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침체
타일러 코웬 지음, 송경헌 옮김 / 한빛비즈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미국의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도래하고, 이전과 다른 장기적인 저성장에 대비하여 욕망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의견들이 눈에 띄었고, 그 견해들의 레퍼런스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렇게 이리저리 헤매다 타일러 코웬의 거대한 침체를 읽게 되었고, 위 의견들을 출발시킨 핵심 레퍼런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대해 가장 경제적이고 선명하게 설명한다.


  저자 타일러 코웬은 조지메이슨 대학의 경제학 교수이자 동대 시장 경제 리서치 센터에서 감독으로 있으며, 뉴욕 타임즈등 유수의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인기 칼럼리스트이고, Alex Tabarrok과 Marginal Revolution이라는 인기 있는 경제학 블로그를 공동으로 운영하고 동명의 온라인 교육기관을 운영하기도 한다.


  미국내에서 복지에 초점을 맞춘 좌파와 감세에 초점을 맞춘 우파와 달리, 70년대 이후 정체된 기술 혁신으로 저성장은 막을 수 없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경기 성장에 기반을 둔 복지와 감세에 비판적인 거리를 두며, 장기적인 저성장에 대비해야함을 주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타일러 코웬은 책에서 "쉽게 따는 과일"이란 비유로 저상장 시대와 이전 시대를 가른다. 저성장에 돌입하기 전 "미국 경제는 17세기 이래 쉽게 따는 과일 - 무상 토지, 수많은 이민자, 강력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급격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무상의 토지로 풍요로움을 확보하고 이로인해, 영리하고 야망을 가진 이민자들-능력 좋은 노동자들을 대거 유입시킬 수 있었고, 그와 함께 발전한 운송수단과 통신수단의 발전으로 인해 경제 규모의 확장과 그에 맞추어 국민들에게 "근대 국가에 대한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또한 19세기 말부터 20세기까지 계속 건설된 산업시설은 상대적으로 이동성이 결여되었고, 때문에 큰 자산은 쉽게 세금과 규제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거대 산업을 중심으로 노동자-국민은 안정적이고 높은 소득을 벌어들일 수 있었고, 국가는 그에 대한 세금을 거두어 들이며 자연스럽게 규모를 키워 나갔다. 이런 급격한 성장에 관료주의가 크게 성장하였고 과학적인 관리의 필요가 대두되었고, 데이터 관리 및 문서화가 발달하였다.


  코웬의 말처럼 "쉽게 따는 과일"들이 지천에 널렸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세계 2차대전은 미국이 아닌 유럽에서 발생하였고, 미국의 영공은 평화로웠고, 그 전쟁은 미국을 선두로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많은 분야의 기술 발전은 재빠르게 미국민의 삶의 양태와 질을 바꾸어 나갔고, 그에 발맞추어 가계 평균 소득은 -1940년대에의 가계 평균 소득은 1970년대에는 두배나 상승- 가파르게 올라갔고, 이와함께 강력한 국가에 대한 믿음은 국민들에게 미래를 담보 삼아도 된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타일러 코웬은 거대 기업 또는 입법자들의 그릇된 선택으로 오늘이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술 발전사, 산업사, 미국 역사 등을 가로지르며 미국민의 마음에 굳건히 서있는 믿음으로 좁혀들어간다. 그 믿음이란 미래를 담보로 삼은 "실제보다 부유하다"는 생각들이다. 이 생각들은 기술 혁신이 정체되었단 문제를 가볍게 만들고, 그 무지에서 출발한 낙관적인 태도가 금융위기를 도래했다고 말한다. 믿음의 기반이 상실되었음에도 그 믿음은 멈추지 않았고, 좀더 큰 리스크들에 뛰어들어 그것들을 파헤치며 성장을 찾아헤맸다는 것이다.


  그 믿음들은 어제와 달라진 오늘과 미래를 간과했다. 타일러 코웬은 좌파와 우파 모두 '기술 혁신'의 정체를 간과한 체 미래로 향하는 헛깨비만 세울 뿐이라고 한다. 또한 GDP로 측정되는 상정 또한 GDP 산출 방식의 한계는 물론 그 상장 수치 또한 이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기술 혁신인 인터넷 산업은 이전 산업과 성격이 많이 다르다고 한다. 거대한 반향과 수익을 이끌어내는 대부분의 인터넷에 기반을 둔 기업들의 직원 수는 이전에 성장을 이끌었던 산업들과 큰 차이를 이룬다. "돈이 되는 참신한 아이디어는 희소하여 그런 아이디어에 대한 권리를 갖는 소수 사람들에게는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보상이 큰" 시대, 그 참신한 아이디어로 사회 전반의 성장을 이끌어갈 수 없는 시대인 것이다.


  타일러 코웬은 이 저상장이 언젠가는 다시 성장세로 돌아 설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그 주축에 미국이 있지는 않을 것이라 여기는 듯하다. 중국과 인도가 급격한 성장으로 축적한 부를 과학과 공학산업에 투자하며 다음 단계의 기술 혁신을 이룩한다는 것, 아직 유아기나 마찬가지 인터넷 산업이 성숙해지며 -지금처럼 현실 도피용으로 사용되며 저성장 시대의 진통제로 쓰이는 것에서 벗어나- 수익 창출과 과학적 발전 창출에 이바지 하지 않을까라며 예상한다. 그리고 희미한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예상은 과학에 대한 투자, 과학의 지위 상승에 기반을 둬야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미국민들에게 위치 조정을 요구하고 있다. 낙관적인 미래를 믿게하던 기반은 정체되었고, 패권국으로써 미국의 지위는 전과는 다름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정치 이념적 선택에 사활을 걸기보다, 어제와 달라진 오늘과 미래를 맞이하는 개인의 태도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분간 미래를 담보 삼는 일을 멈추고 성장의 동력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과거 기술 혁신을 동력삼아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제국들을 언급하지만, 희망을 걸 곳이 거기뿐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다시 어려운 문제로 돌아간다"며 책은 마무리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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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 The Yellow Sea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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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 놀랐다. 예정 크랭크 업을 넘기고 재촬영을 거듭하며 안 좋은 소문을 사방에 뿜어된 영화의 결과물이 추격자의 후진 점만을 확장해 놓은 영화라니. 이야기 자체도 추격자와 별반 다를게 없어서, 추격자를 보았다면 황해는 굳이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건강에도 좋을 것이다.




  만듬새에 한정해서 평가하자면, 추격자는 적당한 매무새의 스릴러라 생각한다. 적당한 이유는 마지막 결투 시퀸스가 상당부분 깎아 먹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홍진은 카메라를 미친 듯 흔들며 격투하는 인물들을 찍는데, 한 장면 한 장면 자세히 보다보면, 막 찍어서 막 가져다 붙였음 알 수 있다. 그걸 감추기 위해, 카메라를 흔들어 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80도 가상선을 대책없이 넘나 들어서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진다. 이런 촬영에 둘 다 똑같은 짐승들이라는 표현이라 치장 할 수 있겠지만, 막 넘나들다가도 곧잘 누가 어떤 포지션에 있는지 정확히 집어 주기에 그 치장에 동의 할 수 없다.




  암튼, 내가 하고픈 말은, 추격자에서 그렇게 후지게 찍은 부분은 마지막 결투씬 뿐이라는 기억인데 반해, 황해에서 그렇게 후진 부분이 굉장히 많다. 인물들이 들러 붙어서 정신없이 다투면 어김없이 출몰하는데, 가장 많이 출몰하는 부분이, 면가와 구남의 부산혈투 부분이다. 일단, 면가의 부하들과 구남이 도끼를 들고 배 안에서 결투하는 씬 보면, 면가의 부하들을 있는데로 몰아 넣어 구남의 위기를 과잉으로 부각 시킨다. 구남은 오대수가 아니어서 이들을 다 때려 죽이지는 못하고 도망쳐야 하는데, 유일한 출구가 잘 열리지 않는 상황이다. 나홍진은 이런 상황을 구남이 구석으로 몰린 (관객들이 애닳아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상태에서 미친듯이 카메라를 흔들어 뭘 찍는지 모르게 하곤 벌컥 문이 열리게 한다. 그 뒤 여차저차 으라차차 해서, 구남은 항구에서 빠져 나와 차를 훔쳐 탄다. 면가는 가지고 온 차를 타고 구남을 추격한다. 역대 카체이스 중 가장 후진데, 우선 카메라가 인물들에게 바싹 붙어 있어 전체상이 그려지지 않는다. 전체 상이 그려지지 않으니, 도로를 역주행하건, 맞은 편에서 차가 오건 긴장감이 생길 일이 만무하다. 그 상태에서 차의 일부분이라 유추되는 무언가를 찍어서 집어 넣는다. 이런 식으로 전체 상을 안그리고, 뭘 찍은지 잘 모르겠는 것을 막 집어 넣고, 쇼트를 미친 듯이 넘기니, 카체이스 후반부 도대체 왜 도로가 개판이 되고, 차가 폭발하는지 알 수가 없다. 뭘 본지 모르니 멍할 수 밖에 없다. 아! 이것은 남한 사회의 혼란을 묘사한 것인가?




  위에서 만듬새가 적당한 영화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영화에 대한 평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추격자를 굉장히 위악적인 영화라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관객이 솟아 오르는 분노를 참고 이야기를 따져 보면, 우리가 분노해서 김윤석을 응원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정우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나쁜 짓을 한다. 그 자식 나쁜놈 맞다. 그런데 김윤석도 사람 치고 다니고, 여아를 위험한 곳 위주로 데리고 다니다 결국 위험에 빠뜨린다. 그나저나 김윤석은 포주이다. 그러니까 하정우나 김윤석이나 개자식이긴 마찬가지인데, 슈퍼에서 서영희가 죽은 이후로 관객은 강력히 김윤석을 응원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김윤석은 마누라라도 잃은 놈 마냥 질질 짜고, 노래는 귀가 아플 정도로 울어된다. 이 상황에서 살며시 바꿔치기를 하는 것이다. 때문에 난 추격자가 쓰레기라고 생각하는데, 황해 역시 그런 점은 꼭 빼다 박았다. 널부러진 수많은 시체들과 엄청난 양의 핏물들. 이렇게 과잉된 이미지들은 서사가 단단하지 못해 구멍이 숭숭난 곳을 못보게 눈을 가린다. 예를들어, 구남은 마누라가 딴놈과 섹스할 생각에 미쳐 사람 죽일 결심한다. 또 있다. 돈에 환장한 면가가 셈에 무뎌지고 자기 파괴적 선택을 한다. 또 있다. 버스 회사 사장은 돈 때문에 권력을 쥔 치졸한 놈인데, 돈으로 해결하면 될 문제를 힘도 없으면서 괜히 괴물 같은 이와 결투할 상황을 만든다. 이렇게 도무지 이해를 알 수 없는 행위들 이후에 썰리고, 조각난 시체들이 너저분하게 스크린을 채우며 눈을 가린다. 이 점은 남한 사회의 포악성을 묘사한 것인가?




  위에 언급한 후진 점들 철떡 철떡 붙여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남한 사회가 더럽다는 것이다. 구남은 교수를 죽이려 빌딩으로 진입할 때, 교수를 죽이러 온 다른 암살자들을 목격한다. 결국 교수는 자신의 운전수한테 살해당하고 구남은 그것을 목격한다. 또는 면가와 버스회사 사장을 죽이러 간 구남은 알아서 죽어 있는 둘을 발견한다. 구남이 마주한 이런 결과들은 남한 사회 어디든 살육으로 덮여 있을 것이라는 일반으로 확대된다. 이런 점을 한 쇼트로 표현한 것을 추격자에서 볼 수 있다. 김윤석이 서영희의 딸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광폭하게 모는 차를, 근처에 정차 중이던 엑스트라3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차안에서 목격되는 장면이다. 이는 저런 괴물의 광폭함이 어디에서든, 누구에게서든 목격될 수 있다는 일반으로 확장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추격자를 보았다면 황해를 볼 필요 없다. 황해에서 그 어떤 쇼트도 저 쇼트만큼의 가치를 품고 있지 않다.




  추격자에 비해 후지지만, 우연을 통해 아수라를 일반으로 확장을 통해, 남한 사회가 더럽다는 것을 표현하려는 점은 황해에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나홍진이 황해를 찍으며 목표로 삼은 것이라 결론을 내리기 전에 우리가 판단해야 할 것이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이 논리를 상실하고 굳이 자기 파괴적 선택을 한다는 점을 다시 상기하자. 중요한 것은 ‘굳이’에 있다. 왜 그들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 뻔한 선택을 하는 것일까? 이 선택에서 극중 인물의 논리는 사라지고 다른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데, 훼손되고 파멸하는 신체를 보고 싶다는 욕구다. 남한 사회의 포악성을 드러내기 위해 시체들을 쌓아 올려야만 하는 것일까? 바로 위 문단에서 언급한 추격자의 쇼트 같은 함축으로도 충분히, 남한 사회가 아귀장임은 드러난다. 영화 후반부에 갈수록 시체는 늘어난다. 시체가 늘수록 관객은 피곤해진다. 이는 남한 사회를 체험한다는 게 육체적 피곤을 동반한다는 게 아니라, 별반 다르지 않은 정보를 끝도 없이 성실히 전시하니 지루한 것이다. 암튼, 시체들이 널부러진 장면이 영화의 반을 채웠는데, 우리가 나홍진의 선택이 남한 사회가 개판임을 드러내고 싶었다는 것을 믿을 것인가?




  불쾌해진 눈과 귀와 머리를 위해 히치콕을 떠올리자. 히치콕은 방대하니 이창만 떠올리자. 이창에서 살해 사건이 결론으로 도출된 것은, 건너 집을 훔쳐보던 주인공이 한정된 장면을 통해 그 결과를 도출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그 결과가 행동이 제약된 주인공이 휠체어 위에서 습득할 수 있는 것만으로 결과를 도출했다는 것이다. 구남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주어들은 것들을 통해, 다른 남자와 섹스하는 아내를 ‘본다’. 난 구남의 꿈이 허접하다고 생각한다. 당신도 그래야 한다. 황해를 보며, 남한 사회가 개판임을 보면 안 된다. 이름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일본의 한 평론가가 영화가 안 좋아지기 시작하면 세상이 안 좋아진다고 했다. 이건 히치콕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때문에 황해를 본 사람들이, 구남이 말하던 개병이 중2허세병임을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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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1-28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공감가는 부분이 많은 리뷰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나홍진 감독... 이래저래 악명이 참 높았는데, 이 영화로 악명에도 정점을 찍었더군요.

딴지는 아니지만, 4번째 문단 6번째줄... 서정희가 아니라 서영희입니다^^;

글샘 2011-01-28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나리오가 좀더 세련됐더라면 그래도 제법 괜찮았을 영화였다고 생각하는데요...
많이 안타까운 작품이었습니다.

mechlab 2011-01-28 09:30   좋아요 0 | URL
상영본을 괜찮은 편집자 손에만 넘겨도 좋은 결과물이 있을텐데 고집을 부리니... ㅎㅎ
 
카페 느와르 - Café Noi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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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워낙 말들에 휩싸여 있는 영화다. 말들의 상당수는 평론가이기도 한 감독 본인의 평론과 인터뷰, 트윗에 걸려있다. 감독의 의도를 존중하는 것은, 영화를 볼 때 좋은 태도이긴 하지만, 감독이 정성일 같은 달변일 때, 영화를 그의 말들에서 뜯어내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한다. 쏟아낸 말들의 양이 방대하고 함의가 워낙 깊어 나같은 사람은 뭉뚱그려 그 말들을 아는 채 해버리면 답이 없다. 예를 들어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책의 리얼리즘'이란 용어를 쓰는데, 이 용어에 대해 인터뷰이가 정확한 답을 요구하여 정리한 것을 읽은 적이 없다. 이런식으로 용어들이 과잉으로 부푼 상태에서 정확하게 정리하지 않고 감독의 진심을 믿을 경우, 영화의 모든 것은 해석해야만 하는 것이 되고, 감흥은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잘 짜여진 생각과 존경할 만한 의도는 감흥이 뒤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지, 앞에 있어선 안된다. 의도가 나쁜 감독은 없다. 이와 같은 이유로, 감흥과 팔짱 낀 의도만을 존중할 생각이다.

  카페 느와르를 본 사람들의 감상 중, 가장 와닿은 말이 있다. 이동진이 언급한 '영화 물리학 실험'이라는 말이다. 그는 '영화라는 매체의 물성에 대해 자연과학적인 방식으로 실험'이라는 뜻으로 그 말을 사용했는데, 그런 느낌이 영화에 진하게 베여 나온다. 그 물리학 실험이 1부와 2부에 따라 다른 태도로 이루어진다. 1부에서는 또렷한 이미지 하나하나를 배열하고, 그 배열을 통해 서스펜스를 일으킨다. 2부에서는 카메라가 담고 있는 공간이나 인물의 체험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예를 들면, 청계천을 직접 걸어서 물리적인 거리와 그 거리를 걸을 때 겪어야 하는 시간을 담는다. 이 두가지 태도는 정성일이 필름 영화와 디지털 영화의 차이를 언급하며 말한, 이미지 메이킹과 테이킹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1부와 2부 모두 디지털로 촬영하긴 하였지만, 이미지가 축조된 모양에서 메이킹과 테이킹의 차이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전하고 싶은 효과를 위해 '만들어진' 쇼트들의 담긴 공간과 인물이 배열될 때 어떤 긴장을 발생 시키고, 우리 주변에 항상 놓여 있던 공간의 어떤 순간이 카메라에 '잡혔을' 때 어떤 느낌을 주는지, 1부와 2부가 차이를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 차이가 영화에 담겨진 서울에 대한 감각이나 사유의 방법에 대한 겹을 만들어 낸다. 이 (영화 물리학 실험이란) 시도로 서울에서의 가능한 영화라는 (하나의) 태가 드러난다.

  재미있는건 그렇게 생긴 겹이 굉장히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2부는 마치 1부의 인물과 이미지, 대사들이 휘저어져 펼쳐진 모양새를 띄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휘저어졌다는 것인데, 1부에서 a란 인물이 b라는 말을 했다면, 2부에서 c라는 인물이 b라는 말을 한다. 대사만이 아니라, 1부에서 한 인물의 상징적인 태도나 의상 따위가, 2부에서 전혀 다른 인물의 태도가 되고 의상이 된다. 영화는 이런식의 게임을 벌이면서, (누가 언급한 것인지 잊었지만) 2부가 마치 1부의 꿈처럼 느껴지게 한다. 이런 연결들이, 1부의 중심적인 공간과 2부의 중심적인 공간 차이 속에서 상징들이 미묘한 차이를 내며, 공간에 대한 사유를 촉진시킨다. 영화 후반부, 김혜나가 예수의 부활은 보는 사람에 맡긴다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은 에필로그의 소녀의 배에 잉태된 아이의 탄생보단, 1부가 2부의 꿈인지, 아니면 그 역인지에 대한 게임에 붙어야만 한다.

  공간에 대한 사유의 촉진은 문어체 대사에서도 발생한다. 대사들이 구어가 아니라 문어이기 때문에, 배우들의 입에서 헛도는 느낌이 발생한다. 익숙치 않게 들려오는 말들에서 흥미로운 것은 불균질함이다. 배우들이 문어체 대사 전부에 어색해하는 것이 아니 점인데, 어떤 대사는 자연스럽게 뱉으면서도, 어떤 대사는 어색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렇게 발생하는 불균질함이, 갑자기 빙의되어 방언을 쏟아내는 느낌을 준다. 마치 서울이라는 공간이 강요하는 말 같다는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카페 느와르 속 말들은, 방언과 같이 말을 뱉는 당사자의 것이라기 보단 다른 주인을 지니고 있는 뉘앙스를 준다. 예를 들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편지 같은 경우, 그 편지의 내용과 교차하여 어긋나는 나레이션은 물론이고, 편지 앞 쇼트의 인물과 뒷 쇼트의 인물이 편지의 주인인지를 애매하게 만들어 놓는다. 영화 속 상당수의 말은 이렇게 주인 잃고 떠돌며 쏟아져 내리는데, 이런 점이 영화의 공간인 서울의 공기나 소음 같게 느껴지게 한다.

  위와 같이 영화는 2008년 서울을 흥미롭게 담아내지만 그것이 균질하지는 못하다. 최근 맥스뉴스에서 정성일이 아핏차퐁의 영화들을 일컬으며, 아이디어로써 흥미롭다는 언급을 했는데, 카페 느와르에서 느껴지는 아쉬움들이 그와 같은 것 같다. 아이디어나 의도의 아름다움은, 몇몇 쇼트의 적정 길이를 찾지 못하였는지 부분들은 아주 추한 모양새이다. 데드타임을 넘어선 장면들이 문제가 아니라, 쇼트가 지속되어야 할 시간을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끝난 미숙한 장면이 문제다. 청계천 맵핑을 위해 등장시키는 지도. 서울의 하루를 고스란히 찍거나, 청계천의 하루를 고스란히 찍어내는 장면. 이런 장면들은,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앞서서, 죽어 있는 텍스트는 선명하게 드러남에도 감흥은 죽어버려 고루한 인상이 짓다. 특히, 문정희의 딸이 연극의 연출 의도를 김혜나의 입으로 전하는 장면은 촌스러움의 극치였다. 데뷔작을 찍은 감독의 안절부절함의 표출이랄까? 이런 지점들이 감독이 요구하는 교양이, 영화의 고루한 지점들을 요구한 교양이 지닌 아우라로 덮으려는 인상만을 줄 뿐이다. 허우샤오시엔의 쓰리타임즈가, 1부를 통해 2부를 보고, 1부와 2부가 쌓여진 눈으로 3부를 보고, 영화가 쌓여진 눈으로 (개봉 당시) 대만의 현실을 본다는 교양이 없다고 영화의 감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사방에서 서울의 낯선 모습을 보았다고 신기해 하는데... 뭐가 낯설지? 서울이 이정도로도 이상하지 않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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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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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었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천명관이 '고래'를 쓰고 얻은 찬사는 김연수도 들어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소설 속에 묘사된 고통들이 굉장히 피상적이라는 사실이다. 왕성하게 쏟아져 내리는 이야기들에 대한 감탄과 왕성하게 쏟아져 내린 이야기에 휩쓸려 버리는 고통들에 대한 아쉬움. 번뜩 든 두 생각 중 후자를 자꾸 곱씹게 되었는데, 지금보다 좀 더 좋은 소설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의 고통은 굉장히 피상적인 영역에 고여 있다. 시대가 인물들을 옥죄고, 그 시대에서 파생된 물리적인 폭력이 인물들에게 내려앉을 때의 묘사가 굉장히 멀게만 느껴진다. 여기서 멂은 육체로부터 멂을 뜻한다. 묘사되는 고통과 그 고통을 주는 시대가,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 시대를 거닐어야 하는 육체와 머니 피상적인 영역에 고여 있기만 하였다. 소설 속 고통이 육체와 멀다는 생각은, 두 번째 읽었을 때 좀더 자세히 곱씹을 수 있었다.

  소설을 두 번째 읽는 도중 김연수란 작가가 뱉은 말들을 주워들었다. 그는 남한사회에서 자신이 쓴 소설들이 후일 분단문학으로 한정되는 것을 지양하고, 그래서 자신은 세계문학을 지향한다라고 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도, 그의 의지의 흔적들을 볼 수 있는데, 소설 속에서 강박적을 반복되는 테마와 중후반부의 무대가 되는 독일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에서 착실하고 꾸준히 혹은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history에 가려진 story를 앞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우리에게까지 도달한 역사에는 개인들의 서사가 설 자리가 없다. 김연수는 그것이 하나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소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역사들은 개인들을 억압하는 폭력과 핍박으로 작용한다. 작가는 개인의 서사를 그려내면서 서정성을 부각시키는 데, 그 서정성이 한껏 부풀어 오를 때쯤, 역사적 사건을 침범시켜 서정성을 붕괴시킨다. 이렇듯 역사는 개인을 억누르는 하나의 방해물로써 작용한다. 이때 역사는 사유의 대상될 수 없게 된다. 오롯이 방해물일 뿐이다. 혹은 조영일 문학비평가의 말처럼 단순한 '배경'이 되고 만다. 즉, 소설이 내세운 역사가 무엇으로 바뀌든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인물들의 고난을 부각시켜 독자의 (감정적)몰입을 부추기는 장치일 뿐이니까. 이 지점에서 소설 중후반부의 주무대인 독일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소설의 주요 무대인 독일 또한 작가의 지향점을 드러낸다고 했다. 작가가 소설의 무대를 독일로 옮긴 것은 아마도 남한 혹은 한반도라는 로컬의 한계성을 벗어나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굳이 독일을 끌어들인 이유이다. 한반도란 로컬을 피하기 위해 독일로 무대를 바꾼 소설은, 독일이란 로컬 또한 거세해버리고 만다. 주인공은 굳이 독일까지 가서 성실하게 강시우란 남자의 과거를 읊는다. 독일까지 가서 끊임없이 과거로, 한반도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이국에서 조국을 사유하는 것도 아니다. 독자에게 그려진 독일이란, 유럽의 숲, 헬무트의 집, 아우슈비츠 등의 피상적인 '이미지'들뿐이다. 작가는 한반도란 한계에서 벗어날 보편의 장인 외국이 필요했을 것이고, 만국민이 통감할 수 있는 아우슈비츠라는 스펙타클이 필요했을 것이다. 세계문학에 닿으려는 의지가 보편에 대한 강박을 낳았고, 그 강박은 모든 경계를 허물어 소설이 품은 역사와 국가를 단순한 배경수준으로 전락시킨 뒤, 원론적인 주장을 성실하게 반복한다.

  여기서 소설 속 고통이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자신이 존재함을 반짝이며 드러내는 수많은 개인의 서사들과 쌍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역사들. 주목할 것은 양이다. 역사적 사건이 양으로써 쏟아지기 시작할 때, 각각의 역사에 대한 사유와 개인과 역사의 상관 관계 등을 전개할 수 없다. 이때, 독자는 소설이 담고 있는 역사들을 뭉뚱그려 하나의 인상 밖에 얻을 수 없게 되고, 성찰의 대상이 아니라 교양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품고 있는 주장이 당연한 것일 때일수록, 형식에서 성찰의 흔적이 담겨 있어야만 하는 데, 형식 또한 주장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층위에서 진행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작품의 겹을 더하기 위해, 이런 저런 인용들을 끌어오는 데, 작가는 여기에서 자신의 독자층을 설정해버리고 만다. 그렇게 설정된 독자층이 소설에게 원하는 재미는, 소설에서 언급된 브레히트의 에피소드가 주는 재미이다.

"(한 여자와 자는 게 좋은지 두 여자와 자는 게 좋은지)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지금 이 사람과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으니까요."


  교양의 전시, 그 전시를 향유할 수 있는 이들, 그들의 향유를 충족시키기 위한 그럴싸한 목록 작성. 이때 작가가 어디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지 드러난다. 로컬이란 경계를 삭제해버린 포부는, 작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 버려야하는 지점에서는 사라지고 만다. 과거에서 과거로만 이동하는 이야기, 피상적으로 그려진 이국 풍경, 촘촘하고 성실히 기록한 놀랍고 관심을 끄는 역사들의 나열, 적재적소 위치한 인용들. 그는 아마 서재에 고여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삶으로써 쓰여진 것이 아니라 앎으로써 쓰여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소설이 별자리를 언급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반짝이는 책들과 자료들이 한데 모인 결과물이 소설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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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러스 크로싱 - 할인행사
조엘 코엔 외 감독, 가브리엘 번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나는 장르에 대해 궁금할 때 코헨들에게 간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장르의 나선에 대한 생각들을 할 때, 코헨들을 생각한다. 코헨들의 영화에 꾸준히 나오는 원과 원 운동이라는 기호는, 내게 철저히 장르의 나선이란 의미로 다가선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밀러스 크로싱은, 어떻게 장르 관성에 대처할 것인가에 관한 영화이다.

  밀러스 크로싱은 필름 느와르에 대한 패티시가 흘러넘치는 영화이다. 이야기 또한 장르 컨벤션을 가지고 유희한다. 보스가 나오고, 보스의 여인이 나오고, 보스의 여인은 팜므파탈을 자처하고, 주인공과 보스의 연인은 밀애관계이고, 보스는 연인의 요청에 눈이 멀어 나쁜 선택을 하고, 주인공 또한 보스의 연인과의 관계로 위험에 처하는 등등, 어떤 면에서 볼 때 창조에 대한 욕심이 없어 보이기까지 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밀로스 크로싱은 그리 녹록치 않은 영화인데, 장르의 컨벤션이란 이야기와 컨벤션이 요구하는 선택들에서 점점 멀어지는 이야기가 맞물려 진행되기 때문이다.

  맞물리는 두 이야기의 구분 점은 인물들이다. 장르의 관성에 등 떠밀리는 인물들의 선택의 논리는 결국, 장르의 논리이다. 그들은 적절한 타이밍에 웃고 화내고 총격전을 벌이고 죽는다. 예를 들어, 경철서장과 시장이란 캐릭터들은, 권력의 정점에 선자가 누구이건 때에 맞추어 아부하러 가고, 권력자에게 대항하는 갱을 처단하기 위해 때 맞추어 진압에 나선다. 관성적인 움직임이 이들을 하나의 톱니바퀴로 만들어 버리고, 이들의 행위들은 장르라는 하나의 기계를 보게 인도하고 기계의 꾸준한 관성을 보게 한다. 적절한 순간 적절한 곳에 버니로 여겨지는 시체가 등장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톰은 버니를 죽인 적이 없었고, 살려준 버니는 그에게 찾아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사실로 협박까지 한다. 그 때문에 톰은 죽어야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한 구의 시체가 그를 구원한다. 나중에야 그 시체가 스티브 부세미의 것임을 알게 되지만, 시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그 장소 그 시간에, 어떤 시체이건 그 자리에 놓일 것이다. 장르는 성실하고 꾸준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톱니바퀴들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은 주인공 톰이다. 톰은 여기저기 기웃되면 정보를 수집하고, 수집한 것들에 대해 말한다. 그 정보를 통해 조직의 방향을 정하고, 자신의 안위를 지킨다. 톰의 행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보는 자의 위치에 머문다는 것과 그가 사건에 개입할 때 하지 않는 행동들이다. 그는 돈을 쫒지 않고 총을 쏘지 않는다. 엄청난 도박 빚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보스들의 도움의 손길을 뿌리친다. 버니를 죽이기 위해 총을 쏘지 않는다.

  필름 느와르 장르의 법칙을 무식하게 정의하면 '총과 돈을 탐하는 자 죽음을 맞나니'라고 할 수 있겠다. 톰의 위치와 그가 하지 않는 행동들은, 그가 장르의 나선에 안착하지 않았음을 혹은 안착하지 않으려 함을 보여준다. 장르의 나선 밖에서 모든 것을 보는 남자가 바로 톰이다. 그런 톰은 자신이 살려준 버니를 처단하기 위해 총을 쏜다. 하지만 이것이 톰의 일관된 논리를 벗어난 선택은 아니다. 죽었어야할 인물인 버니가 톰을 찾아온 뒤, 톰을 수라장에 끌어들이고, 그런 버니를 처단하기 위해 달려드는 톰의 시도는 좌절된다. 그때 버니는 톰에게 "자신이 살려달라고, '다시' 애원하면 놓아 줄 것"이라며 호언장담한다. 이 말은 톰의 선택이 관성에 수렴되었다는 선언이다. 톰은 이 때의 깨달음을 잊지 않은 것뿐이다. 그러니 톰의 발포는 그 관성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장르의 관성에 대항하는 톰은 시종일관 사람의 겉모습만으로 속마음을 볼 수 없다고 단정하거나 질문한다. 그때 상대편들은 자신만만해 하며 상대의 속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 차이는 토대의 차이이다. 장르의 나선에 안착한 이들은, 순환의 논리만 알면 되고, 그것이 다른 안착자들의 다음 행위를 예상안으로 가두어 둔다. 하지만 장르라는 타성을 거부하는 인물인 톰은 당연히 그들의 속을 모른다. 알 것은 알고 모를 것은 철저히 모르는 남자 톰은, 필요한 앎과 모름으로 인해 수렁에서 빠져 나온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 시퀸스로 간다.

  보스는 제 자리를 찾고, 버나는 그와 결혼하기로 했다. 모든 사건들을 건너온 톰은 결국 조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보스와 버나는 떠나간다. 아마도 버나는 결혼 생활에 질려 어리숙한 남자하나를 끌어들이고, 그 남자는 버나를 차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보스를 속이려 들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는 결국 밀러스 크로싱의 그 장소에서 그 시간에 시체로 발견 될 것이다. 톰은 그것을 알고 있단 표정으로 떠나가는 보스를 바라본다. 나는 톰의 시점 쇼트인, 떠나가는 보스를 담은 쇼트에, 영화 속에서 잉여로 남아 있던 쇼트가 디졸브 한다. 영화의 타이틀 롤이 뜰 때, 나오는 세개의 쇼트들. 숲에서 하늘을 수직으로 바라보는 두개의 트래킹 쇼트와 바람에 유려히 날아가는 모자를 담은 쇼트. 앞의 두 쇼트는 버니의 시체를 찾으러 간 밀러스 크로싱에서 설명이 되었지만, 뒤의 쇼트는 설명되지 않은 체 남아 있다. 우리는 이 쇼트를 톰의 시점 쇼트에 디졸브 해야 한다. '바람'에 날아가는 모자, 타성에 움직이는 기호, 장르의 관성에 실려 나가는 보스. 우리가 밀러스 크로싱을 본다는 것은, 톰의 위치에 서서 저 무기력하게 날아가는 모자가 자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성에 의해서 날아감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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