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기타무라 류헤이 감독 / 소니픽쳐스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무슨 이유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느 여름 가족은 어딘가로 여행을 갔고 혼자 집에 덩그러니 남아있던 적이 있다. 어린 나이에 혼자 밤을 보내게 되었다는 흥분에 사로잡혀 한참 신났지만 그 흥분은 다음날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텅 빈 집에 혼자 남게 된 나는 브라운관을 통해 <캔디맨>과 조우하게 되었다. 19세 미만 제한이란 표시가 붙어 있었지만 집에 덩그러니 남아있던 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지킬 여력이 없었다. 영화를 복기하는 능력이 좋지 않은 편이지만, 또 본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캔디맨>의 장면들은 아직까지도 선명하다. 그만큼 충격이었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음침하고 폭력적인 기운이 가득한 할렘가에서 가냘픈 백인 여성이 흑인 거구에게 사로잡히는 그 과정들은 집에 혼자남아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절망적이었다. 캔디맨을 세 번 읊조리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갈고리를 힘껏 쥔 체 등장하는 캔디맨은 공포란 단어 따위로 단정지울 수 없었다. 창문을 깨 부서고 날아들어 왔을 때, 입에서 벌들을 쏟아낼 때, 헬렌이 캔디맨의 뒤를 잇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선명하다. 항상 아메리카 드림했던 상상 속 미국은 그 날 밤 이후 사방팔방 출몰하는 캔디맨으로 인해 아메리카 나이트메어, 그 자체가 되었다. 지금 다시보면 그때의 공포가 그대로인지는 모르겠다. 암튼 캔디를 먹는 것을 한동안 멀리하게끔 만들었던 <캔디맨>의 중심에 클라이브 바커가 있다.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 또한 클라이브 바커의 영향이 크다. 기타무라 류헤이가 감독에 당당히 이름을 새겨 놓고 있지만 도시의 음침한 폭력성, 늘러 붙는 피의 질감, 부패한 시체의 역한 느낌을 코끝에 살려내는 피칠갑의 문체가 가득한 그의 책에서 볼 수 있듯 영화의 세계관은 오롯이 클라이브 바커의 것이다. 그리고 기타무라 류헤이나 클라이브 바커 또한 온갖 인터뷰에서 공공연히 그 사실을 밝히고 있고 인정하고 있다. 원작과 영화는 이야기의 큰 골자는 같다. 단지 레온의 직업만이 의미 있게 바뀌어 있다. 도시를 촬영하는 사진작가 레온은 범상치 않은 외모를 지닌 마호가니를 발견하고 추격한다. 그 추격의 과정에서 지하철 안에서의 마호가니의 범행을 목격하고 범행현장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추격하는 과정에서 친구와 연인을 잃고 결국 자신은 마호가니의 뒤를 잊게 된다. 원작의 눅눅하고 비릿한 도시의 광기를 영화는 온전히 구현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레온의 설정의 변화로 인해 원작의 음침함은 이어받게 되었다.




  레온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도시의 이면, 단정하게 찍힌 홍보사진 같은 것들 뒤의 도시의 진실과 그 폭력성을 촬영하는 사진작가다. 그는 다른 이들이 도시의 진실을 찍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도시의 진실을 찍는다고 말한다. 그것을 입증하듯 그의 카메라에 잡히는 피사체는 걸인, 폭력배, 도살된 소, 도살 과정, 피곤함에 절어 있는 얼굴을 한 노동자들뿐이다. 레온은 도시의 단정한 모습이 가리고 있는 곳을 향해 렌즈를 들이밀고 셔터를 누른다. 그런 레온은 첫 등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을 들여다보듯 응시한 후 관객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밀고 촬영한다. 마치 도시의 이면에 가려진 것들처럼 우리를 촬영하는 것이다. 도시의 이면을 파헤치는 레온의 눈에 우리는 도시의 감춰진, 그 이면의 음침한 것들에 속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관객들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외양과 행동으로 오프닝부터 시작될 살육을 관람하기 위해 극장의자에 버티고 앉은 것이다. 희생자가 늘어갈수록 관객이 원하는 바는 이루어지고 쾌감은 증폭되고 더 많은 시체를 요구한다. 우리는 전혀 단정하지 않다.




  경찰을 부르지도 않고, 위험함에도 끈질기게 마호가니의 뒤를 따라 붙는 레온의 모습은 결국 관객인 우리의 모습과 같다. 레온이 위험을 자처하고 경찰을 부르지 않는 비논리적 행태를 보면서 우리는 멍청하다고 레온을 욕은커녕 레온의 위험한 행동의 다음 사건을 간절히 기대한다. 레온이 목격하고 카메라를 들이밀 살육의 현장에 대한 기대감이 우리가 느끼는 공포 뒤의 진실 된 모습일 것이다. 경찰과 연인이 왜 그 위험한 현장에 열중하고, 그 현장을 방관한 체 단지 카메라의 셔터만 눌렀냐고 묻지만 레온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레온이 입을 다물고 있음에도 관객들은 훤히 레온의 심경을 알 수 있다. 관객의 심경이 레온의 심경과 같기 때문이다. 뻔히 고통스러울 것을 알면서 그 고통 뒤에 찾아오는 아릿한 쾌감 때문에 딱딱하게 앉은 딱지를 뜯는 것처럼 공포가 품고 있는 쾌감에 대한 욕구가 레온을, 우리를 살육의 현장에 집착하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레온이 침묵한 답을 뻔히 우리는 뻔히 알지만 그 답을 함부로 내뱉지 못한다. 그 답을 말하길 주저하게 하는 쾌감이란 도시의 단정한 모습 뒤에 가려진 도시의 참된 모습과 같은 것이다.




  살육된 인간을 싣고 전철이 도착한 곳은 마호가니가 일하던 도살장의 아래다. 그 아래서 희생자들은 게걸스럽게 수용되고, 그 살육의 장을 기반에 두고 세워진 도시는 희생자가 섞여 있을 것만 같은 도살장의 고기들을 수용한다. 살육의 기반으로 도시는 순환된다. 영화 말미 살육 전철을 운행하는 기관사는 희생자들을 먹어 치우는 존재들은 자신이나 레온 등이 생성되기 전부터, 그 참혹한 도시를 품고 있는 세계가 생성되기 전부터 그곳에 존재했다고 한다. 그 존재들은 태초부터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의 세계의 살육을 원하고 그곳에 존재 했던 것이다. 그 게걸스럽고 탐욕스러운, 어둠에 가려져 희미하게 들어나 보이는 존재들은 컴컴한 극장안의 관객들이다. 관객들은 레온이, 마호가니가, 살점이 엉겨 붙은 헤머가, 살육의 현장이 스크린에 투사되어 살아 움직이기 전부터 존재했다. 그리고 그 관객들이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의 세계에 바라고 보고 싶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한 것은 살육의 현장이었다. 관객은 살육의 장에 기반을 둔 채 살육의 현장을 방관하는 도시인(여형사, 기관사)이며, 그 살육의 현장에서 시체를 수용하며 욕망을 채우는 어둠속 존재들인 것이다.




  결국 레온은 기관사에게 혀가 뽑힌 체 마호가니의 뒤를 잇는 운명을 맞게 된다. 그것은 운명이다. 그리고 이 반전이 그리 충격적이지도 않고, 또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다. <캔디맨>의 과정과 비슷해서가 아니다. 레온이 마호가니의 뒤를 이었음을 들어내는 엔딩 씬은 오프닝 씬의 앞부분이다. 오프닝에서 마호가니로 착각한 이는 다름 아닌 레온이었던 것이다. 오프닝의 기발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레온과 마호가니를 동일시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오프닝의 그 남자를 마호가니라 착각하고 안심하며 살인마라고 염원한 것이다. 그리고 오프닝에서의 남자가 살인마이길 바란 염원은 이루어져 레온은 마호가니의 뒤를 잇게 되었다. 그렇기에 운명이다. 처음부터 우리는 그 남자가 살인마임을 바랐기 때문이다. 마호가니의 뒤를 이은 레온은 혀까지 뽑힌 살인마다. 살인마의 사정이나 심경이 어찌되었든 알고 싶지 않다. 단지 살육을 이어가란 주문의 결과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바란다. 영화 엔딩에서 그렇지 않냐며 레온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낸다. 어둠에 속에 숨어있는 관객들, 살육을 적극 수용할 관객들이 있기에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의 세계는 가동 될 것이다. 레온이 촬영하던 쾌쾌한 뉴욕 못지않게 쾌쾌한 서울, 도살된 미국 소가 공포의 촉매제 역할을 하는 뉴욕 못지않게 도살된 미국 소가 공포를 일으키는 서울, 그 서울의 극장 속 어둠에 있는 우리는 살육을 원한다. 거참! 이 발칙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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