에서는 더 큰 공포와 공허에서 출발하는데, 이래도 비난할 수 있겠니, 라고 말 하는 거 같다.
<밀크>는 70년대 게이 인권운동가였던 하비 밀크의 전기다. 평범한 영화는 아니지만 감독의 전작들이 너무 좋아서 좀 아쉬운 영화다. 성적 소수자에 대해 차별을 행사하는 제도권과 맞서 싸우는 내용들이다. 기록필름을 삽입해서 당시의 분위기의 치열함을 재연한다.
영화를 함께 본 후배한테, 하비 밀크처럼 사명감을 갖고 불의에 맞서는 건 성격이 많이 좌우할 거 같다고 했다. 후배 왈, 불의라기 보다는 견뎌야할 상황으로 판단하고 힘들지만 받아들이는 쪽이라고 했다. 투쟁의 시작은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했다. 같은 현실도 각자 다르게 인식하고 투쟁방법도 다르다. 하비 밀크는 격렬하게 투쟁하다 숨을 거두었고 또 누군가는 눈에 띄지 않게 투쟁하면서 숨을 거두고 있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