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새롭게 읽는 러시아 고전 1
막심 고리키 지음, 최은미 옮김 / 써네스트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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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소. 최근 가장 고민되는 감정이다. 난 상당기간 냉소에 푹 담가져 숙성되어 눈까리가 어름 눈깔이다. 냉소를 바득바득 온몸에 채우고 세상을 보고 내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바득바득 얼려 삼켰다. 그것이 서울이란 숨 막히는 도시에 살면서 도시인이 갖는 합당한 감수성 내지 대세적 감수성이라 여겼다. 냉소가 대세이기에 냉소의 반대편에 서 있는 감정들은 촌스러웠다. 그런 것들하고 함께 살기엔 서울은 그리 풍성한 곳이 아니었다. 쿨로 일관해야 상처를 덜 받고 나 자신이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여겼다. 뼈 속까지 얼얼하기에 냉소와 평생 함께하는 것도 괜찮다고 여겼다.

  위에 언급한 나와 뒤엉킨 냉소적인 모든 것들이 과거시제다. 즉 현재 나의 냉소는 조금씩 녹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올해 들어 냉소적인 태도가 차츰 녹기 시작했고, 나는 쿨하게 냉소를 떨쳐낼 생각이다. 계기는 결국 책이다. 개인적으로 독서만큼 사람을 뒤집어 놓는 것도 없다고 생각이 되는 데 그 책들이 던진 질문과 텍스트들이 제 반추의 계기를 만들었고 난 질문을 시작했다.. 냉소로 일관하여 결국 뭐가 될까? 냉소가 과연 합당하기나 할까? 냉소의 반대에 위치한 감정들이 촌스러운 것이 가능키나 한 것일까? 끔찍한 도시의 감수성이 날 얼마나 괴물로 만드는가? 질문이 물고 물수록 냉소에 대한 애정은 차츰 사라지기 시작한다. 난 냉소를 유지함으로 너무 많이 잃었고 놓쳤고 외면했다. 도시적이여서 끔찍한 수많은 것들 중 단연 으뜸은 냉소다. 더 이상 진전 없어 고이고 고여 만들어진 절망의 늪이다. 아니 늪도 아니다. 늪의 위대함을 냉소의 비유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씬시티에 나오는 타르 구덩이다. 맞다. 그 타르 구덩이, 모든 썩은 것들이 모이고, 버려지는 그 타르 구덩이, 검하디 검고, 빠져나올 가망이란 일찌감치 버려야 하는 그 타르 구덩이인 것이다.

  끔찍한 냉소의 구덩이에서 내가 빠져나올 희망을 던져준 수많은 책들 중 단연 최고는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다. 난 어째서 이제야 ‘어머니’를 읽은 것일까? 왜 이제야 내 손에 도착 한 것일까? ‘어머니’의 전체적 구성은 사회주의에 문외한이던 어머니가 어떻게 시스템에 대해 반추를 하고, 왜 혁명이 필요한지를 깨닫고, 혁명에 참가하고, 사회주의의 기치를 몸소 실천하는 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무지막지하게 단순히 요약하여 말하자면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는 혁명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허나, 어머니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 혁명만이 아니다. 분명 사회주의 혁명들을 자세히 스케치하여 혁명의 당위성을 설토하는 것은 동구권 붕괴란 명백한 현실로 인해 혁명의 필요성을 상실해가는 지금 굉장히 소중할 것이긴 하다. 그렇지만 그보다 값진 것은 ‘어머니’의 눈으로 보고, ‘어머니’의 마음으로 읽어 내려간 혁명이다. 그 어머니가 어머니로써 생각한 혁명의 당위와 동지에 대한 고민가 앞날에 대한 고민, 그 모성애로 써 아우르는 모든 것들을 통해 물리치는 냉소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혁명의 필요성에 들끓음에도 내미는 동지들의 냉소들을 물리치고 그녀는 끝없이 사랑과 희망을 끌어안는다.

  도시의 감수성에 함몰되어 유행처럼 냉소가 번지는 상황에서 어머니의 행동은 그 자체로 현재를 반추하게 한다. 시니컬이란 것을 필두로 쿨함의 기치를 내세우며 냉소를 띄는 것이 더 멋있어 보이는 상황이 과연 정상적인 것일까? 냉소를 띔으로 인해 많은 감정들이 버려지고 사라지는 지금 상황이 과연 합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냉소병에 걸려 놓치고 잃으며 저지르는 실수들을 보면 ‘그렇다’고 대답하기 힘들다. 정치적 냉소에 걸려 투표권을 자의적으로 포기하고, 그로인해 원치 않던 시스템에 합류하게 되고, 그럼으로 얻는 무기력은 다시 냉소를 불러들여 실수를 반복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며 띈 냉소 탓에 삶은 비루해지고 절망스러워지고 무기력으로 도배를 하게 된다. 그 물고 물리는 절망의 연쇄, 그 타르 구덩이.

  얼마나 냉소로 일관하고 살아 왔을까? 왜 냉소를 띄우는 그때 진심을 발휘하지 않고 숨었던 것일까? 냉소를 버리고 진정 사랑하고 진정 희망할 때 가능성이 오고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어머니’에서 배운 것이다. 막심 고리끼의 그 절실한 외침은 여전히 절실하다. 아니 절박하게 요구되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현재 남한에 살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냉소를 버리는 것이다. 가당치도 않은 괴물을 ‘외면하고 굴복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의 선택 전에 우리는 냉소를 버려야 한다. 냉소를 버리고 냉소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촌스럽다며 무시한 것들을 지녀야 한다. 냉소의 반대편에 위치한 그 감정들. 그것들을 무시하기는 쉬울지 모른다. 허나, 정말로 그것들을 실천하고 그것들로 세상을 바라보기란 힘들 것이고 또 그것들의 값짐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까지 완결된 것은 없다. 어머니는 혁명의 선상에 있지 종점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 힘들고 고된 과정 속에서 어머니는 작은 몸을 당당히 펴고 있는 것이다. 아직 완결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담 지금은? 진행형이다. 끝나지 않았다. 철지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열차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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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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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촌놈들의 제국주의. 이 책은 결국 책명으로 정리된다. 촌놈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부를 위해 파시즘을 선동하고, 능력도 없이 제국주의를 실현시키려 안간힘을 쓴다. 그런 촌놈들의 삽질에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평화다. 이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이런 촌놈들의 삽질의 시작은 충격적이게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DJ의 독트린에 있다. 평화를 부르짖으며 북한 개방을 시작한 DJ의 선택이 모든 삽질의 시작이 되었고, 그 시작은 노무현을 만나 지독한 민족주의자들과 결합하여 제국주의 열망의 기운을 퍼트렸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MB를 만났다. 


  책을 읽기 전에도 난 남과 북이 통일되면 북한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될거란 상상을 하곤 했다. 이 책에서 언급한 건설자본의 투입과 북한과 남한의 통일로 인한 시너지로 촉발될 군수복합체를 차치하더라도 부동산으로 부를 채운 투기꾼들이 북한 땅을 밟고 섰을 때의 표정을 상상하기란 쉬웠다. 그리고 그 상상은 금강산 골프장이란 모습으로 구현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하게만 생각되는 홀인원 전용 코스는 북한에 진출한 촌놈들의 목표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그들이 팔만 휘둘러 홀인원하는 좀비 골프를 하는 동안 금강산이란 자연은 쉽게 얻는 쾌감의 가중치를 얹은 등가교환 하듯 처참히 희생되어 갈 것이다. 그런 멍청한 홀인원에 환장한 촌놈들이 조성한 남한 사회의 앞날이란 코스는 온갖 미디어에서 볼 수 있는 쇼비니즘 마케팅의 달콤한 유혹을 거쳐 제국주의 열망을 향한 장렬한 걸음을 옮길 것이다. 그리고 그 걸음의 핵심에 아쉽게도 북한이 있다. 저임금 시장, 개발이 안 된 토지들 등 촌놈들이 침을 질질 흘릴 요소가 한 무더기로 쌓여 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지만 그 통일의 가치가 이리도 흉악스럽기에 이를 악 깨물고 통일의 의미를, 우리가 통일에 갖는 바람을 제 반추 해봐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런 촌놈들의 욕망을 ‘그런 놈들이니까’란 냉소를 내걸어선 안되는 이유가 있다. 바로 그놈들이 끌고 올 것이 제국주의란 비윤리적 행동만이 아닌 전쟁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시니컬한 태도가 아닌 평화에 대한 열망이다. ‘순진무구한 로망이다’, ‘촌스럽다’고 말하려는 태도는 버리고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이 우석훈이란 저자가 독자들에게 주고픈 선물일 것이다.


  동북공정, 독도 이것들이 자극하는 건 애국심의 저변에 깔린 증오다. 자제하려 아무리 노력해도 상당기간 멍하니 촌놈스럽게 살아서인지 독도란 이름을 들으면 자연스레 증오가 싹트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이 빠방하게 군수강국이 되어 ‘땟놈’과 ‘쪽바리’를 까부시는 골수 마초적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하면 내 양심을 속이는 짓이 될 것이다. 허나, 단순 쾌감을 얻기 위해 한 증오와 상상이 요구하는 값은 쌓이고 쌓여 전쟁이 될 것이다. 국가란 이름 아래에 휩쓸려 희생되는 것이 우리가 증오하고 태왕사신기스러운 상상을 한 결과가 될 것이다. 쥐뿔도 없어서 ‘나’란 것의 가치를 유일하게 설정해줄 민족주의에 열렬히 기댄 것의 결과가 요구하는 것은 애국의 이름 아래에 우리를 군사란 숫자로 취급하여 개죽음 당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린 평화란 단어의 가치를 되새겨야 한다. 세계화에 열광하며 ‘경제’적 합일과 ‘경제’적 침략 등에 대한 강력한 힘의 욕구만 팽배할 뿐 다른 나라와 같이 다함께 잘 살자는 정신을 자꾸 잃어버리는 지금 필요한 건 긴박한 평화에 대한 논의뿐이다. 마초적 로망이 아닌 하얗게 빛나는 평화의 로망에 대해 생각할 때인 것이다. 이런 근본적 요구를 촌스럽다 여기지 말자. 만약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든다면 그런 시니컬한 태도가 얼마나 촌스러운지 생각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우리가 평화에 구현에 앞서 생각할 것이 있다. 우린 쉽게들 미국의 제국주의 기질에 대해 욕하곤 한다. 우리가 과연 그런 식의 비판을 할 윤리적 위치에 서있기나 한 것일까? 박태환, 김연아, 한류, 박진영, 심형래, 황우석, 자원외교 등이 지목하여 우리를 열광시키는 것이 무엇일까? 그 열광의 핵심이 온전히 윤리적 위치에 있는 것일까? 전혀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쇼비니즘에 열광하는 지금, 자국 우수성에 열광하는 지금, 한국이 결국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 될거란 광고가 판치는 지금 우리가 과연 미국과 얼마나 다른 얼굴을 할 수 있을까? ‘언더그라운드’를 만든 에밀쿠스트리차 감독이 집시밴드와 함께 내한 공연을 와서 한국에 대한 인상에 대해 말할 적이 있다. “굉장히 미국적이다.”란 것이다. 정책적 목표 등을 차치한 한 국가의 도시에 대한 이미지에 한한 인상이였을 것이다. 허나 우리의 미국스러움이 과연 인상에만 머물겠는가? 국민 대다수의 찬성으로 인한 이라크 파병을 잊어선 안된다. 그들이 전원 복귀하지 않고 주둔하고 있는 지금을 망각해선 안된다. 자국의 자원 확보에 대한 열망만 있을 뿐 한국 기업이 침투해 쑥대밭을 만들 그 나라들의 생각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란 결국 비루한 결과만 나올 뿐이다.


  솔직히 전문가의 분석을 차치하더라도 한국의 민족주의나 패권주의의 성향이 짙은 것은 사실이다. 힘에 대한 열망이 강력한 것이 사실이다. 자신들을 진보 진영이라 언급한 이들이 쇼비니즘과 그것으로 선동하는 건설정책과 뉘앙스만 부드럽게 꾸며놓은 자원외교 등에 앞서고 좌익을 자처하는 이들이 북한의 핵 보유를 찬성하는 모습은 비밀이 아니다. 부국강병을 꿈꾸는 모습에서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되새기자.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필요하다. 단일 민족이라고 좋아 죽을 때 우리가 잃는 것은, 한류라며 한국의 문화 바람이 아시아 최고라며 좋아 죽을 때 우리가 잃는 것이 무엇인지, 박진영, 심형래, 황우석 등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우리가 잃는 것이 잃는 것이 무엇인지 복기할 때가 왔다. 평화의 가능성이다. 평화는 공공재이기에 평화를 얻는 것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기를 꺼려한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는 아무생각 없이 무임승차를 한 것이다. 그런 망각을 부시고 평화에 대한 생각을 전쟁 가능성에 대한 경각심을 갖는다면 정말 값질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이 그렇기 절박하게 요구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냉소로 점철된 내 모습이 지금만큼 허접할 때도 없다. 한 시대의 지식인이 간절히 바라는 것을 진심을 생각해 보는 것 또한 정말 멋진 로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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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vy - Insomniac Doze
엔비 노래 / 파스텔뮤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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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분, 절망, 절규... envy의 음악은 함부로 글로 옮길만한 무게를 지니지 않았다. 그들의 음악을 듣고 들을수록 그리고 그에 대한 글을 쓰려하면 할수록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은 지속적으로 인지 된다. 그 절망에, 그 울분에, 그 절규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열광뿐이다.

  그들의 음악에서 받는 인상 중 그들의 음악에 그나마 가장 근접한 것이 무엇일까? 다분히 노동적이라는 인상이다. 땀에 절고 절어, 피곤에 절고 절어, 쌓이고 싸인 모든 것을 해체한다. 그 해체의 과정이 폭발이 아닌 노동적인 땀의 외침으로 인한 해체이다. 그 증거를 그들의 공연에서 목격할 수 있다. 내리쬐는 태양과 같이 작렬하는 조명을 등진 체, 육체의 한계에 다가가며 내뱉는 괴성으로 둘러싸일 때 느껴지는 숭고함이란 노동의 그것과 같다. 그들의 몸이 예술적 노동으로 인해 땀에 베어가고 그 땀들이 흔들어 되는 몸짓에 의해 흩뿌려질 때 그들을 보며 열광하고 날뛰는 우리의 몸에도 땀이 베어간다. 그 끈적임이 싫지 않다. 땀으로 뒤범벅 된 사람들끼리 부대껴도 싫지 않다. 우리는 그 땀의 가치를 안다. 그 땀의 숭고함을 느낀다. 그렇기에 그 땀이 고맙고 그로인해 생기는 열기가 고맙다.

  그들의 음악의 뿌리는 다분히 서구적이다. 허나 그들의 음악의 장르를 함부로 규정할 수 없듯이 그들의 음악을 서구적이라 평할 순 없다. 그들의 음악이 주는 감흥은 다분히 동양적이다. 한이 서려있고, 그 한은 잔뜩 웅크리고 있다. 4번째 정규앨범인 'Insomniac Doze'에서의 한의 웅크림은 더욱 낮아졌다. 한의 해체의, 해체에 대한 해체에 힘을 쏟기 보단 한에 대한 완전한 해방을 위해 그들의 음악은 기다린다. 그 드라마틱한 역동적인 움직임은 음악적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의 운동 또한 눈물겹게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 아름다움을 지닌 이번 앨범의 기치를 집대성한 곡은 'warm room'일 것이다. 전반부의 그 황홀한 고요함. 쏟아져 나올 울분의 스펙타클을 기다리는 그 값진 시간들. 막혀있던 둑이 터지 듯 쏟아져 나오는 후반부 울분의 외침은 듣고 들어도 다시 들어도 항시 동일한 감흥의 값을 지닌다.

 

  온갖 것들이 우리에게 울분을 심어 놓는다. 그것들은 끝없이 우리에게 분노를 심는다. 그 끝없는 반복이 경이로울 뿐이다. 우리의 반복되는 분노 또한 경이롭다. 도시의 스모그 낀 갑갑한 회색, 분노로 울분으로 가득 메워진 도시의 회색이 주는 강박감, 이제 그것을 해체할 때다. 그 강박적 회색을 회색으로 해체할 때가 온 것이다. 회색성 짙은 노동적 울부짖음으로 우리는 그 분노의 회색을 해체하고 해방을 맛 볼 때가 온 것이다. 아쉽지만 그것의 해방이 영원하진 않을 것이다. 허나 음악이 재생되는 약 1시간여의 시간동안 우리는 완전한 해방을 맛 볼 것이다. 한줄기의 빛이다. 그 빛은 진실 되어 밝지만은 않다. 그 회색성 빛이 주는 해방감의 순간을 우리는 온 몸으로 받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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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니 토드 (2disc)
팀 버튼 감독, 조니 뎁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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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잔혹하다고들 한다. 허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팀 버튼은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베트맨에서 들어냈었다. 스위니 토드 또한 그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바뀐 것은 시선의 세기. 냉소에서 소가 살아진, 면도칼만큼 날카로운 시선. 팀 버튼의 날 선 시선이 펼쳐진 곳은 산업화 혁명으로 인해 세상이 곧 영국이 된, 영국에서도 산업화의 집대성인 런던이다.


 

정의와 사랑의 바다에서 해적 놀이하던 항해생활을 접고 조니 뎁은 배에서 내리며 복수를 위해 19세기 영국에 서게 된다. 토드(조니뎁)의 복수의 원인이기도 한 터핀 판사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 듯이 법은 올바른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단지 판사라는 힘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힘은 -토드의 아내와 딸을 빼앗은 것처럼- 그 위치보다 아래에 있는 것들을 착취한다. 법-정의의 자리에는 단지 힘이 있을 뿐이다. 법이 작용을 하지 못함으로 법-판결의 자리에 법에서 탈한 판결인 복수가 자리 잡게 된다. 그러니 토드의 도착은 필연적 도착한다.

 

안소니의 조안나(토드의 딸)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토드의 복수가 실패가 되고 토드는 복수가 실현되지 못한 분노를 세상으로 돌려 이발소 손님들을 고기 파이로 만들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복수의 실패로 인한 것일까?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직업을 얻고 자본을 끌어들이는 자체가 필연적으로 어떤 대상을 착취하게 된다. 그것이 생명이 되었던 상관없다. 단지, 그 매커니즘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수요만이 필요할 뿐이다. 수요와 충족.


 

토드는 광기의 소모를 위해 살인을 한다. 허나, 그 살인을 멈출 수 없는 것은 러빗부인(헬레나 본햄 카터)이 수요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빗부인이 끝임없이 시체를 원하는 것은 그것으로 만든 고기파이를 사람들이 끝임없이 원하기 때문이다. 수요가 있기에 충족이 발생한다.


영화 오프닝에서 보여지는 수평구조는 고기파이 만들기 과정과 일치한다. 하늘에서 내린 피가 이발소로 그 아래 오븐이 있는 지하실로 그 아래 하수도로 흘러 바닷가로 내려가고 그 물은 증발하여 다시 구름을 생성할 것이다. 이발소에서 이발소 손님은 오븐이 있는 지하실로 떨어지고 시체가 된 이발소 손님은 고기파이가 되어 식당 손님의 입으로 들어가고 배를 체워 기분 좋아진 식당 손님은 면도를 위해 이발소로 올라간다. 착취의 순환구조.


 

영화 속에서 토드와 러빗부인과 남자아이로 유사가족같은 공동체를 형성하지만 그 공동체 역시 착취의 순환구조를 벗어나지 못한다. 토드는 복수의 완성을 위한 부품으로 러빗부인고 남자아이를 대하고 러빗부인 역시, 자신의 욕망의 실현을 위해 토드를 속인다. 남자아이 역시, 계급 상승-빈민촌에서 가게점원-으로 인해 러빗부인을 따르고 자신의 계급을 위협하는 토드를 원망한다.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는 가족. 그것이 자본주의가 보수적으로 외쳐되는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의 현실.


토드와 러빗부인의 시선에 인간들은 욕망의 충족과 자본적 가치일뿐이다. 그들에게 인간은 인간으로 작용할 수 없다. 허나, 중요한 것은 '그들'은 토드와 러빗부인으로 한정 될 수 없다. 그 '그들'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토드와 러빗과 터핀판사의 죄는 어디서 오는가? 토드는 귀향 후 면도칼을 쥐면 외친다. "이제 내 팔은 완성되었다" 그 팔의 완성은 무엇인가? 가위손 시절에 대한 향수? 과거에 대한 기호로써의 만족? 그 완성은 직업의 완성이다. 그가 면도칼을 쥐고 이발사의 자리로 돌아 옮으로 복수로 내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면도칼을 쥠으로 착취(고기파이 원료)를 실행 할 수 있게 되었다. 토드와 러빗과 터핀의 죄는 직업- 그 것이 뜻하는 수익 창출효과에 있다. 욕망을 충족시키려면 착취를 해야된다. 왜 착취를 해야만 할까? 그것은 산업혁명으로 - 말 그대로 자본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땅인 런던에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토드는 복수에 성공하지만 성공하기 위해 자신의 부인을 죽이게 된다. 착취 순환구조-의도인 복수-를 자신의 손으로 중단하지 못함으로 의도는 이루지만 진정한 의도(아내)은 망각하게 된 것이다. 순환구조의 정지를 하지 못한 자의 최후는 파멸 뿐이다. 러빗 부인의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불에 타게 되고 터핀판사 역시 토드의 손에 살해된다. 토드 역시 복수에 대한 열망을 끊지 못함으로 순환 구조의 하위에 있는 남자아이 손에 죽게 된다. 허나, 중요한 것은 인육 맛과 살인으로 인한 피맛까지 본 그 아이는 정점에 서겠지만, 강조해 말하자면 순환구조에 완전히 정착한 그 아이도 결국 시체가 될 것이다. 가장 절망적인 비전.


 

그 끔직하고 역겨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말 그대로 순수한 사랑 뿐이다. 순수한 사랑을 지키고 순환구조에 물들지 않은 조안나(물론,안소니도)는 순환 구조의 정점에 서있는 아버지-토드와 터핀이 파멸함으로 그 악순환에서 벗어 날 수 있게된다. 순수한 사랑으로 기적을 바라는 것. 그것만이 이 악순환에서 벗어난다.


우리가 이 영화를 잔인하고 역겹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혹은 그 살육의 잔치에 열광하고 흥분하는 순간, 우리는 결국 순환구조에 참여하게 되고 고기파이의 위치에 서거나 토드의 면도칼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영화가 잔인하지만 그것은 단지 현실의 시선일 뿐이다. 자본을 위한 신자유주의를 휘둘루고 무서울 것 없이 내달리는 미국의 모습은 19세기 영국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자본이 꼭대기에 있음으로 모든 인간은 단지,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우리 또한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다. 토드의 런던 속 풍경은 결국 우리의 풍경의 은유다.


영화가 잔인하다고? 당신은 영화에서 지금을 본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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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 혜원세계문학 23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 혜원출판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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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레마르크의 망명 문학. 망명으로써의 문학보다 절망으로써의 문학에 중점을 두고 싶다. 무엇에 대한 절망인가? 도례하는 전쟁인가? 그럴까? 인간에 대한 절망은 어떠한가? 레비크가 그렇게 시니컬한 태도를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절망이라 생각된다.

 

부질없음에 목매고 현실을 망각하고 내일의 기대를 하는 인간. 학습되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절망. 라비크가 지나온 길의 모든 인간이 한번의 세계대전을 겪었으나 학습되지 못한 체 전쟁으로 달려 간다. 그 학습되지 못한 인간들은 오늘의 밥벌이와 옷차림, 설마라는 아닐꺼야라는 끝없는 자위만을 반복할 뿐 학습을 거부한다. 매달릴 뿐이다.

서사가 달리 프랑스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밖의 공간을 과거로 회상하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것은 학습되지 못하는 인간의 처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현재의 공간이 프랑스이기 때문이다. 히틀러로 인해 각국에서 피난민들이 몰려 와도 그들은 설마를 외치고 부질에 매달린다. 프랑스인들이나 프랑스 언론들의 설마와 다리한짝 보단 돈이 줄 내일을, 새로 차린 카페에서의 내일을 꿈꾼다. 그러나 그 내일은 전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망각한다. 학습되지 못한다.

그 학습되지 못함에 라비크는 벗어나는가? 그렇지 못하다. 그를 지탱하는 건 학습이 아닌 처절한 경험이다. 그로인해 그는 시니컬함을 가졌지만 결국 아둔한 인간으로써 돌아가는 것 뿐이다. 죽음이 지키고 있는 내일을 망각하고 과거를 지우기 위해 복수를 꿈꾸고 현실을 망각하기 위해 사랑을 한다.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한다. 그리 행동한다. 도래한 내일은 전쟁이다. 그는 수감소로 향한다.

개선문의 중요 이미지로 작용하는 개선문은 그들의 우둔함의 형성화다. 죽음이 다가오는 지금 과거의 승리의 기념품인 개선문은 단지 부질없는 돌덩이에 불과하다. 승리를 붙잡으려 개선문을 만들었지만 그들에게 필요한건 전쟁으로 인한 승리의 기념품이 아닌 전쟁을 일으킨 것의 학습이다. 개선문이 그 자리에 있음으로 그들에게 당연히 전쟁이 도래할 수 밖에 없다. 결국 개선문은 어둠에 잠긴다. 죽음에 잠긴다.

레마르크의 시니컬한 시선은 단지 거기서 멈추는 것일까? 과연? 그렇게 믿는 순간 우리는 파리의 다리 잃고 돈을 챙겨 기분 좋은 소년에 불과하다. 극도로 높아진 전쟁의 기운. 이것을 망각하면 우리는 결국 전쟁을 맞을 뿐이다.

지금은 단지 학습되지 않은 우리의 마지노선이다. 우리는 전쟁에 문탁에 서있는 아둔한 사람이다. 우리는 끝없이 제2의 개선문을 만들어 낸다. 한국의 딸 김연아, 대조영, 태왕사신기 등등... 우리는 한국의 승리에 매달리고 염원한다. 우리가 자랑스러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전투적 승리로 일루어낸 기념품이다. 그리하여 역사는 짜맞쳐지고 부족은 판타지로 매꾼다. 역사 속 인물들은 애국심을 위해 싸운다. 주신? 고구려? 애국심의 반향이다. 김연아는? 한국의 우수성을 끝없이 올리고 억지로 시선을 올리는 프로파간다로 소비된다. 김연아의 주 타겟은 아사다 마오고 우리는 열광한다. 무엇에 승리에 한국의 우수성에... 김연아는 애국을 했다며 자랑스러워 한다. 우리는 학습이 되지 않았다.

중국은? 일본은? 동북공정과 끝없는 독도문제.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닌 '등등등..' 끝 맺혀야될 문장. 주변국도 마찬가지는 우리도 어느정도 대응해야 되지 않나? 학습의 문제.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다. 그 어떤식이 전쟁으로 종결 될지, 거창하지만 평화로 종결될지 정하게 된다. 과연 승리로써의 대응, 동북공정과 다를 바없는 역사는 실종되어버린 사극으로 불리는 것들이 합당한 대응일까? 과연? 애국심으로 향하여 광분하면 그 뒤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지 우리는 망각해 버렸다.

레마르크의 시선은 멈춰선 안된다. 우리는 아직 학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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