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아이
박수범 감독, 박성열 외 출연 / 대경DVD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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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아이가 있다. 그 아이들은 판소리를 배운다. 제대로 된 소리를 내기위해 작은 몸을 한 없이 비튼다. 그 소리에 기교란 있을 수 없다. 명창들이 지나온 길을 온전히 받아야 한다. 높낮음에, 흐느낌에 ‘나’는 없는 것이다. 명창들의 높낮음에 흐느낌에 그들이 터놓은 길을 따르며 질러야한다.

  

  한 아이는 대회를 나가고 명창들에게 공부를 받는다. 다른 아이는 술집과 판촉장에서 소리를 팔고 귀동냥으로 소리를 배운다. 한 아이의 아버지는 좋은 차와 좋은 집, 좋은 별장, 좋은 선생을 제공할 수 있다. 한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공연장에 밀어놓고 욕지거리를 던지고 푸념을 늘어놓으며 매질을 가한다. 두 아버지는 다른 환경에 아이들을 노출 시키지만 두 아이의 표정과 생각의 차이는 점점 좁혀진다. 두 아버지는 다른 것 같지만 같다. 두 아버지는 자신의 못 이룬 꿈을 위해 아이들을 밀어 붙인다. 자신을 잃어가는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 끝없는 연습과 직접적인 매질에 우위란 없는 것이다. 결국 다른 가면일 뿐 폭력일 뿐이다. 지방으로 소리를 배우러가 혼자 밤늦게 고속버스를 타는 아이와 가차 없는 매질로 깊게 남은 멍 자국의 차이를 찾기 힘들다. 아이들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만 간다.

  

  아비란 타이틀을 지닌 자의 폭력이다. 그 폭력이 아이들을 몰아친다. 무엇이 좋다고 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 극한의 폭력은 소리를 위해 끝을 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한을 심어주기 위함 인가? 그로써 폭력은 훗날 긍정으로 추억될까? 그 폭력이 긍정의 모습을 띌 가능성이 있기에 더욱 잔혹한 것이다. 그 아이들이 재능을 보이기에 그 폭력은 끝이 보이지 않고 더욱 잔혹하게 느껴진다. 한국 가부장의 폭력이 한국의 소리를 위해 아이들을 내몬다. 소리가 너무도 한국적으로 다가오기에 그 아이들의 폭력은 더욱 친숙하고 더욱 가깝다. 지속적으로 울려되는 소리가 자극하는 ‘한국’이란 것이 한국 가부장의 폭력을 지속적으로 인지 시키기에 소리가 울릴수록 괴로움은 크다. 고통과 서늘함이 배가된다. 그래서인지 명창들의 소리는 감흥을 일으키지만 영화 속 명창들의 소리는 다분히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음침하고 잔혹하고 명창이기에 압도하는 기운은 더욱 갑갑하다.




  아비들의 강요는 프레임의 후경이나 프레임 밖에서 일어난다. 아이들의 얼굴이 메우고 있는 프레임에 울려 퍼지는 아비들의 목소리는 가멸차다. 두 아비의 말은 다르지만 프레임을 채운 아이들의 표정은 같아지고 함께 어두워져만 간다. 영화 속에서 한번을 마주치지 못하고 소리를 하는 것을 제외하면 어떤 인연도 없을 듯 보이는 아이들의 처지가 이리도 같기에 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이리도 다른 환경의 아이들의 처지가, 이렇게 떨어져 있는 아이들의 처지가 너무 같기에 프레임 밖, 영화 밖, 영화에 잡히지 않는 아이들의 처지를 어찌 판단해야 할지 고민이 앞선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폭력에 던져진 상황을 목격할 수밖에 없다. 그 고통의 전시 속에서 우리는 비루하게 아이들의 해맑은 행동을 찾으며 웃길 바라며 안심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소리를 제외하곤 너무도 다른 환경의 두 아이가 너무도 같기에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 소리가 자극하는 한국이란 것에 얽매인 아이들이기에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 무거움은 쉽사리 털어버릴 수 없다. 극장 밖은 결국 한국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쓸모없다며, 자신이 쓰레기라며 흐느끼는 아이의 자작곡에 베인 한이 그 어떤 판소리에 베인 한보다 깊기에 그 무게를 함부로 털 수가 없다. 아이의 노래가 귀전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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