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트 클럽
척 팔라닉 지음, 최필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이걸 절멸이라 생각하지 마. 그저 소형화일 뿐이니까.
  수천 년간 인간은 지구를 마구잡이로 손상시켜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날더러 원상회복시켜 놓으라는 거야? 수프 캔을 깨끗이 닦고, 다 써버린 엔진 오일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주워 담으라고?
  그걸로 모자라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묻혀 있던 핵 폐기물, 휘발유 탱크, 그리고 유독성 폐수를 전부 내 책임으로 떠미는 거야? - 파이트클럽 160p

  이것은 우리가 못내 무기력한 이유다. 우리는 이제야 태어났는데, 벌써 똥은 한 무더기인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배설하는 이들은 오늘 하루도 열심히 열심히 배설을 한다. 산더미인 똥 무더기에 기가 질려 고개를 돌리면, 먼저 태어난 것들이 열심히 항문을 놀려 되는 모습을, 아니 그것도 모자라 지니고 있는 온갖 구멍으로 배설을 하는 장관을 펼쳐 보이니 우리는 우울함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이 처참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 보지만, 우리의 선택이란 비루하기 그지 없어보이기만 할뿐이다. 배설에 동참하거나, 자신이라도 똥 사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거나, 온갖 사투를 벌여 고작 내 주변사람들을 구제하는 것. 그러니 우리는 못내 무기력하지. 탈출을 위한 돌파구를 떠올릴수록 무기력하니 우리의 주인공은 타일러 더든을 만날 수 밖에.

  우선 우리의 주인공이 살고 있는 똥 무더기에 대한 세심한 탐구. 척 팔라닉은 주인공이 살고 있는 곳이 도대체 어떤 곳인지 사려 깊게 그려낸다. 예를 들어 '이 빌어먹은 도시. 더럽게 높은 빌딩, 공기인 것 마냥 무더기로 쑤시고 들어오는 매연, 차에 치여 넝마가 된 개가 풍귀는 악취와 그 옆에 있는 토사물. 이곳에서 당신이 멋진 양복을 빼입고 호기롭게 신문을 사들어 펼쳐도 반기는 기사라고는 늙어 문드러진 국회위원과 남창 애인에 대한 기사일 뿐.'등으로 그려내지 않는 사려 깊음. 그런 묘사를 하지 않는 대신 작가는, 잿빛 땅위에 사는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정확히 말해 어떤 기술과 지식을 지니고 살아가는 지를 묘사한다. 그 묘사가 반복되고 세세할수록 그것들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세상이란 얼마나 더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을 테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 어떻게 하면 비누를 만들 수 있는지, 비누를 만들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영사기는 어떻게 켜는지, 웨이터들은 무엇을 하는지, 자동차 회사들은 어떤 방식으로 리콜을 결정하는지 이런 세세하고 전문적인 지식들. 이 지식들을 척 팔라닉은 사려 깊고 상세히 '서술'한다. 이 서술을 읽다보면, 이봐 이건 취재한 거야란 외침이 혹은 작가의 취재 대상의 모습과 어떤 장소에서 어떤 태도로 답변을 했을지가 그려진다. 그렇다 취재. 그렇다면, 소설 밖 현실 세계의 전문적인 지식들을 척 팔라닉은 모으고 모아, 소설 속 세계를 묘사한다. 저자는 취재를 통해 파이트 클럽의 하드한 세계를 그릴 수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역사가 자랑스러운 걸음으로 호기롭게 제시한 문명이란 얼마나 불필요한 야만적 폭력을 불러오는지를 증명하기도 한다. 우리의 사랑스런 디즈니 영화에 고작 한 프레임 삽입되어 우리의 인식을 제치고 우리에게 파고드는 음경. 비싼 돈을 들여 힘겹게 뽑아낸 허벅지 지방으로 만든 비누를 다시 비싼 돈 들여 사드리기. 비누를 만들기와 다이나마이트 만들기의 친밀성. 이것들은 자랑스러운 문명이 늘어뜨린 필요 이상으로 거대한 그림자와 같은 것. 이것들은 취재를 통한 것.

  우리의 주인공은 이 분열적인 세상이 밉고 미워 타일러 더든을 만난다. 타일러 더든, 그는 등장과 동시에 울타리에서 벗어나려 한다. 아니, 결국 울타리를 부수는 것만이 울타리 안의 어린 양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대뜸 자신을 후려 갈기라고 하고, 파이트 클럽을 만들고, 무정부 상태를 도래시킬 혁명을 위해 열심히 열심히 뛰어다닌다. 우리는 그의 거침없는 행보에서 주목할 것을 놓치면 안된다. 그가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하는지 말이다. 그것은 바로 문명과 함께 도래한 것들. 잘난 기술들의 잘난 폭력성들, 그것들을 타일러 더든은 슬기롭게 이용하여, 문명이 원치 않는 세상을 도래시키기 위해 분투한다. 타일러 더든의 영웅성은 세상의 이치를 노려볼 줄 아는 영악함에서 출현한다. 파이트 클럽 속 세상이 타일러 더든 한명 처치 못하고 허우적되는 건, 자신들의 양면성을 끝내 모르기 때문이고, 타일러 더든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허나, 우리는 타일러 더든의 장점은 오롯이 한계가 된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그가 꿈꾸는 세상으로 전진을 위해 이루는 공동체의 형상을 잊어선 안된다. 획일화를 외치는 독제자로써의 타일러 더든, 그것에 경도되는 파이트 클럽의 회원들, 그들의 꿈인 무정부주의. 파이트 클럽의 회원들은 문명의 위선에 분노하고 울타리를 부수기 위한 모든 행동과 사상을 행하고 외치지만, 타일러 더든이 주인공 뒤에 늘어진 거대한 그림자일 뿐인 것처럼 그들의 행동도 문명의 뒤로 늘어진 그림자일 수 밖에 없다. 타일러 더든의 행진은 문명이 모르는 척하는 온갖 기술과 처세를 자신의 방식으로 쓰여짐으로 써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전체주의에 빠지고 대책 없는 무정부주의에 빠진다. 이런 타일러 더든의 한계를 여실히 들어내는 것이 있다. 그가 파이트 클럽의 회원들에게 그려주는 미래이다. 아스팔트 위에서 일광욕, 부서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잔해에 숨어 사슴 잡기등으로 그려내는 미래. 왜 그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미래를 그리지 않는 것일까? 붕괴되고 상흔에 불과하더라도 문명을 쥐고 있는 이유는 타일러 더든은 이면에 불과하기 때문이고, 그는 그 자리에서 벗어날 마음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질책할 수 없지. 주인공과 타일러 더든의 첫만남. 어느 해안가에서 눈을 뜬 주인공, 바다에서 떠내려 온 유목들로 손바닥 그림자를 만들고, 그 손바닥 가운데에 앉는 타일러 더든. 세상이 '내 것이 아니'라며 버린 것들로 이루어진 형상의 가운데 앉은, 그 그림자의 정수인 타일러 더든.

  이제 척 팔라닉의 선택. 척척 진행되어 가는 타일러 더든의 계획. 조금씩 가까워져 가는 미래. 아찔한 주인공. 성역으로 올라선 타일러 더든의 목소리와 육신을 떠나버린 타일러 더든의 계획. 타일러 더든의 한계성과 그 한계성이 도래시킬 미래가 아찔한 주인공. 고군분투하지만 성실히 실패하는 주인공의 행동과 그럴수록 증명되는 타일러 더든의 목소리의 성스러움. 결국 힘겹게 올라선 빌딩에서 자살을 택하는 주인공과 애타게 그에게 달려오는 말라와 모임을 통해 알게 된 장암, 뇌 기생충, 흑새소 세포종, 결핵 환자들. 그들의 쩔뚝거림과 녹슨 휠체어의 끽끽 소리의 애달픔. 자 여기서 다시 우리는 이 빌딩 옥상으로 오기 전까지의 파이트 클럽의 세계를 그려보자. 주인공은 말라에게 조심할 것을 당부하며 이렇게 말한다. 머리를 박박 밀고, 얼굴에 멍이 있거나 이빨이 부러지거나 빠진 사람들을 조심해! 그러니까 소설이 우리의 머리에 그려놓은 세상의 모습은 위에 묘사된 남자들이 빼곡히 정리되어 충성어린 눈빛을 보내던 모습이다. 타일러 더든의 지하실에 있는 파이트 클럽 회원 수면실의 빽빽한 단정함! 자 이제 주인공이 자살을 하려는 빌딩으로 돌아가서 척 팔라닉의 선택을 보자. 주인공을 향해 뛰어오는 말라와 환자들의 형상을 그려보자. 그 불균일성, 통일성이 결여되고, 훈련으로 학습된 영민한 움직임을 지니지 못하는 그들의 뻑뻑한 몸짓. 이 형상은 소설이 쌓아오던 획일화된 이미지와 정면충돌하여, 척 팔라닉의 경쾌하고 매정한 문장에서도 코가 찡한 감동을 일으킨다. 이 순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책 표지에 적힌 '척 팔라닉의 작품은 지금부터 100년 동안 미국 문학의 클래식이 될 것이다'란 타임지의 호들갑을 읽으며, 타임지 자식들 나름 현명하자나라고 중얼거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척 팔라닉의 사려 깊음에 대한 감탄을 여기서 멈추어선 안된다. 모든 것이 붕괴되기 칠분 전 주인공은 떠든다.

  농도 구십팔 퍼센트의 질산에 그것의 세 배에 달하는 양의 황산을 섞는다.
  그럼 니트로글리세린 완성.
  칠분.
  니트로글리세린에 톱밥을 섞어 주면 제법 쓸 만한 플라스틱 폭탄이 된다. 많은 우주 원숭이들은 황산염화를 시키기 위해 니트로글리세린에 탈지면과 황산 마그네슘을 넣기도 한다. 물론 그러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 또 다른 우주 원숭이들은 니트로그리세린에 파라핀을 섞기도 한다. 내 경험으로는 파라핀은 최악의 선택이다. - 파이트 클럽 263p

그리고 모든 붕괴가 예정된 시간, 그 붕괴가 이루어지기로 약속되었지만 아무 일도 없이 잠잠한 침묵의 시간이 지난 후 타일러 더든은 떠든다.

  내가 그랬잖아. 파라핀은 최악의 선택이라고. - 파이트 클럽 265p

척 팔라닉은 멍청한 우주 원숭이들에게 기회를 한 번 준다. 자랑스럽게 여기는 문명은 더러운 똥 무더기를 동반하지만 그것을 정화할 수 있는 능력 또한 동반하고 있음 속삭이면서 말이다. 저자의 너그러운 마음에 감탄하면서 나는 파이트 클럽이 처음 세상에 나온 년도를 생각한다. 1996년, 그로부터 12년이 지났지만 똥 무더기의 부피는 무식하게 커지기만 한 것 같다. 아! 우리는 분노하고 붕괴해야만 할까? 하지만 난 그리 마음먹지 않으리. 이렇게 끝내주는 소설을 쓴 작가의 슬기로운 선택을 성실히 믿는 것도 나름 끝내준다는 생각이 들기에. 말라와 암, 뇌 기생충, 흑새소 세포종, 결핵 환자들이 불러일으킨 감동을 믿는 것도 끝내준다는 생각이 들기에.

  "모든 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어요."
  속삭임.
  "문명을 부숴 버리고, 세상에서 좀 더 나은 뭔가를 창조해야죠."
  속삭임.
  "당신의 귀환을 기대하고 있을게요." - 파이트 클럽 268p
 
  아차차! 소설의 마무리가 뭔가 의미심장하다면 그것은 소설이 그려낸 과정을 겪고 학습한 주인공은 이제 문명의 붕괴를 참된 방법으로 꾀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귀환을 기대해보는 것도 좋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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