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드 디텍티브 - 할인행사
안지걸 외, 두기봉 외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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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U’에서 시작해야 한다. 두기봉은 총을 잃은 경찰과 그를 도우려는 동려들을 따라가며 홍콩의 밤의 세계를 훑는다. 홍콩의 저변에 깔려, 밤의 질서를 내세우는 이들의 세계를 (수사권이 있는) 경찰의 추적으로, 그 실체를 들어냈다. 홍콩의 밤의 질서를 내세우는 이들은 훑어졌다가 영화의 말미 한 곳에 모이자 파국을 맞는다. 은밀히 이어졌던 질서의 충돌은 당연한 듯 파멸하는 것이다.




  두기봉은 위가휘와 손을 잡고 다시 한번 홍콩을 수사한다. 이번에는 타인의 인격을 볼 수 있는 ‘번형사’(유청운)과 함께 총을 잃은 체 실종된 형사를 추적한다. 타인의 인격을 보는 번형사의 홍콩은 온갖 범죄의 소굴이다. 그 홍콩을 어둠을 잔뜩 드리운 체, 사물에 희미하게 조명은 형식적이라기보다 리얼함 그 자체로 여겨질 정도다. 편집증에 걸린 듯 자신의 집의 온갖 곳을 메운 사건 스크랩에서 볼 수 있듯 흉악범죄가 쏟아진다. 여기서 번형사가 귀신을 보는 것이 아닌 인격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다중인격의 온상지인 것 같은 그 도시는 그 분열된 자아가 하나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 질서에 반하여 진실을 보는 것만으로 번형사는 광인의 자리로 추방당한다. 번형사의 전부인의 말대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격들을 인정하지 못하는’ 잘못인양, 번형사는 사회에서 추방당한다.




  신경질적이게 증폭된 영화의 사운드와 번을 따라 편집증인 듯 같은 루트를 맴도는 진행은 그 자체로 광기와 같은 긴장감을 품고, 다소 거부감이 들 수 있는 분열된 자아와의 공존을 이루어 낸다. 번형사는 그 광기를 품은 도시를 맹렬히 들쑤시고 다니는 가운데, 번은 분열 전의 온전한 자아, 과거가 되어 버린 양심의 인격들과 조우한다. 번의 전부인은 자신의 양심의 인격를 선택한 번을 책망하고 스스로 그 인격을 유령화 시킨다. 치와이의 양심의 인격 또한 모든 것이 엉켜버린 그곳에 유령처럼 버려진다. 그 과거가 되어버린 양심의 인격들이 증명하듯 홍콩의 분열은 ‘변화’로 촉발된 것이다. 그렇게 양심의 자아와 맞닥뜨리며 진실을 추적하는 번의 뒤를 진실을 열망하는 호형사가 따른다.




  호형사는 풀리지 않는 사건을 풀기 위해 ‘진실’을 보는 번형사를 택하고 그를 따른다. 그의 기괴한 행동이 진실을 보기 위한 행동이라 여기며, 호형사는 애써 번형사를 따라하며 희미하게 진실의 근방을 맴돌게 된다. 그의 궤적이 진실에 다가갈수록 홍콩이 품고 있는 폭력성에 더욱 다가가게 된다. 그 궤적이 핵심에 가까워질수록 질서를 내세우며 다중인격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다중인격자들에게 추방당하여 번과 같은 미치광이가 될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수없이 조우하게 된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호형사의 행적에서 우리는 번형사의 전부인의 ‘신체’를 만날 수 있다. 그녀의 첫 등장에 우리는 호형사가 번형사의 능력을 이어받은 것이라 착각하게 된다. 그것을 분기로 영화는 별다른 장치를 내세우지 않지만 관객은 분열된 인격과 실체를 구분할 수 없는, ‘매드 디텍티브’가 내세우는 혼돈 속에 던져지게 된다. 그때부터 호형사가 맞이하는 모든 질문은 관객에게도 부여되고, 호형사와 같이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 혼돈에서 허우적되던 호형사는 홍콩의 저변에 자리 잡고 도시를 지탱하는 폭력에 짖눌려, 인격의 분열을 선택하고 진실을 회피한 체 숨어 자신을 방어한다.




  호형사가 분열되었음을 알게된 번형사는 적극적으로 혼자 진실을 향해 돌진한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실체인지, 번이 미친것은 아닌지 등의 수많은 물음의 어느것에도 명확한 답을 내세울 수 없어 극중인물과 함께 혼돈을 맞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비정하고 황량한 도시를 오롯이 체험하며 파국의 현장으로 던져진다.




  인도인을 찾아들어선 호, 치와이, 번은 그곳에서 분열된 자아들과 진실을 촉구하는 목소리, 진실의 증거들이 뒤섞인 체 광기어린 한번의 충격전을 벌이고 대치상황을 맞는다. 그 대치 상황을 부감으로 잡아낸 숏에서, 부서져 널려있던 거울에 분열된 자아들이 들어난다. 분열된 자아들의 위에 껍데기로 돌아다니는 신체들과의 위태로운 대치를 잡아낸 이 숏은 ‘매드 디텍티브’의 세계를 압축하여 담아낸다. 총을 서로에게 겨누고 (다시)한 곳에 모인 인물들은 진실과 맞닥뜨린다. 중경삼림에서 보여 졌던 (아직도!) 골칫거리인 인도인은 도시의 분노의 대상이 되지만, 그 분노는 내부에서, 그것도 공권력에서 자신의 잘못을 기리기 위한 희생양이였음을 들어낸다. 인물들을 이곳으로 이끈 총 또한 내부의 조직임을 들어났고, 그럼으로 모든 매듭이 내부에서 조여졌음이 들어난다. 총구는 진실을 보라는 자들과 질서를 지키려는 자들을 압박하며 선택을 촉구한다.




  결국 질서 유지를 선택한 이들에게서 터져 나온 총알은 인물들을 파국으로 이끈다. 모든 것은 어둠 뒤로 물러나고 질서를 선택한 호형사는 살아남게 된다. 그가 치와이가 걸은 길을 선택한 듯 냉소를 품은 자아가 호형사에게 다가온다. 영화의 마지막 부감 숏으로 알리바이를 꾸미기 위해, 인물들의 총을 옮기는 호형사의 모습이 보인다. 총의 지목, 동선, 총격전의 시작점을 조작하며, 내부에서 짖는 매듭을 다시 반복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번형사가 미친 것인지, 진실을 보는 것인지 명확히 들어 나지 않는다. 두기봉과 위가휘는 수많은 단서들과 질문을 남긴다. 이 도시를, 이 세계를 어찌 판단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남겨둔다. 그 파국의 장에서 번형사는 ‘나도 인간인데’란 말을 남기며 치와이를 죽인다. 번형사가 말한 인간은 양심의 자아들을 보고 함께하며, 갑자기 내리는 소낙비의 의미를 생각하며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 아닌, 번형사의 전부인이 번형사에게 분열된 인격의 인정을 촉구하며 ‘모든 인간은 그래’라고 외친 그 ‘인간’일 것이다. 결국 번형사는 양심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전부인의 ‘인간’에 굴복하고 파멸을 맞는다. 난 번형사가 본 것들이 진실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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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SE - (다큐멘터리 '동' 수록)
지아 장커 감독, 자오타오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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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워낙 많은 예술에 빚을 지고 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면 유치하긴 하지만 굳이 하자면 '영화가 소설보다 훌륭한 점은 정보의 함축성이다'. 흔한 이미지로 설명하자면 해질녘의 느낌을 글로 구구절절 떠드는 것보다 짧은 영상으로 보이는게 훨씬 효과적이지 않나 생각한다. 즉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이 소리다.

  난 이 장점을 가장 영화답다고 생각하는데 이 장점을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활용한게 네오리얼리즘이지 않나 생각해본다. 이 가장 영화다운 장점을 거리로 들고나가 시대의 공기마져 포착할 수 있음을 위대한 발견을 하지 않았는가... 네오리얼리즘 작가들을 제외하고 이 장점을 가장 잘 활용한 작가 중 하나가 지아장커이다.

  still life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선, 지아장커의 말. '난 앞으로 디지털로 영화를 찍을 생각이다. 지금 중국의 급격한 변화를 가장 잘 포착할 수 있는 것이 디지털이기 때문이다'. 그가 디지털을 선택한건 당연 기동성 때문일 것이다. 지아장커의 말 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현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또 반응하려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난 이 말만으로도 한상밍이나 셴홍에 주목하는 것 보단 그들의 뒤에 펼쳐진 '샨샤'를 주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서져가고 사라져가고 물에 잠겨 사라져가는 '샨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출연하는 어느 누구도 아닌 그들이 서있는 땅. '샨샤'다.

  공산주의가 사실상 몰락하고 중국에도 자본주의의 물결이 들이닥치며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엄청나 '지아장커'가 필히 디지털을 택하게 했고, 몇 천년 역사를 지닌 '샨샤'가 2년 만에 물에 잠겨 사라져가고 있게 되었다. 한산밍이 영화 초반 보는 유로화를 중국돈으로 바꾸는 마술을 보는 듯한 마술같은 상황. 그래서 그 누구도 갑자기 나타나는 ufo나 이상한 건출물이 로켓이 되어 날아가는 것을 놀라워하지 않는다. 몇 천년 역사가 2년만에 사라졌는데 그 이상 놀랄 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영화에서 소제목으로 등장하는 '술,담배,차, 사탕'. 이에 대한 지아장커의 말. '중국인은 술,담배,차,사탕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인물들이 끊임없이 피거나 마시거나 먹거나 혹은 그들의 중심에 놓여 우리의 시선을 잡는 이것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과연 행복한가?'. 부서져가는 '샨샤'에서 사라져가는 '샨샤'에서 당신들은 '과연 행복한가?'. 지아장커의 대답은 긍정적이지 않다. '샨샤'를 부수고 있는 주범인 자본은 한샨밍과 셴홍의 사람들을 빼앗아 간다. 한산밍의 친구 (자본주의체제 홍콩에 열광하는)마크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셴홍의 (돈때문에 아내를 버린)남편은 사람으로써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마져 상실하게 된다. 또 지아장커의 카메라는 '샨샤'를 펼칠때 온건한 건물들에서 사라진 땅으로 혹은 사라진 땅에서 온전한 건물로 시선을 옴긴다. 부서짐만이 남았을 뿐이다.'당신들은 과연 행복한가?'

  지아장커는 공산주의의 자리를 자본이란 괴물에 빼앗겨 괴로워 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이란 홍수가 '샨샤'를 앗아가 듯 인간의 존엄성과 문화를 앗아가는 현실을 괴로워하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샨샤'와 사라져가는 '인간들'. 초중반부 인물과 배경의 색의 확연한 대비로 분리되어 보이지만 후반부로 향할수록 인간들은 '샨샤'의 색에 물들어 '샨샤'와 하나가 되어간다. 곧 휩쓸릴 인간들에 대한 서글픔.

  영화의 마지막 폐허와 폐허 사이에 연결된 (시간의) 줄위에서 누군가 아슬아슬하게 건넌다. 그리고 그가 건너편에 다다르기 전 한산밍은 떠나고 영화는 끝난다. 한산밍은 그리고 우리는 그의 도착을 볼 수 없다. 그 줄위의 모습만이 우리에게 남겨진다. 우리는 질문해야 된다. '저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가 아닌 '어떻게 될 것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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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기타무라 류헤이 감독 / 소니픽쳐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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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이유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느 여름 가족은 어딘가로 여행을 갔고 혼자 집에 덩그러니 남아있던 적이 있다. 어린 나이에 혼자 밤을 보내게 되었다는 흥분에 사로잡혀 한참 신났지만 그 흥분은 다음날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텅 빈 집에 혼자 남게 된 나는 브라운관을 통해 <캔디맨>과 조우하게 되었다. 19세 미만 제한이란 표시가 붙어 있었지만 집에 덩그러니 남아있던 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지킬 여력이 없었다. 영화를 복기하는 능력이 좋지 않은 편이지만, 또 본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캔디맨>의 장면들은 아직까지도 선명하다. 그만큼 충격이었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음침하고 폭력적인 기운이 가득한 할렘가에서 가냘픈 백인 여성이 흑인 거구에게 사로잡히는 그 과정들은 집에 혼자남아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절망적이었다. 캔디맨을 세 번 읊조리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갈고리를 힘껏 쥔 체 등장하는 캔디맨은 공포란 단어 따위로 단정지울 수 없었다. 창문을 깨 부서고 날아들어 왔을 때, 입에서 벌들을 쏟아낼 때, 헬렌이 캔디맨의 뒤를 잇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선명하다. 항상 아메리카 드림했던 상상 속 미국은 그 날 밤 이후 사방팔방 출몰하는 캔디맨으로 인해 아메리카 나이트메어, 그 자체가 되었다. 지금 다시보면 그때의 공포가 그대로인지는 모르겠다. 암튼 캔디를 먹는 것을 한동안 멀리하게끔 만들었던 <캔디맨>의 중심에 클라이브 바커가 있다.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 또한 클라이브 바커의 영향이 크다. 기타무라 류헤이가 감독에 당당히 이름을 새겨 놓고 있지만 도시의 음침한 폭력성, 늘러 붙는 피의 질감, 부패한 시체의 역한 느낌을 코끝에 살려내는 피칠갑의 문체가 가득한 그의 책에서 볼 수 있듯 영화의 세계관은 오롯이 클라이브 바커의 것이다. 그리고 기타무라 류헤이나 클라이브 바커 또한 온갖 인터뷰에서 공공연히 그 사실을 밝히고 있고 인정하고 있다. 원작과 영화는 이야기의 큰 골자는 같다. 단지 레온의 직업만이 의미 있게 바뀌어 있다. 도시를 촬영하는 사진작가 레온은 범상치 않은 외모를 지닌 마호가니를 발견하고 추격한다. 그 추격의 과정에서 지하철 안에서의 마호가니의 범행을 목격하고 범행현장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추격하는 과정에서 친구와 연인을 잃고 결국 자신은 마호가니의 뒤를 잊게 된다. 원작의 눅눅하고 비릿한 도시의 광기를 영화는 온전히 구현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레온의 설정의 변화로 인해 원작의 음침함은 이어받게 되었다.




  레온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도시의 이면, 단정하게 찍힌 홍보사진 같은 것들 뒤의 도시의 진실과 그 폭력성을 촬영하는 사진작가다. 그는 다른 이들이 도시의 진실을 찍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도시의 진실을 찍는다고 말한다. 그것을 입증하듯 그의 카메라에 잡히는 피사체는 걸인, 폭력배, 도살된 소, 도살 과정, 피곤함에 절어 있는 얼굴을 한 노동자들뿐이다. 레온은 도시의 단정한 모습이 가리고 있는 곳을 향해 렌즈를 들이밀고 셔터를 누른다. 그런 레온은 첫 등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을 들여다보듯 응시한 후 관객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밀고 촬영한다. 마치 도시의 이면에 가려진 것들처럼 우리를 촬영하는 것이다. 도시의 이면을 파헤치는 레온의 눈에 우리는 도시의 감춰진, 그 이면의 음침한 것들에 속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관객들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외양과 행동으로 오프닝부터 시작될 살육을 관람하기 위해 극장의자에 버티고 앉은 것이다. 희생자가 늘어갈수록 관객이 원하는 바는 이루어지고 쾌감은 증폭되고 더 많은 시체를 요구한다. 우리는 전혀 단정하지 않다.




  경찰을 부르지도 않고, 위험함에도 끈질기게 마호가니의 뒤를 따라 붙는 레온의 모습은 결국 관객인 우리의 모습과 같다. 레온이 위험을 자처하고 경찰을 부르지 않는 비논리적 행태를 보면서 우리는 멍청하다고 레온을 욕은커녕 레온의 위험한 행동의 다음 사건을 간절히 기대한다. 레온이 목격하고 카메라를 들이밀 살육의 현장에 대한 기대감이 우리가 느끼는 공포 뒤의 진실 된 모습일 것이다. 경찰과 연인이 왜 그 위험한 현장에 열중하고, 그 현장을 방관한 체 단지 카메라의 셔터만 눌렀냐고 묻지만 레온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레온이 입을 다물고 있음에도 관객들은 훤히 레온의 심경을 알 수 있다. 관객의 심경이 레온의 심경과 같기 때문이다. 뻔히 고통스러울 것을 알면서 그 고통 뒤에 찾아오는 아릿한 쾌감 때문에 딱딱하게 앉은 딱지를 뜯는 것처럼 공포가 품고 있는 쾌감에 대한 욕구가 레온을, 우리를 살육의 현장에 집착하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레온이 침묵한 답을 뻔히 우리는 뻔히 알지만 그 답을 함부로 내뱉지 못한다. 그 답을 말하길 주저하게 하는 쾌감이란 도시의 단정한 모습 뒤에 가려진 도시의 참된 모습과 같은 것이다.




  살육된 인간을 싣고 전철이 도착한 곳은 마호가니가 일하던 도살장의 아래다. 그 아래서 희생자들은 게걸스럽게 수용되고, 그 살육의 장을 기반에 두고 세워진 도시는 희생자가 섞여 있을 것만 같은 도살장의 고기들을 수용한다. 살육의 기반으로 도시는 순환된다. 영화 말미 살육 전철을 운행하는 기관사는 희생자들을 먹어 치우는 존재들은 자신이나 레온 등이 생성되기 전부터, 그 참혹한 도시를 품고 있는 세계가 생성되기 전부터 그곳에 존재했다고 한다. 그 존재들은 태초부터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의 세계의 살육을 원하고 그곳에 존재 했던 것이다. 그 게걸스럽고 탐욕스러운, 어둠에 가려져 희미하게 들어나 보이는 존재들은 컴컴한 극장안의 관객들이다. 관객들은 레온이, 마호가니가, 살점이 엉겨 붙은 헤머가, 살육의 현장이 스크린에 투사되어 살아 움직이기 전부터 존재했다. 그리고 그 관객들이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의 세계에 바라고 보고 싶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한 것은 살육의 현장이었다. 관객은 살육의 장에 기반을 둔 채 살육의 현장을 방관하는 도시인(여형사, 기관사)이며, 그 살육의 현장에서 시체를 수용하며 욕망을 채우는 어둠속 존재들인 것이다.




  결국 레온은 기관사에게 혀가 뽑힌 체 마호가니의 뒤를 잇는 운명을 맞게 된다. 그것은 운명이다. 그리고 이 반전이 그리 충격적이지도 않고, 또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다. <캔디맨>의 과정과 비슷해서가 아니다. 레온이 마호가니의 뒤를 이었음을 들어내는 엔딩 씬은 오프닝 씬의 앞부분이다. 오프닝에서 마호가니로 착각한 이는 다름 아닌 레온이었던 것이다. 오프닝의 기발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레온과 마호가니를 동일시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오프닝의 그 남자를 마호가니라 착각하고 안심하며 살인마라고 염원한 것이다. 그리고 오프닝에서의 남자가 살인마이길 바란 염원은 이루어져 레온은 마호가니의 뒤를 잇게 되었다. 그렇기에 운명이다. 처음부터 우리는 그 남자가 살인마임을 바랐기 때문이다. 마호가니의 뒤를 이은 레온은 혀까지 뽑힌 살인마다. 살인마의 사정이나 심경이 어찌되었든 알고 싶지 않다. 단지 살육을 이어가란 주문의 결과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바란다. 영화 엔딩에서 그렇지 않냐며 레온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낸다. 어둠에 속에 숨어있는 관객들, 살육을 적극 수용할 관객들이 있기에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의 세계는 가동 될 것이다. 레온이 촬영하던 쾌쾌한 뉴욕 못지않게 쾌쾌한 서울, 도살된 미국 소가 공포의 촉매제 역할을 하는 뉴욕 못지않게 도살된 미국 소가 공포를 일으키는 서울, 그 서울의 극장 속 어둠에 있는 우리는 살육을 원한다. 거참! 이 발칙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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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아이
박수범 감독, 박성열 외 출연 / 대경DVD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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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아이가 있다. 그 아이들은 판소리를 배운다. 제대로 된 소리를 내기위해 작은 몸을 한 없이 비튼다. 그 소리에 기교란 있을 수 없다. 명창들이 지나온 길을 온전히 받아야 한다. 높낮음에, 흐느낌에 ‘나’는 없는 것이다. 명창들의 높낮음에 흐느낌에 그들이 터놓은 길을 따르며 질러야한다.

  

  한 아이는 대회를 나가고 명창들에게 공부를 받는다. 다른 아이는 술집과 판촉장에서 소리를 팔고 귀동냥으로 소리를 배운다. 한 아이의 아버지는 좋은 차와 좋은 집, 좋은 별장, 좋은 선생을 제공할 수 있다. 한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공연장에 밀어놓고 욕지거리를 던지고 푸념을 늘어놓으며 매질을 가한다. 두 아버지는 다른 환경에 아이들을 노출 시키지만 두 아이의 표정과 생각의 차이는 점점 좁혀진다. 두 아버지는 다른 것 같지만 같다. 두 아버지는 자신의 못 이룬 꿈을 위해 아이들을 밀어 붙인다. 자신을 잃어가는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 끝없는 연습과 직접적인 매질에 우위란 없는 것이다. 결국 다른 가면일 뿐 폭력일 뿐이다. 지방으로 소리를 배우러가 혼자 밤늦게 고속버스를 타는 아이와 가차 없는 매질로 깊게 남은 멍 자국의 차이를 찾기 힘들다. 아이들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만 간다.

  

  아비란 타이틀을 지닌 자의 폭력이다. 그 폭력이 아이들을 몰아친다. 무엇이 좋다고 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 극한의 폭력은 소리를 위해 끝을 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한을 심어주기 위함 인가? 그로써 폭력은 훗날 긍정으로 추억될까? 그 폭력이 긍정의 모습을 띌 가능성이 있기에 더욱 잔혹한 것이다. 그 아이들이 재능을 보이기에 그 폭력은 끝이 보이지 않고 더욱 잔혹하게 느껴진다. 한국 가부장의 폭력이 한국의 소리를 위해 아이들을 내몬다. 소리가 너무도 한국적으로 다가오기에 그 아이들의 폭력은 더욱 친숙하고 더욱 가깝다. 지속적으로 울려되는 소리가 자극하는 ‘한국’이란 것이 한국 가부장의 폭력을 지속적으로 인지 시키기에 소리가 울릴수록 괴로움은 크다. 고통과 서늘함이 배가된다. 그래서인지 명창들의 소리는 감흥을 일으키지만 영화 속 명창들의 소리는 다분히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음침하고 잔혹하고 명창이기에 압도하는 기운은 더욱 갑갑하다.




  아비들의 강요는 프레임의 후경이나 프레임 밖에서 일어난다. 아이들의 얼굴이 메우고 있는 프레임에 울려 퍼지는 아비들의 목소리는 가멸차다. 두 아비의 말은 다르지만 프레임을 채운 아이들의 표정은 같아지고 함께 어두워져만 간다. 영화 속에서 한번을 마주치지 못하고 소리를 하는 것을 제외하면 어떤 인연도 없을 듯 보이는 아이들의 처지가 이리도 같기에 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이리도 다른 환경의 아이들의 처지가, 이렇게 떨어져 있는 아이들의 처지가 너무 같기에 프레임 밖, 영화 밖, 영화에 잡히지 않는 아이들의 처지를 어찌 판단해야 할지 고민이 앞선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폭력에 던져진 상황을 목격할 수밖에 없다. 그 고통의 전시 속에서 우리는 비루하게 아이들의 해맑은 행동을 찾으며 웃길 바라며 안심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소리를 제외하곤 너무도 다른 환경의 두 아이가 너무도 같기에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 소리가 자극하는 한국이란 것에 얽매인 아이들이기에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 무거움은 쉽사리 털어버릴 수 없다. 극장 밖은 결국 한국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쓸모없다며, 자신이 쓰레기라며 흐느끼는 아이의 자작곡에 베인 한이 그 어떤 판소리에 베인 한보다 깊기에 그 무게를 함부로 털 수가 없다. 아이의 노래가 귀전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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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 1 : 거대한 전쟁의 시작 (2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오우삼 감독, 금성무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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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우삼. 난 그가 ‘페이첵’ 이후 끝났다고 생각했다. 오우삼의 다음 행로는 장 클로드 반담과 재회하거나 스티븐 시걸과의 만남만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헐리우드에 머물수록 그는 처참해질 거라는 생각을 가졌지만 다행히 그는 돌아왔다. 자신의 땅으로 돌아온 그의 복귀작은 적벽대전이었다. 기대를 하고 싶지만 걱정이 앞섰다. 철혈가두의 성취보단 윈드토커의 실패가 떠올랐다. 영화는 개봉했고 기대반 걱정반을 안고 극장으로 향했다. 여전히 오우삼은 걱정이 되었고 양조위를 보고 싶은 맘이 컸다. 영화는 시작했다. 그리고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상이 빗나가는 것이 이렇게 흥분이 될 줄 몰랐다. 터져나오는 탄성을 억누르느라 힘겨웠다.

  영화를 보기 전 가장 궁금한 것이 있었다. 과연 ‘이야기가 어떻게 풀릴까?’가 머리에 맴돌았다. 삼국지는 유명했다. 삼국지가 유명한 만큼 적벽대전도 유명했다. 적벽대전이란 이야기를 알만한 사람의 수가 조조의 대군을 쉽사리 짓밟을 수 있는 상황에서 영화를 어찌 진행 시킬지 궁금했다. 관객 모두들 다음을 알고 의자에 앉았다. 영화가 진행되어도 사람들은 그보다 앞서 다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영화의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오우삼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위해 힘을 쓰지 않았다. 그는 누구나 알기에 이야기를 헐겁게 만들었다. 이야기의 포인트들을 끄집어내어 헐겁게 나열해 놓았다. 후반부 조조군과 손권군의 책략 대결은 교차 편집으로 전체적 인상만 남기고 빠르게 지나갔다. 책략으로 인한 두뇌 싸움, 그로써 발생되는 이야기의 감흥을 미룬 후 그 책략 대결의 결과인 팔괘진법을 구현해 조조군을 격파한다. 애매한 대사들과 눈빛 교환으로만 구성되던 책략이 팔괘진법의 묘미를 살려 조조군을 격파함으로 서스펜스는 이어지고 감흥은 배가 된다. 이야기가 주는 감흥을 버린 대신 오우삼은 이미지들이 일으키는 감흥과 인물들이 일으키는 아우라 그리고 그런 인물들이 엮임으로 일어나는 기운을 잡아내는데 주력했다.

  삼국지의 장점은 결국 인물이다. 수많은 책략들과 흥분을 일으키는 이야기들이 넘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힘을 얻는 건 인상적인 인물들의 역할이 크다. 또 누구든지 삼국지의 수많은 영웅호걸 중 마음에 품고 있는 영웅호걸들이 있다. 그만큼 캐릭터가 주는 영향이 큰 이야기다. 그런 삼국지의 장점은 ‘적벽대전’은 완벽히 활용한다. 이야기를 차지하는 비중이나 출현 횟수를 떠나 상당수의 인물들의 매력이 넘쳐나기에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다. 그런 인물들의 매력을 구현시킬 때 중요히 여겨지는 것은 전장에서의 일기당천의 액션이 아니라 클로즈업이다. 슬로우 모션의 빈도가 전작들의 비해 적을지 모르지만 아쉽지 않다. 적벽대전의 클로즈업은 오우삼 슬로우 모션의 성취를 이어 받는다. 설전을 벌이는 인물들의 수많은 숏들 속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뒤엉킨 전장의 숏들 속에서 인물들의 클로즈업이 출몰하여 그 상황 속 감정을 지연시키고 그 상황의 인상을 들어낸다. 슬로우 모션이 처절하면서 직설적으로 내꽂는 느낌이 강했다면 클로즈업의 성취는 편집으로 이루어내는 감흥으로 인한 품위다. 같은 것을 지향하지만 품위는 더욱 향상되었다. 인물들의 율동은 흐릿하지만 편집의 율동은 용솟음치기에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다. 그런 매력적인 클로즈업과 그로인한 편집으로 인물을 주목하게 되고 그에 합당한 행동을 펼치는 인물들은 고스란히 자신만의 매력을 내뿜는다. 그렇기에 적벽대전에서 인물들의 등장 빈도는 중요치 않다. 영웅들 개개인의 무게감이 발휘되어 이야기를 휘어잡기 때문이다.

  수많은 매력적인 영웅호걸들이 등장시킨 적벽대전을 왜 오우삼은 지금 내놓은 것일까? 주유는 유비와의 만남에서 짚신을 예로 들며 단결을 외친다. 모든 책략의 끝은 결국 진법이다. 뭉쳐서, 단결하여 싸우자고 외친다. 손권이 유비와의 연합을 천명할 때의 행동은 그 어떤 때보다 단호하다. 팔괘진으로 조조군을 무찌르는 장면은 적벽대전1의 클라이맥스다. 개인의 욕망을 위해 대군을 전진시킨 조조에 대항하여 오군은 대의를 명분으로 뭉치고 단결을 외친다. 쏟아져 내려오는 적이 너무나 거대하기에 그들의 의리에 대한 외침은 최근의 어느 영화보다 긴급하다. 내부의 적을 찾는데 혈안이 되거나, 의리의 가치 없음을 이야기하거나, 아예 의리란 없음을 외치는 영화들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오우삼은 다시금 의리에 대해 강조한다. 흩어짐의 결과를 구현하고, 매력이 쏟아지는 인물들의 연합을 그려내며 의리에 대해 강조하고 의리의 매력을 인식시킨다. 허나 때가 때인지라 오우삼의 의리에 대한 외침에 적극적으로 동의함이 망설여질지 모른다. 단결의 기치가 ‘무찌르자’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정말 망설여야할지 모르지만 그 영웅들이 결국 이루려는 것은 모두 단결하여 ‘지키자’이다. ‘힘’으로 황제를 등에 업고 ‘황제의 명’인냥 ‘수’로 치고 내려오는 조조에 대항하여 ‘지키자’이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이 백성이고, 백성의 자녀들이고, 나이 많은 노인의 소이기도 하다. 치기어리고 단순하고 이상적이라고 가벼이 볼 수도 있다. 허나 가벼워 보이는 것도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기에, 또 그것이 다만 오우삼의 나라에 국한 된 것만이 아니기 때문에 값지게 여겨진다. 거대 권력에 저항하는 소수의 힘. 대의를 위해 똘똘 뭉쳤지만 전장에서 장수들은 굳이 혼자 나선다. 소수가 다수를 꽤 뚫는 힘의 로망이다. 마지막 팔괘진 전투에서 볼 수 있듯 전투를 관람하던 주유가 직접 전투에 뛰어들어 그 저항의 움직임에 동참한다. 그런 소수란 로망과 관람자가 참여자가 되어 저항에 참여하는 행위의 친숙함에 더욱 화려하고 가슴이 들끓는다.

  영화의 끝. 조조가 부하들의 경기를 보며 ‘싸움은 승패가 불분명해야 재미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 시퀸스 전 주유는 ‘저들의 진법을 꿰뚫어야 이길 것’이라고 한다. 그 말에 제갈량은 미소를 띤 체 ‘그야 쉽다’며 ‘하얀 비둘기’를 날렸다. 아이 레벨로 단면만 보여지 던 조조군의 진영이 비둘기의 비상과 함께 정보량이 달라진다. 말 그대로 ‘bird's eye view’다. 그 거대한 막막함이 조금씩 허물어진다. ‘하얀 비둘기’가 적장을 날며 꿰뚫어 본다. 그 결과는 제갈량 말대로 쉽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느끼는 흥분은 설명하기 힘들다. 매력이 넘치는 영웅들이 쏟아지니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주유를 흉내내며 미간을 찡그려야 할지 손권을 흉내내며 눈에 힘을 줄지 장비를 흉내내며 호쾌하게 웃을지 제갈량을 흉내내며 부채를 살지 고민이다. 그만큼 벅차게 흥분된다. 조만간 영웅본색이 재개봉하니 그 벅참은 감당할 차원의 것을 넘어 섰다. 올 여름은 오우삼을 되새겨야 한다. 그렇게 신나서 한참을 걷다 번쩍 든 생각이 있다. 뒷통수에 짜릿짜릿함이 한껏 흐른다. 그것은 바로 내가 적벽대전1을 봤다는 것이다. 그 말은 결국 적벽대전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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