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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광우병을 말하다 - 최신 연구로 확인하는 인간광우병의 실체와 운명
유수민 지음 / 지안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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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올해 초 톰의 친구인 제리스러운 별칭으로 호명되고 있는 대통령께서 한미fta를 성공시키려는 목적으로 미국 소에 대한 개방을 실행하셨다. 졸속 협상으로, 광우병에 대한 리스크를 너그럽게 떠안는 협상이었기에 국민들은 광분했고 거리로 나가 촛불공장들의 수익을 마구 올려 주었다. 그때부터 ‘소’, ‘광우병’등은 정치적 사안을 끌고 올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하사받게 되었다. 그 단어들을, 순수하게 생물학적이든 수의학적이든, 종목 자체에만 집중하더라도 그 결과물들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사안과 맞물리게 된 것이다. 그 단어들이 그러한 운명을 부여받고 반년이 지났다. 거리의 사람들은 ‘촛불공장들 도움 주기’에 관심이 없어졌고, 이순신장군님 동상 밑의 어여쁜 산성 또한 사라졌고, 집회도 집중적 대규모에서 분산적 소규모로 변하였다. 그리고 이 시점에 광우병 관련 서적 하나가 출간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시기에 나온 것이 잘되었다고 생각된다. 광우병 파동이 활성화였던 당시 많은 광우병 서적이 나왔지만, 사건의 중심에서 그 책들은 상대편에 대한 반박 도구로 소비되었다. 개인적으로 그 책들 속 광우병을 광우병으로 읽으려 해도 자꾸만 ‘대통령 개자식’으로 읽혔다. 격양된 감정이 많이 가라앉은 지금 광우병에 대해 차분히 다가가 이해한 다음 우리는 파동의 본질로 이동하면 된다. 워낙 과잉의 에너지를 쏟았기에 잠시 휴식기를 가져야 할 지금이 광우병에 대해 정리하가 수월한 시기다. 그런 지금 ‘과학이 광우병을 말하다’가 나왔다.




  책의 내용은 광우병 자체에 대한 이야기만 다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발생원인, 감염과정, 경로, 진행되고 있는 실험, 발병 조건, 대책 등을 서술하고 있다. 책 속 광우병이 아닌 다른 곁가지들은 광우병의 이해에 대한 다른 각도의 시선이고, 결국 모든 포인트를 광우병에 맞추려 한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힌 것처럼 정치적인 것에서 떨어져 과학적 사안에만 초점을 맞추려 노력했음이 보이기는 한다. 허나 과연 얼마나 정치적인 것과 멀어졌을까?




  책을 읽고 있으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책의 구성이 두 가지를 해체시키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광우병 파동 당시 과장된 정보이다. 광우병 파동 당시 과장된 정보를 해체하기 위해 책은 중요히 부각된 정보들을 하나하나 짚어서 과학적 근거를 되며 사실을 제시한다. 책에서 제시하는 사실들에는 ‘고열에도 변형CJD가 없어지지 않지만 위험도가 현저히 준다’, ‘산발성CJD 중 변형CJD가 있을 수도 있다. 허나 확실하진 않다’, ‘소의 근육 부위에도 변형 프레이온 단백질이 있긴 하다. 허나 다른 부위에 비해 극소량이다.’, ‘한국인 유전자의 특성인 M/M형의 변형CJD에 대한 위험도가 높은 건 사실이지만, 광우병에 저항성이 있다고 보이는 G/L형도 함께 있기에 안전할 수도 있다.’ 등이 있다. 해체하기 위해 노력하는 또 다른 하나는 전염 가능성이다. 책의 1부의 구성은 광우병을 일으키는 변형 프레이온 단백질과, 광우병이 대량으로 발생한 영국의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고, 감염 가능성에 대한 해체는 1부 이후부터 책의 마지막장을 덮을 때까지 함께한다. 1부 이외의 전염 가능성 해체를 위한 2부, 3부, 4부는 결론적으로 수치 놀이다. 광우병 소 섭취로 인한 감염률, 서양과 동양의 감염률, 종 간 장벽으로 인한 감염률, 조리 방법으로 인한 감염률, 개월 수에 따른 감염률, 예방 시스템 유무에 의한 감염률 등 수많은 수치들로 수놓아져 있다. 1부의 식인문화를 지닌 쿠루족의 자극적 사례로 시작해 위험성을 팽창한 책은, 이후 미세한 단위의 감염 확률로 위협적이던 광우병의 위신을 끌어내린다.




  자! 이 해체의 과정과 결과에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어찌되었든 ‘감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과장된 괴담으로 알려진 것들이 근본적으로 사실에 근거하고, 눈 돌아가게 꼬아놓은 수치놀이의 결과 또한 감염 위험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결국, 광우병 사망자의 전부를 차지하는 M/M형 유전자를 보유한 한국인이 광우병 통제국의 30개월 미만 소의 등심을 고열에 구워 먹어도 감염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다.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CJD, BSE, RNA, TSE, 단백질 유일 가설, 코돈, 리보솜, 안티코돈, 겸상 적혈구 빈혈증, 메치오닌 등의 익숙하지 않은 용어의 숲을 지나 온 것이다. (이렇게 익숙하지 않은 용어의 숲은 다소 위험한데, 집중해 읽지 않는 이상 그 용어들의 숲에서 눈에 익숙한 단어만 끌어안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익숙한 단어들이란 결국 ‘안전하다’, ‘감염률이 내려간다’ 등이다. 그렇기에 이 익숙하지 않은 용어의 숲의 힘든 여정에서 핵심을 잃고, 결국 익숙한 단어들로 결론지어질 가능성이 있다.)

  

  우리에게 ‘감염 가능성이 있다’라는 불변의 진리와 함께 남은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굉장히 적은 확률’의 감염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광우병 파동 당시 유행한 로또 확률 비교설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 보자. 감염 확률이 적으니 안심하고 먹으라는 것은, 로또 당첨 확률이 굉장히 적으니 안심하고 사지 말라는 논리와 같다. 어찌 되었든 결과는 어떠한가? 결국 누군가 당첨되어 인생역전을 하게 되고, 결국 누군가 감염되어 인생 역전을 하게 된다. 광우병 같은 경우, 사안 자체가 철저히 인재이기 때문에 굉장히 낮은 확률임에도 걸린 놈, 재수 없는 놈으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위에 언급한 해체의 과정 속에 위험하게도, 확률 문제를 성립하기 위해 논리적으로 비약하는 부분들이 몇 개가 있다. 이러한 것들이 위험한 까닭은, 저자가 위험도를 대폭 줄이기 위해 사용되는 가정들이기에 중요히 짚어야 할 듯싶다. 개인적으로 두 가지가 큰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본다.

  첫째, ‘CJD 질환 발병률이 동양인이 서양인에 비해서 더 높은지를 조사해보는 것이 합리적’이라하며, 조사 결과 M/M형이 동양인이 현격히 높음에도 CJD 감염률이 서양과 비슷한 추세임으로 변형 CJD에 대한 감염에 대해 크게 호들갑 떨 것 없다고 한다. 허나 이는 ‘동양인의 M/M형 분포가 서양인에 비해 현격히 높아 위험하다는 것’을 희석시키기 위한 비약이다. 이 전제가 비약인 이유는 동양인이 영국의 사례 같이 광우병 감염 위험도가 높은 조건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광우병이 걸린 다량의 소가 주위에 없고, 오염된 육골분 사료가 유통되지 않기에 한국인의 감염률이 낮다고 언급하면서, 서양과 동양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둘째, ‘광우병 소가 없는 나라는 산발성 CJD가 없거나 극소수여야 하고, 소고기를 먹지 않는 나라에서는 산발성 CJD가 없거나 극소수이고, 결국 산발성 CJD가 발병한 나라는 광우병 소가 있고, 전 세계적으로 산발성 CJD가 발병했기에 광우병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세계적으로 만연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 또한 논리적 비약이다. 이 비약이 등장하기 전 저자는 분명 산발성 CJD가 변형 CJD일 수도 있다는 가정은, 산발성 CJD라고 확진된 사례 중 오진이나 산발성 CJD로 보이지만 원인은 변형 프레이온 단백질에 의한 발병일 수도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비약은 ‘모든’ 산발성 CJD가 ‘무조건’ 변형 CJD라는 전제하에 도출되는 것이기에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책의 후반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텍스트를 언급하는 장이 있다. 일병 한명을 위해 많은 이의 희생을 감수한다는 영화의 텍스트를 언급하며, 현재 광우병에 대한 조치가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는 것이다. 낯 뜨거운 예지만 남한에서는 어떻게 적용되었을까? 저자의 뜻대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텍스트가 적확히 맞아 떨어지기 위해선 외교적 압박 등에도 불구하고 광우병 소의 유입 가능성이 있는 미국산 소를 들여와 감염률을 높이는 것을 반대 했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조국은 많은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반드시 지킨다는 본래의 영화 텍스트에 적합한 것이다. 허나 그 텍스트가 남한에선, 많은 희생을 감수한 것은 국민이고, 지켜낸 것은 ‘설치류’의 명예와 성과다. 그런 상황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끌고 오는 것은 스필버그 얼굴에 ET똥을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오인된 사실을 바로 잡으려 사투를 버리는 것이기에, 나도 흔히들 오해하고 있는 사실을 언급하고자 한다. 광우병 파동이 일어난 핵심은 ‘개인의 성과를 위해 국민의 생명을 함부로 담보 했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이 책의 불변의 진리가 ‘어찌되었든 결국 감염가능성이 있다’와 같은 광우병 파동의 불변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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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問 라이브러리 5
강수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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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쟁이란 현재 남한에선 사람들의 삶에 가장 가까이 다가와 있는 단어일 것이다. 아니 너무 가까이에 있어 그것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경쟁과 친숙하지 않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시점으로 보았을 때, 경쟁과 친하지 않다는 것은 게으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당연히 받아들여야 됨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경쟁’이란 단어는 우리의 삶의 온갖 군데에서 패악을 부린다. 그 패악이 너무도 지독하기에 우리는 경쟁이란 단어를 구체적으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학교, 직장, 가정, 동호회 등 우리는 경쟁에 참여하고,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을 순위 매김 하여 가치를 측정했다. 그것은 경쟁의 수위가 적절할 때 당연한 듯 여겨졌지만, 한계로 내몰자 우리는 그것을 생각해야만 했다.




  강수돌의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는 경쟁에 순응하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파고 드려한다. 책은 우리가 경쟁을 ‘당연시’여기며 무엇을 잃고 있는지, 경쟁에 순응함으로 어떠한 결과물들을 불러오는지 제시한다. 수많은 자료들에 열거된 현실은 이제는 많이 익숙하긴 하지만 여전히 씁쓸하고, 여전히 참혹하다. 시험이 옭아매어 경쟁에 순응해야만 하는 학생들이 배우지 못하는 것들, 경쟁 체제에서 밀려나 실업자들과 그 경쟁체제에 참여하기 위해 발악하는 취업지망생들의 모습, 경제의 경쟁구도를 강화하는 기업의 폐악, 전 세계를 시장으로 환원하려는 신자유주의가 말살하는 국가들의 모습은 과장이 아닌 우리가 사는 세계의 자화상이다. 책은 그러한 수많은 이미지들을 모자이크하여 우리 세계의 자화상을 그린다. 하지만 책은 그 모자이크의 투박함을 미학으로 승격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라는 야심찬 제목에도 불구하고 책 자체는 매우 앙상하다. 수많은 자료와 실증들과 학자들의 발언이 빼곡히 차있어 그만큼 신빙성이 높고, 상황이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허나 신빙성이 높아지고, 상황이 구체적으로 그려질수록 책의 저자의 존립은 희박해 진다. 수많은 자료들이 늘어져 있지만 그것을 응집해 하나의 그림을 만들지 못하고 재료만 나열한 꼴이 되어버렸다. 또 그 자료들이 내미는 것들이 여러 곳을 통해 유포되어 수용된, 눈에 잔뜩 익은 것들만이 주를 이루고 있기에, 그 가치가 발하는 빛은 한없이 약해진다. 그러한 자료들에서 강수돌이 목소리가 발언되는 곳은 한결같이 ‘자기개발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론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책의 응집력은 한 없이 떨어진다. 결국 이 책은 강수돌의 자료 정리집 수준에 머물고 만다. 야심찬 제목이 주던 기대감에 한참 못 미치는 결과이기에 못내 아쉽다.




  이 책에서 가장 기분 나쁜 대목은 저자의 어머니의 죽음을 회고하는 대목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대목이 있어야할 이유를 알 수 없다. 단지 암 투병 수기와 같은 역할을 하며, 감정을 자극할 뿐이다. 저자가 제시하던 원론적 제안 등과도 엇갈리는 이 대목은 이 책의 가장 한심한 부분이다. 무엇을 원한건가? 격양된 감정을 품고 책을 덮으며 책이 지닌 단점이 가려지길 바란 것일까? 이 대목으로 인해, 이 책을 통해 다음 책으로 옮겨질 첫 디딤돌 역할을 할 수도 없는 책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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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삶이냐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13
에리히 프롬 지음, 정성환 옮김 / 홍신문화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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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 하는 가장 큰 전제가 무엇일까? 바로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명제일 것이다. 이 명제로 인해 인간의 소유욕이 발생되고, 소유하기 위해 자본을 축적하려하고, 그 자본 축적을 원활히 하기위해 시장을 만든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명제를 해체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그 해체의 과정은 문명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 역사 속 추앙받던 철학자와 종교인들의 말을 빌리며 우리가 왜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명제와 싸워야만 하는지 증명을 한다.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명제는 본능에 호소하고 있다. 그것은 본능이라고 여겨지기에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 명제를 반박하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다른 본능이 제시되어야만 쉽사리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내세운 시장주의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닌 그 시스템을 위한 것이라고, 프롬은 반박한다. 허나 시장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명제에 대한 대응책을 이성에 호소하고 있기에 다소 막막하게 느껴진다. 기독교, 힌두교, 유대교, 불교 등의 종교의 본래 정신을 내세우고, 철학의 역사상 수없이 반복된 텍스트를 내민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성에 호소하지 본능에 호소하지 못한다. 이성에 대한 호소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본능이라고 명해진 명제에 반박하기에, 프롬이 제시하는 것들이 너무 뭉뚱그려져 우리의 삶에 닿지 않는다. 프롬이 제시한 것들은 그 자체로 굉장히 의미 있고, 인간의 역사가 오랫동안 이기심에 맞서려 했음을 제시하며,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명제에 균열을 가하긴 하지만 그 균열을 해체할 파괴력을 지니지 않고 있는 것이다. 너무 절대적인 윤리를 내세우고, 그 뿌리들이 관념 속에서 박혀 있다. 그렇기에 프롬이 제안한 것들이 실현되기 위해 절제된 삶의 태도를 전제해야만 한다. 욕망에 의해 행동할 것에 길들여진 산업사회의 인간들에게는 단지 참고할만한 윤리적 사항일 뿐이다.




  프롬이 제시하는 대안들 중 가장 혼란스러운 것이 있다. 소비를 국가에 맡겨 건전한 소비만을 허용하자는 것이다. 국가가 방임하여 시장의 활성화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저 대안의 문제점은 윤리적 선택을 국가 권력에게 맡김으로 생길 위험성을 전혀 생각지 않고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국가에 그렇게 큰 선택을 내맡김으로 위험이 도래하면, 책 속에서 제시한 문제들이 가면을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좋은 뜻으로 그러한 선택이 행해지더라도, 거시적 윤리를 내세우며 개인을 압박하는 꼴이 된다. ‘건전 소비를 국가 권력으로 다스리자’라는 대안은 이 책의 가장 큰 모순이며, 위험한 부분일 것이다.




  관념 속에 뿌리 두고 있어 막연하긴 하지만, 책 속 많은 견해들은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그것들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볼 기회와 시간을 준다. 이 책의 의미와 가치는 거기서 나올 것이다. 인간 자체를 물화하고, 인격을 상실하며, 인간 자체보다 이데올로기의 메카니즘만을 남기고, 소비 행위를 통해서만 자신의 자아를 확립할 수 있다는 것 등은 책이 출간이 된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곱씹어 볼만한 상항이다. 또 그것들이 아직도 피부로 와 닿는 문제라는 사실이 씁쓸함을 만들기도 한다.




ps.  책을 사둔지 꽤 되었음에도 ‘소유냐 존재냐’란 거창한 제목 때문에 함부로 손 될 엄두를 두지 못하였다. 지레짐작 집어먹은 겁에 비해 책은 다소 말랑하게 구성되어 있다. 굳이 인상 써가며 읽을 부분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소프트하게 책이 나온 되는 아무리 생각해도 번역자인 ‘차경아’ 교수의 번역 때문인 듯하다. 인문학서는 자칫 난해한 번역으로 원문을 잔뜩 꼬아놓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차경아’ 교수의 번역에선 그런 군더더기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말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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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치-22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6
조지프 헬러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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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조직이 대의를 내세우며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을 굉장히 혐오한다. 함께 행복하고, 개인의 욕심에 의해 다수가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선 대의가 필요하다 생각한다. 허나 그런 뜻으로 사람을 모아 조직을 만들고 난 뒤, 조직 속 개개인은 사라지고, 조직과 대의만 남아 희생을 요하는 상황은 끔찍할 뿐이다. 대의에 함몰당해 대의의 가치에 대해 열 번을 토하는 놈들도 끔찍하다. 이러한 상황들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기에 굉장히 혐오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혐오스러운 상황이 점점 내 주변에 자주 돌출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나인지라, 주변에 있는 친구들 대다수가 군대에 복무 중이거나 제대를 한 상황이다. 그런 친구들이 휴가나 제대 후 국방의 의무니, 국가를 위한 헌신이니, 남자라면 군대 등의 말을 내뱉을 때의 스트레스란 여간한 것이 아니다. 군 내부의 폭력은 내무반 속 남자들의 의리로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은 군인이란 것의 본질을 미화시키는 모양이다. 몇몇의 친구들이 애국반공마초로 변한 모습을 볼 때마다 안쓰럽다. 이렇게 대의에 함몰 당했거나 대의를 따를 것을 요하는 친구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그들의 주댕이를 한방에 닥치게 할 만한 것이 있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들이 내뱉는 숭고한 것들이 얼마나 허접한지 설명해 봐야 입만 아프고, 서로 얼굴 붉힐 일만 생기곤 했다. 이제 그런 걱정이 많이 줄었다. 드디어 그들을 한방에 보낼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난 이제 그들과 입 아프게 언성 높일 필요 없이 책 한권을 던져주며 엄지손가락으로 어깨 너머를 가리키며 ‘꺼져’를 외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모든 상황은 정리 될 것이다. 그리도 위대한 책은 바로 조지프 헬러의 ‘catch-22’다.

  ‘catch-22’는 이탈리아 해안의 피아노사란 섬에서 복무하는 미 공군 폭격수 요사리안이 주인공인 이야기다. 'catch-22'는 미친놈의 이야기인데, 소설 속 인물들이 확고히 인정하는 미친놈은 요사리안뿐이다. 요사리안을 미친놈 취급하는 소설 속 인물들을 잠깐 설명하자면, 야한 사진을 찍기 위해 설치지만 영원히 찍지 못하는 놈, 걸리지도 않은 폐렴을 치료 안하고 죽겠다는 놈, 군목이면서 죄악을 저지를 때마다 기분이 좋은 놈, 목표물 폭격은 상관없이 탄착점 패턴만 예쁘길 바라는 놈, 7센트를 주고 산 달걀을 5센트를 받고 팔아 이윤을 보는 놈, 강간한 창녀를 창문으로 던져 죽이고 죄의식 없이 낄낄되는 놈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언급한 놈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소설 속에 이것보다 더하거나 덜하거나 비슷한 놈들이 한 가득이다. 분명한건 이런 놈들이 소설 속에서 정상인 취급을 받는다는 거다. 또 분명한건 저것들이 죄다 미친놈이고, 저런 미친놈들이 소설 속 온갖 사건을 일으키고, 그 미친놈들이 일으킨 사건들은 얽히고 연쇄되어 다른 미친 상황을 만든다. 앞서 언급했듯 소설 속 수많은 미친놈들은 요사리안을 미친놈이라고 한다. 그렇다. 이 소설은 정상인 요사리안이 미친놈들 사이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 수많은 미친놈들이 정상인인 우리의 주인공 요사리안을 미친놈 취급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소설이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 미친놈들은 전쟁 속 질서, 군대 속 질서로 보았을 때는 지극히 정상이다. 이 말은, 전쟁과 군대 속에서 질서에 순응하는 놈들은 미친놈이란 말이기도 하다. 소설 속 미친놈들은 너무도 진지하게 군대와 전쟁 속 질서에 복종하고 행동하기에 우리의 웃음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삶을 함몰시킨 질서를, 그 질서 안에서만 합리적인 대의를 질서 밖의 사람들에게 강요할 때, 그걸 보고 웃지 않기란 힘들다. 온갖 부조리한 명령에도 상하복종이 완벽하고, 국가를 위해, 선임들을 위해 목숨 받쳐 죽으려 발광하고, 쓸데없는 열병식에서 한 동작도 틀리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 광경은 끔찍하거나 우스울 뿐이다. 한껏 인상을 Tm고 근엄한 척을 해도, 그것들의 본질이 지니고 있는 부조리함은 지울 수 없다. 'catch-22'에선 우리가 숭고하다고 여기고, 질서라고 여긴 것들이 종이 한 장 정도의 가벼운 차이로 폭소를 자아낼 수 있음을 증명한다.

  온갖 미친놈들이 과격한 소꿉장난을 버리며 일으키는 부조리극은 초중반에 몰려있다. 소설의 초중반은 5분에 한 번씩 폭소를 터뜨릴 수 있다. 하지만 너무도 아둔하고 부조리하여 연민의 감정이 느껴지는 소설 속 인물들이 하나 둘 죽어가는 후반부에 들어설수록 우리는 그 웃음 또한 고민하게 된다. 우리가 비웃고 조롱한 상황들이 끔찍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참혹함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것이 들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반부는 미련한 소설 속 인물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그것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헤친다. 얼마나 손쉽고 간단하게 내부의 희생자를 만들고, 어떤 방식으로 군인들의 자의적 희생을 만들어 내고, 군 상층부의 인식이 얼마나 편협한지 등을 들어낸다. 소설은 숭고한 대상을 인지시키고, 그것을 차분히 해체해 나간다. 전쟁과 군대에서 멈추지 않고 이데올로기에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이 얼마나 등신 같은 짓인지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 실체란 것이 ‘자신이 미친놈임을 아는 미친놈은 미친놈이 아니기에 귀국할 수 없다.’란 소설의 제목인 ‘catch-22’만큼 부조리한 것임을 들어낸다. 너무도 아이러니하고 통쾌하게 그것을 입증시키는 대목이 있는데, 그 실체가 무엇인지를 함축하는 말을 매음굴을 관리하는 노인의 입을 빌린다.

  “국가가 뭐지? 국가는 흔히 인위적인 경계선으로 사방을 둘러싼 땅 덩어리에 지니지 않아. 영국 사람들은 영국을 위해 죽고, 미국 사람들은 미국을 위해 죽고, 독일 사람들은 독일을 위해 죽고, 러시아 사람은 러시아를 위해 죽지. 지금 전쟁에서 싸우는 나라의 숫자는 쉰이나 예순쯤 되지, 그렇게 많은 나라들이 모두 목숨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다는 건 분명히 거짓말이야 ...(중략)... 그리고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 살아야 할 가치가 있지”

  개인적으로 소설 속에서 가장 빛났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마일로에 관한 것이었다. 마일로는 전시 상황에서 신디케이트를 통해 기업을 운영하여 이익을 창출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거래하는 곳마다 시장이 되고 후작이 되는 등 권력 층 꼭대기에 자리 잡게 된다. 적과 아군 가리지 않고 거래하며 권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마일로는 그 자체로 전쟁의 속성을 들어내고, 자본가가 얼마나 흉폭할 수 있는지 들어낸다. 바로 2차대전에서 미국이 전쟁을 통해 돈 맛을 보는 속성을 들어내고, 그 전쟁에서 자본가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들어내는 것이다. 마일로가 주창하는 시장의 자유, 그 자유를 통해 활성화 된 시장이 경제적 이익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그 이익은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라며 포장되고, 애국의 상징이 된다. 이것이 마일로가 이익 창출을 위해 자국 부대를 자신의 기업이 소유한 폭격기로 폭격하고도 추앙 받는 대의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 사는 우리는 이런 식의 포장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주창하는 정부 측 발언, ‘경제 활성화’와 ‘애국이란 이데올로기’를 조합한 기업들의 쇼비니즘 광고 등을 통해 쉽게 봐 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들어내는 마일로의 말이 있다.

“우린 국민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돈은 우리가 간직하고, 중간 과정은 생략할 수 있죠. 솔직히 얘기해서 전 정부가 전쟁에서 손을 떼고 그 일을 전부 개인 기업에 맡겼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가진 돈을 모두 정부에 지불한다면, 그것을 즉 자기편 장병과 비행기를 스스로 폭격하는 개인들의 기를 꺽고 정부만 옹호하는 샘이 됩니다. 우린 그들의 보상을 박탈하게 되는 셈이죠.”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마일로에게 악의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충실히 시장이 이끄는 질서에 자신의 머리와 행동을 맡겼을 뿐이다.

  이런 부조리와 부조리 속에 살고 있는 인물들을 담고 있는 소설은 다소 특이한 구성을 담고 있다. 예를 들자면, 간혹 인물들의 대화는 말의 주인이 표시가 되지 않아 누가 말하는 건지 알 수 없게 되는 상황, 한 문단 속 공간과 시간이 별다른 표시 없이 쉼 없이 바뀌고, 대화 도중 쉼 없이 바뀐 시간과 공간으로 답변자가 바뀌는 경우 등이다. 이러한 공간, 시간, 발언자, 답변자가 쉼 없이, 그리고 갑작스레 바뀌는 구성은 그 모든 것들을 하나의 공간, 시간, 인간으로 촘촘히 엮어내게 된다. 그렇게 하여 응축된 것들은 부조리한 혼동, 그 자체를 들어낸다. 어느 장소에서, 어떤 시간에, 누가 말하던 전쟁과 군대 속에선 죄다 미친 상황과 미친놈들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전쟁이란 것이, 군대란 것이, 대의에 목숨 거는 것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미친 짓인지 들어내는 것이다.

  'catch-22'는 내가 본 반전 소설 중 가장 유쾌하고, 적나라하고, 슬프고, 참혹하며, 끔찍하고, 위대한 소설 중 하나다. 조지프 헬러는 소설 속 오르처럼 치밀하고 명랑하며 적나라하게 전쟁을 분해하고, 그 전쟁을 포장하는 이데올로기를 해체 했기에, 소설을 읽고 남는 것은 감탄뿐이다. 이제 한없이 진지하게 구는 그 수많은 전쟁영화를 어떻게 감동하며 볼 것인가? 죄다 ‘지옥의 영웅들’, ‘닥터 스레인지러브’, ‘철십자 훈장’처럼 보일 것 같아 걱정이다. 인상을 찌푸리고, 흙먼지 뒤집어쓰고 폼을 잡아 멋있는 척하는 영화들이 얼마나 부조리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요사리안이 오르의 진실을 깨닫기 전, 자신을 강박적으로 괴롭히던 스노든과의 참혹한 기억이 갖고 있는 진리를 밝히는 글로, 이 글을 맺는다.

“그의 창자가 전하는 뜻은 이해하기는 간단했다. 인간이란 물질이다. 이것이 스노든의 비밀이다. 창문에 던지면 그는 떨어지리라. 불을 붙이면 그는 타버리리라. 그를 묻어 버리면 그는 다른 쓰레기나 마찬가지로 썩으리라. 영혼이 사라지면 인간은 쓰레기다. 그것이 스노든의 비밀이었다. 모두가 곪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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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echlab > 무비쟁이 자기 소개

 

• 나는 이런 사람이예요! [ : 40자로 짧고 굵게 자기 자신을 표현해주세요]

- 굉장한 개인주의자이고, 냉소를 버리고 살기위해 노력하고, 다 같이 행복하게 살길바라고 있습니다.

•  내 인생 최고의 책 5권 [: 신/구간, 분야 관계없이 5권의 제목을 꼽아주세요]

1.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 슬로보예 지젝> 지진이었다. 세상을 습득하는 질서가 새로 설계되었다. 히치콕의 영화가 라캉 정신분석학을 위해 탄생한 것만 같다. 지젝의 인기에 비해 라캉의 책이 번역되지 않음의 모순에 빠졌다.

2. <감시와 처벌 - 미셸 푸코> 권력이 내세우는 질서에 의해 어떻게 사람이 길들여지는 가에 대한 가장 담백하고 스펙타클한 입증이다. 세상을 구조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필요한 것인가의 명백한 입증이다.

3.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2 - 임권택 정성일 대담> 임권택 정성일이란 이름만으로도 설명이 된다. 그 어떠한 영화 서적보다 어떻게 영화를 대하고 어떻게 영화 속에서 버텨야 하는 지 친절히 적혀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한 작가의 연대기 또한 경험할 수 있다. 내가 본 가장 멋진 대담.

4. <관촌수필 - 이문구> 근대화에 대한 가장 유려한 반박. 본래의 것들이 가진 아름다움과 풀빛 가득한 추억 속 숨 쉬는 사람에 대한 애정 어린 묘사로 입증하는 인간의 가치. 석공을 생각하면 지금도 코 끝이 아린다.

5. <88만원 세대 - 우석훈> 마음속에 품고 있는 몇 없는 진정한 어른. 불만과 악다구니로 점철되어 살지 않을 기회를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함께해야 하는 이유의 입증. 우석훈이란 이름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존경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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