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 아일랜드 - Shutter Islan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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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영화가 시작한다. 새하얀 화면, 아니 '스크린'에서 배 한척이 새하얀 안개를 헤집고 나온다. 배에 타고 있던 데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척(마크 러팔로)은 셔터 아일랜드에 도착한다. 그들은 완벽한 밀실인 감방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여인을 찾기 위해 섬으로 온 것이라고 한다. 시간이 흐르고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폐쇄된 세계에서 스물스물 권력의 실체가 드러나고, 들추면 들출수록 음모들이 발견된다. 꼬리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황. 업친데 덥친 격으로 아픈 과거들이 선사한 트라우마가 데니를 습격하니, 데니는 미친 사람처럼 굴기 시작한다. 광인에 가까운 상태에 돌입해서야, 모든 음모의 근원으로 (보이는) 등대로 향한 데니는 그곳에서 진실을 알게 된다. 데니, 넌 원래 미친놈이란다. 아이쿠야!

  반전을 향해 당찬 걸음으로 돌진하는 스콜세지의 신작 셔터 아일랜드. 반전의 충격이 너무도 달콤한지, 신기할 만큼 너른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반전에 대한 이런 저런 말들도 많이 쏟아지고 있다. 내가 셔터 아일랜드를 보고 신기했던 점 역시 반전과 복선에 집중된다.

  첫번째로 반전. 이 영화의 반전이 그리도 놀라운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다. 지금의 기세로는 데니는 카이저 소제, 말콤 크로우, 오대수와 어깨를 나란히 할 것만 같다. 그럼에도 난 셔터 아일랜드의 반전의 강도에 대한 찬사에 동의하기가 힘들단 생각이다. 스콜세지는 그의 영화 속 조 페시의 수다만큼이나 쉴 세 없이 복선들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복선의 섬에서 어떻게 반전을 고백의 순간까지 미루고 미룰 수 있는 것일까?

  두번째로 복선. 셔터 아일랜드에서 가장 날 자극하는 것은 복선이다. 편집 규칙 무너트리기, 한 시퀸스 안에서 두 가지 상황이 전개되지만 하나의 상황인 것처럼 시치미 때기, 앞 쇼트와 뒷 쇼트가 논리상 맞지 않기, 재촬영은 불가하니 있는 것으로 대충 이어 붙인 척하기, 여기서 조명 쏘고 있다네를 드러내기, 프린트 보관 상태가 엉망임을 증명하는 화면에 비 내리기(스크래치)와 뻥 뚫린 구멍, 여러분은 프로세스 쇼트가 무엇인지 보고 계십니다 등등. 이것들이 셔터 아일랜드에서 복선으로 기능하는 것들이다. 복선인 동시에 데니가 세상을 어떻게 지각하는지에 대한 구현에 해당하기도 한다. 이 복선인 동시에 데니의 지각의 구현이기도 한 것들을, 난 b급이라고 하고 싶다. 그러니까 로드리게즈가 '응 이건 b급 영화 따라한 거 맞아'라는 선언으로 사용한 이런 저런 효과들을 스콜세지는 데니의 정신상태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극 중 내리는 비를 이용하여 화면에 비(스크래치) 내린다 정도로 좀더 완곡하게 표현했을 뿐이지, 그 작위성은 제법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에게 복선에 대한 궁금증은 왜 이 복선들을 외면하는가이기도 하다. 첫 번째 시퀸스에서 데니와 척이 대화 할 때, 이어 붙는 쇼트들은 편집 규칙에서 조금씩 어긋나 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이 시퀸스에서부터 어떤 조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 아니어서 '스콜세지가 왠 풋내기 짓?' 정도의 감만 잡았다. 그러나 데니와 척이 병원의 환자들을 조사할 때는 완벽히 감을 잡게 된다. 도끼로 남편을 죽였다는 여인은 인터뷰 도중 물을 한잔 갖다 달라고 한다. 그녀는 척에게서 물 컵을 받아 들고 마시는 '시늉'을 한다. 척에게서 컵을 받아든 뒤, 마실 때 그녀의 손에 컵이 들려 있지 않고, 다음 쇼트에서 손을 내려놓을 때는 컵이 들려 있다. 이건 누가 봐도 옥에 티 정도로 치부할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대부분 반전을 눈치 챘을 거라고 생각했고, 극장 안은 술렁거릴 거라고 예상했지만 잠잠함으로 반전을 때렸다. 내겐 이 반전이 더 충격적이었다. 이 이상한 반전은 두 번째 관람 때 역시 벌어졌다.

  왜 관객들은 이 괴상한 복선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일까? 척 봐도 딱 이상한 장면에 왜 침묵하는 것일까? 스콜세지의 이 당찬 걸음에 왜 태클을 걸지 않을까? 반전 전까지 뒤를 돌아보게 하지 않는 이 당찬 이야기. 이 이야기는 무엇으로 이루어졌지? 수많은 음모들, 장르의 기호들, 이것들 저변에 깔려있는 사전에 합의 된 약속이라는 윙크. 나치와 관련하여 파급되는 이런 저런 것들. 공산주의 침공이 파급하는 이런 저런 음모들. 적이라 상정한 것들과 같은 짓을 하려는 국가의 이런 저런 음모들. 귀신들린 것 같고, 한번 들어오니 나가기 굉장히 힘든 섬. 광고용 그림처럼 화목한 척하는 폐쇄된 세계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권력의 실체. 2차대전 참전 후 얻은 이런저런 트라우마. 탐정이란 것이 파급하는 이런 저런 기호들.(이 중에 혹시라도 심슨가족에서 다루지 않은 것이 있나?) 이런 수많은 약속들은 서로 꼬리를 물고 머리를 물고 엉키고 엉켜, 스스로가 입증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약속으로 넘기고, 다른 약속이 증명 못하는 것을 자신이 받아 뭔가 그럴싸한 실체를 만들어낸다. 이 과정은 데니가 당찬 상상력으로 만드는 이야기의 생성과정과 많이 닮아 있다. 사전에 약속된 것들을 토대로 눈앞의 현상을 마구마구 집어 삼키기. 이 반성 없는 폭식 앞에서 음모들은 길게 꼬리를 빼고 서로를 꼬아, 스콜세지가 (아마도) 일부러 헝클어뜨려 놓은 것들을 봉합시켜 버린다. 이때 코니 박사는 안타까움에 속삭인다. "데니 당신은 전에도 지금처럼 치유된 적이 있지요. 하지만 당신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버려요"

  사전에 합의된 약속들을 착실하고 순진무구하게 믿어버리는 사람들. 눈앞의 것을 외면하는 사람들. 스크린에 무엇이 투사되는가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사람들. 이 이상한 상황은 코니 박사의 말처럼 다시 반복된다. 사람들은 셔터 아일랜드는 영화가 끝난 후 시작된다고 한다. 반전을 알기 전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화의 논리에 자신이 깔고 있는 음모들을 투사하여 받아들였다면, 반전을 알고 난 뒤는 반전을 지팡이 삼아 모든 어긋남을 봉합시켜 버린다. 관객은 스스로 무언가 잘못 되었지만 조금도 문제 될 것이 없는 상황으로 빠져버린다. 난 이 상황에서 셔터 아일랜드에서 3번 반복된 쇼트가 생각난다. 옆으로 누워있는 데니의 얼굴을 같은 사이즈와 같은 앵글로 찍은 쇼트들. 마치 쇼파에 누워 티비 보는 것만 같은 데니의 얼굴, 그런 태도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관객의 게으름. 코니 박사의 탄식은 이 때문에 발생한다. 이 탄식이 깊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장르의 나선을 확인 후, 그 나선에서 탈출을 시도하고 탈출하는 인물들이 장르 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가장 가까운 예로는 예언자의 말리크. 예언자의 결말은 속편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는데, 만약 속편이 만들어진다면 말리크는 장르의 나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스콜세지의 대답은 '아니다'일 것이다. 이것은 보는 이들과의 약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장르의 한계를 지목하는 것일까? 아니면 영화의 한계를 지목하는 것일까?

  나는 셔터 아일랜드를 생각할수록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이 떠오른다. 로이 오빈슨의 in dreams가 울려 퍼진 뒤, 프랭크 부스는 일당과 제프리를 이끌고 우리 모두 섹스를 하자며 외치고 신나게 웃다가, 프레임 안에서 감쪽 같이 사라진다. 공간과 웃음만을 남긴 체. 웃음은 길게 늘어지고, 프랭크의 실체는 사라진다.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음모들, 그 음모들은 갑자기 사라진 뒤 여운을 길게 빼곤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약속들은 꼬리를 물고 고개를 쳐든다. 음모(프랭크)가 장악하는 세계에서, 훔쳐 본 것들을 이어 붙여, 마치 약속한 거처럼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이야기에 범죄 이야기를 투사하고 탐정을 자처하는 제프리는 너무 순진해서 멍청해 보일 정도로 장르의 나선에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 제프리는 어떻게 그 나선에서 빠져 나오는가? 바로 사건을 훔쳐보던 그 자리에서 프랭크를 쏴 죽이고 나서야 그 나선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그리고 서툰 이야기의 결말 같은 해피엔딩으로 영화는 끝나면서, 프랭크를 쏴 죽이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고백한다. 스콜세지는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프랭크를 죽이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프랭크를 죽이지 않는 이상, 영화를 뚜렷하게 헝클어뜨려 놓아도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마도 뭔가 심각하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화도 (투사된 영화를 받아들이게 하는 약속들을 품고 있는) 세상도. 우리는 많은 것을 보았고 알고 있지만, 괴물이 되어 죽는 것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데니의 마지막 물음에 쾌감을 느끼는 이유 또한 그 때문일 것이다. 데니의 물음을 어떠한 고민 없이 극 중 흐름과 뉘앙스에 기대어 의미심장함이란 자극으로써 소모한다. 이때 심각하게 당황하고 안타까움에 눈물을 글썽이는 건 영화 속에 있는 시한 박사와 코니 박사뿐이다. 스크린을 마주하고 있는 관객은, 음모가 드러내지 않고 있는 거대함에 감동하는 것처럼 그 물음에 감동한다. 스콜세지는 이게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의 문제제기에는 공감하지만,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에는 찬성하기 힘든 것 같다. 스콜세지는 프랭크를 쏘아 죽이라며 많은 상황을 조성하긴 하지만, 그 거침없는 진행의 과정에서 프랭크로 영화를 장악해버린 것 같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스콜세지의 냉소인가? 스콜세지의 영화 저변에 깔려 있던 서늘함의 정체가 결국 냉소였던 것일까? 아니 그보다 스콜세지는 앞으로도 영화를 이렇게 만들 것인가? 솔직히 난 여기서 어떤 단언하기가 힘들다. 셔터 아일랜드가 스콜세지의 비관인지 냉소인지 안타까움인지는 다음 영화가 결정할 것 같다. 그래서 기다릴 테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거장인 노장의 다음 영화를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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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트 클럽
척 팔라닉 지음, 최필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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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걸 절멸이라 생각하지 마. 그저 소형화일 뿐이니까.
  수천 년간 인간은 지구를 마구잡이로 손상시켜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날더러 원상회복시켜 놓으라는 거야? 수프 캔을 깨끗이 닦고, 다 써버린 엔진 오일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주워 담으라고?
  그걸로 모자라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묻혀 있던 핵 폐기물, 휘발유 탱크, 그리고 유독성 폐수를 전부 내 책임으로 떠미는 거야? - 파이트클럽 160p

  이것은 우리가 못내 무기력한 이유다. 우리는 이제야 태어났는데, 벌써 똥은 한 무더기인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배설하는 이들은 오늘 하루도 열심히 열심히 배설을 한다. 산더미인 똥 무더기에 기가 질려 고개를 돌리면, 먼저 태어난 것들이 열심히 항문을 놀려 되는 모습을, 아니 그것도 모자라 지니고 있는 온갖 구멍으로 배설을 하는 장관을 펼쳐 보이니 우리는 우울함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이 처참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 보지만, 우리의 선택이란 비루하기 그지 없어보이기만 할뿐이다. 배설에 동참하거나, 자신이라도 똥 사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거나, 온갖 사투를 벌여 고작 내 주변사람들을 구제하는 것. 그러니 우리는 못내 무기력하지. 탈출을 위한 돌파구를 떠올릴수록 무기력하니 우리의 주인공은 타일러 더든을 만날 수 밖에.

  우선 우리의 주인공이 살고 있는 똥 무더기에 대한 세심한 탐구. 척 팔라닉은 주인공이 살고 있는 곳이 도대체 어떤 곳인지 사려 깊게 그려낸다. 예를 들어 '이 빌어먹은 도시. 더럽게 높은 빌딩, 공기인 것 마냥 무더기로 쑤시고 들어오는 매연, 차에 치여 넝마가 된 개가 풍귀는 악취와 그 옆에 있는 토사물. 이곳에서 당신이 멋진 양복을 빼입고 호기롭게 신문을 사들어 펼쳐도 반기는 기사라고는 늙어 문드러진 국회위원과 남창 애인에 대한 기사일 뿐.'등으로 그려내지 않는 사려 깊음. 그런 묘사를 하지 않는 대신 작가는, 잿빛 땅위에 사는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정확히 말해 어떤 기술과 지식을 지니고 살아가는 지를 묘사한다. 그 묘사가 반복되고 세세할수록 그것들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세상이란 얼마나 더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을 테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 어떻게 하면 비누를 만들 수 있는지, 비누를 만들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영사기는 어떻게 켜는지, 웨이터들은 무엇을 하는지, 자동차 회사들은 어떤 방식으로 리콜을 결정하는지 이런 세세하고 전문적인 지식들. 이 지식들을 척 팔라닉은 사려 깊고 상세히 '서술'한다. 이 서술을 읽다보면, 이봐 이건 취재한 거야란 외침이 혹은 작가의 취재 대상의 모습과 어떤 장소에서 어떤 태도로 답변을 했을지가 그려진다. 그렇다 취재. 그렇다면, 소설 밖 현실 세계의 전문적인 지식들을 척 팔라닉은 모으고 모아, 소설 속 세계를 묘사한다. 저자는 취재를 통해 파이트 클럽의 하드한 세계를 그릴 수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역사가 자랑스러운 걸음으로 호기롭게 제시한 문명이란 얼마나 불필요한 야만적 폭력을 불러오는지를 증명하기도 한다. 우리의 사랑스런 디즈니 영화에 고작 한 프레임 삽입되어 우리의 인식을 제치고 우리에게 파고드는 음경. 비싼 돈을 들여 힘겹게 뽑아낸 허벅지 지방으로 만든 비누를 다시 비싼 돈 들여 사드리기. 비누를 만들기와 다이나마이트 만들기의 친밀성. 이것들은 자랑스러운 문명이 늘어뜨린 필요 이상으로 거대한 그림자와 같은 것. 이것들은 취재를 통한 것.

  우리의 주인공은 이 분열적인 세상이 밉고 미워 타일러 더든을 만난다. 타일러 더든, 그는 등장과 동시에 울타리에서 벗어나려 한다. 아니, 결국 울타리를 부수는 것만이 울타리 안의 어린 양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대뜸 자신을 후려 갈기라고 하고, 파이트 클럽을 만들고, 무정부 상태를 도래시킬 혁명을 위해 열심히 열심히 뛰어다닌다. 우리는 그의 거침없는 행보에서 주목할 것을 놓치면 안된다. 그가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하는지 말이다. 그것은 바로 문명과 함께 도래한 것들. 잘난 기술들의 잘난 폭력성들, 그것들을 타일러 더든은 슬기롭게 이용하여, 문명이 원치 않는 세상을 도래시키기 위해 분투한다. 타일러 더든의 영웅성은 세상의 이치를 노려볼 줄 아는 영악함에서 출현한다. 파이트 클럽 속 세상이 타일러 더든 한명 처치 못하고 허우적되는 건, 자신들의 양면성을 끝내 모르기 때문이고, 타일러 더든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허나, 우리는 타일러 더든의 장점은 오롯이 한계가 된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그가 꿈꾸는 세상으로 전진을 위해 이루는 공동체의 형상을 잊어선 안된다. 획일화를 외치는 독제자로써의 타일러 더든, 그것에 경도되는 파이트 클럽의 회원들, 그들의 꿈인 무정부주의. 파이트 클럽의 회원들은 문명의 위선에 분노하고 울타리를 부수기 위한 모든 행동과 사상을 행하고 외치지만, 타일러 더든이 주인공 뒤에 늘어진 거대한 그림자일 뿐인 것처럼 그들의 행동도 문명의 뒤로 늘어진 그림자일 수 밖에 없다. 타일러 더든의 행진은 문명이 모르는 척하는 온갖 기술과 처세를 자신의 방식으로 쓰여짐으로 써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전체주의에 빠지고 대책 없는 무정부주의에 빠진다. 이런 타일러 더든의 한계를 여실히 들어내는 것이 있다. 그가 파이트 클럽의 회원들에게 그려주는 미래이다. 아스팔트 위에서 일광욕, 부서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잔해에 숨어 사슴 잡기등으로 그려내는 미래. 왜 그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미래를 그리지 않는 것일까? 붕괴되고 상흔에 불과하더라도 문명을 쥐고 있는 이유는 타일러 더든은 이면에 불과하기 때문이고, 그는 그 자리에서 벗어날 마음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질책할 수 없지. 주인공과 타일러 더든의 첫만남. 어느 해안가에서 눈을 뜬 주인공, 바다에서 떠내려 온 유목들로 손바닥 그림자를 만들고, 그 손바닥 가운데에 앉는 타일러 더든. 세상이 '내 것이 아니'라며 버린 것들로 이루어진 형상의 가운데 앉은, 그 그림자의 정수인 타일러 더든.

  이제 척 팔라닉의 선택. 척척 진행되어 가는 타일러 더든의 계획. 조금씩 가까워져 가는 미래. 아찔한 주인공. 성역으로 올라선 타일러 더든의 목소리와 육신을 떠나버린 타일러 더든의 계획. 타일러 더든의 한계성과 그 한계성이 도래시킬 미래가 아찔한 주인공. 고군분투하지만 성실히 실패하는 주인공의 행동과 그럴수록 증명되는 타일러 더든의 목소리의 성스러움. 결국 힘겹게 올라선 빌딩에서 자살을 택하는 주인공과 애타게 그에게 달려오는 말라와 모임을 통해 알게 된 장암, 뇌 기생충, 흑새소 세포종, 결핵 환자들. 그들의 쩔뚝거림과 녹슨 휠체어의 끽끽 소리의 애달픔. 자 여기서 다시 우리는 이 빌딩 옥상으로 오기 전까지의 파이트 클럽의 세계를 그려보자. 주인공은 말라에게 조심할 것을 당부하며 이렇게 말한다. 머리를 박박 밀고, 얼굴에 멍이 있거나 이빨이 부러지거나 빠진 사람들을 조심해! 그러니까 소설이 우리의 머리에 그려놓은 세상의 모습은 위에 묘사된 남자들이 빼곡히 정리되어 충성어린 눈빛을 보내던 모습이다. 타일러 더든의 지하실에 있는 파이트 클럽 회원 수면실의 빽빽한 단정함! 자 이제 주인공이 자살을 하려는 빌딩으로 돌아가서 척 팔라닉의 선택을 보자. 주인공을 향해 뛰어오는 말라와 환자들의 형상을 그려보자. 그 불균일성, 통일성이 결여되고, 훈련으로 학습된 영민한 움직임을 지니지 못하는 그들의 뻑뻑한 몸짓. 이 형상은 소설이 쌓아오던 획일화된 이미지와 정면충돌하여, 척 팔라닉의 경쾌하고 매정한 문장에서도 코가 찡한 감동을 일으킨다. 이 순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책 표지에 적힌 '척 팔라닉의 작품은 지금부터 100년 동안 미국 문학의 클래식이 될 것이다'란 타임지의 호들갑을 읽으며, 타임지 자식들 나름 현명하자나라고 중얼거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척 팔라닉의 사려 깊음에 대한 감탄을 여기서 멈추어선 안된다. 모든 것이 붕괴되기 칠분 전 주인공은 떠든다.

  농도 구십팔 퍼센트의 질산에 그것의 세 배에 달하는 양의 황산을 섞는다.
  그럼 니트로글리세린 완성.
  칠분.
  니트로글리세린에 톱밥을 섞어 주면 제법 쓸 만한 플라스틱 폭탄이 된다. 많은 우주 원숭이들은 황산염화를 시키기 위해 니트로글리세린에 탈지면과 황산 마그네슘을 넣기도 한다. 물론 그러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 또 다른 우주 원숭이들은 니트로그리세린에 파라핀을 섞기도 한다. 내 경험으로는 파라핀은 최악의 선택이다. - 파이트 클럽 263p

그리고 모든 붕괴가 예정된 시간, 그 붕괴가 이루어지기로 약속되었지만 아무 일도 없이 잠잠한 침묵의 시간이 지난 후 타일러 더든은 떠든다.

  내가 그랬잖아. 파라핀은 최악의 선택이라고. - 파이트 클럽 265p

척 팔라닉은 멍청한 우주 원숭이들에게 기회를 한 번 준다. 자랑스럽게 여기는 문명은 더러운 똥 무더기를 동반하지만 그것을 정화할 수 있는 능력 또한 동반하고 있음 속삭이면서 말이다. 저자의 너그러운 마음에 감탄하면서 나는 파이트 클럽이 처음 세상에 나온 년도를 생각한다. 1996년, 그로부터 12년이 지났지만 똥 무더기의 부피는 무식하게 커지기만 한 것 같다. 아! 우리는 분노하고 붕괴해야만 할까? 하지만 난 그리 마음먹지 않으리. 이렇게 끝내주는 소설을 쓴 작가의 슬기로운 선택을 성실히 믿는 것도 나름 끝내준다는 생각이 들기에. 말라와 암, 뇌 기생충, 흑새소 세포종, 결핵 환자들이 불러일으킨 감동을 믿는 것도 끝내준다는 생각이 들기에.

  "모든 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어요."
  속삭임.
  "문명을 부숴 버리고, 세상에서 좀 더 나은 뭔가를 창조해야죠."
  속삭임.
  "당신의 귀환을 기대하고 있을게요." - 파이트 클럽 268p
 
  아차차! 소설의 마무리가 뭔가 의미심장하다면 그것은 소설이 그려낸 과정을 겪고 학습한 주인공은 이제 문명의 붕괴를 참된 방법으로 꾀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귀환을 기대해보는 것도 좋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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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하루 - 아웃 케이스 없음
전도연 외, 이윤기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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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영화를 찍기 위해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어떻게 해야 좀더 비극적일까?'이다. 어떻게 하면 인물들이 좀더 비극적일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영화를 볼 사람들에게 비극이란 감정을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 그 전달된 비극을 어떻게 분노로 치환할 수 있을지 고심했다. 나는 그 당시 알게 모르게 항상 분노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명박은 대통령이고, 오세훈은 서울시장이고, 사람들은 점점 무미건조해지고, 헛된 선택을 하거나 아예 방관해버리고, 사방에서는 먼지를 일으키며 공사만을 하고, 말도 안 되는 터전에서 좀더 빡세게를 주문처럼 외우고 그것을 젊은이들에게 강요하는 사람들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생각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이처럼 '핵폭탄존재의목적은끝장십억볼트필요'를 외치고 다닌 것 같다. 그 대사처럼 영화 속에서 모든지 끝장내려고 열심히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면서 시간을 보내던 중, 내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군이 대사보다 훨씬 많이 입에 달고 다니는 좋은 세상에 대한 믿음말이다. 이 깨달음은 어느날 불쑥 찾아 온 것이 아니다. 몇몇 계기가 있었는데, '멋진 하루'도 그 중에 하나이다.

  영화는 차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남녀를 비추며 시작된다. 그들은 전형적인 한국사람인 듯 돈과 부동산, 투기를 해서 한탕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대화를 하며 은근한 시기를 들어내는데, 그 남녀의 대화 속 주인공은 꼭 '희수'와 같다. 희수는 지나치는 사람처럼 소박히 등장한 것이나 영화에서 별다른 관계가 없는 남녀가 지칭하는 사람과 흡사한 인물로 그려지듯, 별로 특징될 것이 없는 한국사람이다. 방어적이고, 계산적이고, 공과 사에 대한 구별을 중요시하는 인물 말이다. 한국에서 특히 서울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전형을 띄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희수가 병운을 만난다. 병운은 희수와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공과 사의 경계가 없는, 그래서 자꾸만 희수의 화를 돋우는 인물인데, 병운은 희수의 화만 돋우는 것이 아니라, 희수의 태도가 도시인의 덕목이라고 생각할 관객 대다수의 화를 돋운다. 어중간한 병운의 태도 때문에 잔뜩 화가 난 희수와 관객은 화가 났기에 그들의 하루를 멋지게 받아들일 수 있다. 돈을 갚고 받기 위해 서울을 헤매는 병운과 희수는 여러 사람을 만나는데, 만나는 사람이 늘어갈 때마다, 병운을 바라보는 희수의 시선을 누그러들고 관객의 시선 역시 누그러들고 결국엔 병운의 진심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이 더욱 멋진 것은 서울이란 도시에서 자신들만의 벽을 만들어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명랑한 발걸음으로 찾아가, 반대편 벽에 있는 사람과 만나게 하면서 명랑하게 경계를 허문다. 영화는 그 허물어지는 경계를 희수의 변화하는 태도로 조금씩 드러내고, 결국 영화 말미에 가서는 희수는 자신의 벽을 넘어 다른 벽 뒤에 살고 있는 사람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그러한 선택을 택하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가 정말 멋진 것은, 단순하게 변화하는 희수를 나열하고, 이래야만 멋지다고 관객을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희수의 자리에 위치시킨 다음 희수가 진심으로 상대에게 응원을 보낼 때쯤 관객도 그러한 희수의 응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하는데 있다.

  영화는 희수의 변화를 들어내기 위해, 서울을 돌아다니며 고운 순간들을 잡아낸다. 주행중인 차 안으로 쏟아지는 햇살이나, 평범한 건물의 난간에서 일광욕을 하는 시간, 긴 버스가 커브로 인해 앞 칸에 탄 인물이 가려졌다 들어나는 등 우리가 별다른 주시를 하지 않고 지나갔을 순간들을 끄집어내어 희수와 병운의 길을 감싼다. 이렇게 알지만 잊거나 주시하지 않았던 것들은 우리가 쌓아 올린 벽에 균열을 가하고, 벽 쌓기를 멈추고 무언가 느긋이 응시하고, 그 응시를 통해 본연의 가치를 찾는 순간과 관계를 드러낸다. 이 드러남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기억에서 웅크리고 있던 것들까지 흔들어 깨워 어느새 희수의 변화와 병운의 삶의 태도를 받아들이게 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이윤기 감독은 이렇게 건조하고 냉랭한 땅과 그 땅 위에서 발을 딛고 있느라 삭막해진 희수와 관객에게 병운과 이 땅위에 고운 순간들을 응시하는 시간을 보내 준다. 그리고 정말 멋지게도 관객은 병운의 삶의 태도를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 땅위에서의 이익과 합리와는 다른 길을 걷는 병운의 삶의 태도에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을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은 내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근엄한 목소리와 충격적인 장면들로 사실을 들추며 영리한 짜임세와 흐름으로 관객을 괴롭히고 괴롭힐수록 좋은 길로 이행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좋은 세상을 믿는 고운 마음과 같은 고운 태도로도 관객에게, 자신들과는 다른 삶의 태도를 긍정할 수 있게 만든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정말 큰 가르침이었다. 분노를 일으키는 대상에 대해 분노로 대응하며 나를 망치지 않아도, 좋은 세상을 믿는 고운 마음을 유지하고도 충분히 혹은 더 따스하게 그 믿음으로의 이행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생각이 그쯤 미치자 결국 차에서 내리지 않는 희수에 대한 아쉬움 또한 바뀌게 되었다. 차 안에 앉아 있는 희수, 영화를 보기 위해 앉아 있는 우리, 영화가 끝난 후 일어나야만 하는 우리, 극장 안에서든 거실에서든 영화가 끝나면 일어나야만 하는 우리, 즉 차 안에 희수와 관객을 남겨둔 이윤기의 사려 깊은 배려는 선택을 우리에게 맡긴다. 차문을 극장 문을 대문을 방문을 열고 우리가 어디로 갈 것 인지에 대한 선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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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두비 - Bandhobi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처음 ‘반두비’를 보곤 놀랐다. 이유는 다소 관념적인 대사를 내뱉을 때도 십대 소녀의 핍진성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과 ‘나의 친구, 그의 아내’보단 후퇴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난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본 후 방문자를 보았다. 그래서 두 영화사이의 발전을 확연히 느꼈던 터라 ‘반두비’의 후퇴는 다소 아쉬울 수밖에 없다. 허나 ‘반두비’에서 후퇴했다고 생각되는 점들을 단순히 단점이라고 하기 힘들어진다. 예를 들어 소격효과, 신동일 영화의 인장 중 하나인 관객에게 말을 걸기 장면들을 들 수 있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영화 후반부 지숙은 예준에게 올라탄 체, 관객에게 말을 거는 장면은 지숙의 관능적인 몸짓처럼, 천장을 덥쳐 가는 불길의 아찔한 광경처럼 완벽했다. 개인적으로 ‘방문자’에서 아쉬웠던 점들이 이상적으로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반두비’에서의 소격효과들은 직설적이고 투박하고 생각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그 아쉬움을 함부로 단점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 소격효과 장면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곳에 감독은 사라지고 관객에게 말을 거는 인물만 남는다. ‘반두비’에서의 소격효과는 현실에서 들을 수 없는 목소리, 볼 수 있으나 외면하던 인물들에게 영화의 한 부분을 고스란히 넘겨주는 감독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인터뷰 자리에서 멋있는 척 ‘인간이나 삶에 비해 영화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쉽사리 내뱉고 마는 감독들과 달리, 연출자로써의 욕심을 털어내고 사회적 약자들과 그들의 목소리를 위한 감독의 윤리적인 모습이 가장 빛나는 곳이, 영화에서 다소 아쉽다고 생각되는 그 부분이다.




  아쉽다고 생각되면서도 곱씹으면 절대 단점이 될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이는 ‘반두비’에서 굉장히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된다. 바로 관습적 전개에서 떨어지는 영화의 밀도다. ‘반두비’에선 관습적 전개에서 느껴질 만한 흔한 긴장감 같은 것이 유발되지 않는다. 이것은 연출력의 미흡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좀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




  그 아쉬움을 좀더 곱씹게 하는 씬이 있다. 민서와 카림이 바닷가에서 밤을 보내고, 카림의 작업장으로 돌아온 뒤 카림이 가장 행복했다고 고백하는 순간 경찰이 들이 닥쳐 카림을 체포한다. 불운한 인물이 가장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전개는 뮤직비디오들에서 몇 번인가 본 기억이 있다. 그만큼 관습적인 전개였고, 그러한 전개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느낄 수 없지만, 이러한 장면들은 연출력의 부재란 말을 하기 힘들게 한다. 카림이 체포된 뒤부터, 민서는 프레임 아웃하고, 목소리만이 프레임 안으로 파고든다. 격렬한 헨드헬드로 불안감이 증폭된 카메라는 카림과 일정거리를 두고 서 있다. 카림은 울분이 터짐에도 거리를 두고 있는 카메라로 인해, 관객은 그 상황에 완전히 빠져들기 보단 응시하게 되고 나아가서 관습적 전개, 그 자체를 보게 된다. 재미있는 건 이 씬에서 민서는 카림이 체포 직후 한참을 프레임 밖에서 목소리만 외치다가 나중에서야 프레임 인하게 된다. 프레임 인 하기 전까지 민서의 위치는 관객과 동일하다. 그리고 민서가 프레임 인을 한 뒤, 그녀는 관찰자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 상황을 파고든다. 여기서 민서가 프레임 인 한다는 것, 그녀가 관찰자의 자리를 내던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이유는 극의 전개를 보면 민서의 프레임 인 후, 가뜩이나 자아정체성이 뚜렷하던 그녀가 완전히 주체성을 얻게 된다.




  관찰자로써 민서를 생각할 때 중요한 씬. 그것은 반두비에서 보고 있기 힘든 장면 중 하나인, 민서가 카림에게 유사 성행위를 해주는 장면이다. 여기서 민서에게 유사 성행위를 받던 카림은 갑자기 민서의 방을 박차고 나가고 민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떠나는 카림을 바라본다. 이 장면은 누구에게나 불편하면서도, 이성적으로는 민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자신이 카림에게 해준 것은, 대딸방에 손님으로 온 남성들은 모두 좋아한 것이었기에 카림도 당연히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허나, 카림이 민서의 행동을 뿌리쳤을 때, 민서의 관성적인 삶 속의 태도가 거부당했을 때, 당연한 운동이 중단을 요구 되었을 때, 민서는 화내거나 울거나 망연자실하지 않고 ‘어리둥절’해 한다. 자신의 질서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이때부터, 어리둥절한 민서는 관찰자의 위치에 선다. 영어 강사와 카림이 대화 할 때 민서의 위치, 카림과 다툰 후 하인즈를 바라보는 민서의 위치, 결국 불법 체류자가 된 카림이 바닷가에 가서 절규할 때 민서의 위치. 카림이 민서의 방을, 민서의 관성적인 삶을 박차고 나간 이후, 민서는 관성에 따라 꾸역꾸역 운동하는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관성적인 세상을 넘어서 관객의 위치에 자리해 관성적인 전개(카림 체포 씬)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 앙상한 얼개를 봐 버린 민서는 당연히 그 나선에서 벗어난다.




  관성과 관습에서 벗어나게 된 민서는 관성과 관습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살고 있는 이들을 호되게 질책한다. 그 후, 학생으로써 관성적인 삶을 살 것을 종용하는 학교에 도착하여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 나갈 것을 천명한다. 그때 민서가 내뱉는 말은 ‘인생이 더 큰 학교자나요’이다. 다소 낯간지러울지 모르겠으나, 전개의 얼개를 바라보고 그것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대사인 것이다. 그 후 민서가 마지막으로 다다른 것은 방글라데시 식당. 그곳에서 한상 가득 방글라데시 음식을 시켜 놓고 이것저것 맛보던 민서는 갑자기 자신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힌다. 그 행동은 카림을 떠올리는 행동인과 동시에, 관객(=민서)를 간질이는 것이다. ‘친구를 웃게 하는 자는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 이 말을 민서에게 전해준 카림의 나라에선 친구를 초대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 민서의 그 간질임은 새로운 질서로의 초대라고 생각한다. 관객은 민서와 함께, 그 관성적이고 관습적인 세상이 인물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았고, 그 앙상한 얼개를 함께 목격 했으며, 민서가 어떤 길을 걷는지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민서와 ‘함께’ 보았기에 ‘반두비’ 속의 관습적 전개의 앙상함이 단점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우리가 그 얼개를 보는 것은 ‘중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얼개’를 보았다. 그렇다면 영화가 끝난 이후는? 보고 난 이후는? 민서는 그 이후를 함께하자며 우리를 간질이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가 프레임 인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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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그의 아내 - 아웃 케이스 없음
박희순 외, 신동일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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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동일 감독의 <신성가족>을 보면, 가족사진이 있는 액자가 깨지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신동일 감독의 프레임은 깨져 있다. 이미지들이 주는 날 선 느낌은, 애초에 프레임이 깨져있기 때문이다.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영화 속 인물의 눈이 잘려 나갔다면, 신동일 감독의 영화는 보는 이의 눈을 잘라낸다. 인물들의 바스트를 잡은 단순한 장면에서도, 불편하고 괴로운 건 상처 나는 눈 때문이다.

깨진 액자에서 알 수 있듯, 평범한 이미지(가족사진)는, 없는 듯 그것을 보호하고 있던 ‘것’의 균열과 파괴로 변형된다. 망각했던 것이, 혹은 자신의 존재를 망각 시키던 것이 균열을 일으키며 존재를 드러내고, 그 들어난 존재로 인해 안에 있는 이미지는 변형된다. 평범한 이미지는 깨진 유리로 인해 변형되는 데, 그 변형은 본질을 들어내는 상징이 된다. 중요한 건, 깨진 액자 유리로 인해 변형되는 이미지에서 본질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결국 보는 이가 그렇게 받아들인 다는 것이다. 이 받아들임에는 약속이 전제되어 있다. 우연히 떨어진 액자가 깨짐으로 인해 파국이 다가온다는 것은, 보편적인 약속이다. 약속이 뜻하는 바는, 우리가 본질을 애초에 알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보편성의 연쇄 속에서, (약속되어 있는)균열을 일으켜 우리가 알고 있지만 망각한 것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두 남자와 한 여자라는 다소 친숙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의 흐름 또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허나, 영화 오프닝에서 본 결혼식 이미지, 영화는 그 박제된 이미지들을 감싼 망각된 것을 부시고, 본질적인 것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끄집어낸다. 앞서 말했듯 영화의 프레임은 깨져 있다. 깨진 유리가 직접적으로 제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물 뒤의 책장, 숏의 지연, 갑작스레 말을 멈추는 인물, 연극 같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애매한 구도, 직접적인 정치적 언급 등은 우리가 보고 있는 이미지에 낯선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 낯선 장치들은 영화의 숏이 제시하는 주된 정보는 아니지만, 주된 정보에 섞여들어 낯설음을 일으키고, 그로인해 눈앞에 제시된 이미지에서 안도하지 말 것을 환기시킨다. 깨어진 유리는 숏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인물들이 마주보고 앉아 대화를 나눌 때, 마스터 숏이 등장한 후 쪼개서 각 인물들의 독립된 숏으로 이어 들어갈 때, 항상 180도 선을 넘어서 찍는다. 이상하리만큼 180도 선을 넘음으로 생기는 어색함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러한 편집이 성립해 버린다. 허나 성립함에도 낯설음이 발생하게 된다. 단순한 대화의 연결 자체에 낯설음이 발생하고, 영화의 흐름에 안주하는 것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에서 일으키는 경각심은, 영화에서 지목하는 정치적 사실만이 아니라, 영화에 안주하는 태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예준과 지숙이 헤어숍에서 분식을 먹을 때, 그 밑에 깔려 있는 신문의 기사들은, 영화를 관람하는 이들이 극장 밖의 세상에 차단되는 것을 경계하며 끊임없이 현실 문제를 끌고 온다. 혹시라도 이 영화가 아무리 생각해도 불편하다면, 영화에서 경각심을 일으키는 것들이 보편성을 띄고, 우리의 삶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어, 삶 속 이미지들을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보게 된 이유들 중 하나는, 어디선가 책장을 미장센하려면 바로 이 영화에서처럼 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영화의 책장은 망각된 과거를 고스란히 박제해놓은 상징이다. 그런 책장 앞에서 예준은 가장 추잡한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책장은 깨어진 유리 역할을 하면서도, 보편성을 띄게 된다. 영화에서 깨어진 유리 역할을 하는 많은 것들이 상당히 보편성을 띄는데, 이러한 보편성으로 인해 이것들이 일으키는 경각심은 영화의 밖으로도 이어지게 된다. 떡볶이 밑에 깔린 신문, 무심코 켜놓은 TV, 손대지 않은지 오래된 책장은 보편성을 통해 우리의 삶을 환기 시키고, 우리는 알고 있지만 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면은, 영화에서 언급하는 정치적 주제보다 보편을 부수고 환기시켜 실제 삶의 보편적인 것의 표정을 바꾸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지숙의 헤어숍에서 예준이 지숙의 손가락을 빨 때, 유리창이 부셔지는 소리가 난다. 깨진 유리 파편을 볼 순 없다. 여기서 깨어진 건 유리창보단 영화의 프레임이다. 끔찍하게도 영화 속 인물들은 깨어진 것을 알아차린다. 이것을 기점으로 가려진 사실은 들어나고, 예준의 처단으로 향하지만, 영화는 이를 (어떻게 보면)모호하게 처리한다. 허나 이 모호함은 극심한 아리송함을 남기지 않는다. 영화는 끊임없이 우리가 ‘알고 있지만’ 망각한 것을 일깨우며, 그것들을 쌓아왔다. 그로인해서인지 이 후반부 시퀸스는, 모호함보단 넉넉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개입시키기 수월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이 시퀸스에 질문을 던지고 파고들기보단, 그 시퀸스를 보며 느꼈던 것을 간직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남의 것을 쉽사리 써먹는 것 같아, 겸연쩍지만 그럼에도 이동진 기자가 이 영화를 환상적이리만큼 잘 요약한 문장이 있어 안 적고는 못 배기겠다. ‘죽비처럼 내리친다.’ 정말 죽비, 아니 깨져서 날카로운 유리방망이로 눈을 후려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호되게 후려 맞은 상처투성이 눈이 어느 때보다 맑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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