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 아일랜드 - Shutter Island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가 시작한다. 새하얀 화면, 아니 '스크린'에서 배 한척이 새하얀 안개를 헤집고 나온다. 배에 타고 있던 데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척(마크 러팔로)은 셔터 아일랜드에 도착한다. 그들은 완벽한 밀실인 감방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여인을 찾기 위해 섬으로 온 것이라고 한다. 시간이 흐르고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폐쇄된 세계에서 스물스물 권력의 실체가 드러나고, 들추면 들출수록 음모들이 발견된다. 꼬리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황. 업친데 덥친 격으로 아픈 과거들이 선사한 트라우마가 데니를 습격하니, 데니는 미친 사람처럼 굴기 시작한다. 광인에 가까운 상태에 돌입해서야, 모든 음모의 근원으로 (보이는) 등대로 향한 데니는 그곳에서 진실을 알게 된다. 데니, 넌 원래 미친놈이란다. 아이쿠야!

  반전을 향해 당찬 걸음으로 돌진하는 스콜세지의 신작 셔터 아일랜드. 반전의 충격이 너무도 달콤한지, 신기할 만큼 너른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반전에 대한 이런 저런 말들도 많이 쏟아지고 있다. 내가 셔터 아일랜드를 보고 신기했던 점 역시 반전과 복선에 집중된다.

  첫번째로 반전. 이 영화의 반전이 그리도 놀라운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다. 지금의 기세로는 데니는 카이저 소제, 말콤 크로우, 오대수와 어깨를 나란히 할 것만 같다. 그럼에도 난 셔터 아일랜드의 반전의 강도에 대한 찬사에 동의하기가 힘들단 생각이다. 스콜세지는 그의 영화 속 조 페시의 수다만큼이나 쉴 세 없이 복선들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복선의 섬에서 어떻게 반전을 고백의 순간까지 미루고 미룰 수 있는 것일까?

  두번째로 복선. 셔터 아일랜드에서 가장 날 자극하는 것은 복선이다. 편집 규칙 무너트리기, 한 시퀸스 안에서 두 가지 상황이 전개되지만 하나의 상황인 것처럼 시치미 때기, 앞 쇼트와 뒷 쇼트가 논리상 맞지 않기, 재촬영은 불가하니 있는 것으로 대충 이어 붙인 척하기, 여기서 조명 쏘고 있다네를 드러내기, 프린트 보관 상태가 엉망임을 증명하는 화면에 비 내리기(스크래치)와 뻥 뚫린 구멍, 여러분은 프로세스 쇼트가 무엇인지 보고 계십니다 등등. 이것들이 셔터 아일랜드에서 복선으로 기능하는 것들이다. 복선인 동시에 데니가 세상을 어떻게 지각하는지에 대한 구현에 해당하기도 한다. 이 복선인 동시에 데니의 지각의 구현이기도 한 것들을, 난 b급이라고 하고 싶다. 그러니까 로드리게즈가 '응 이건 b급 영화 따라한 거 맞아'라는 선언으로 사용한 이런 저런 효과들을 스콜세지는 데니의 정신상태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극 중 내리는 비를 이용하여 화면에 비(스크래치) 내린다 정도로 좀더 완곡하게 표현했을 뿐이지, 그 작위성은 제법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에게 복선에 대한 궁금증은 왜 이 복선들을 외면하는가이기도 하다. 첫 번째 시퀸스에서 데니와 척이 대화 할 때, 이어 붙는 쇼트들은 편집 규칙에서 조금씩 어긋나 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이 시퀸스에서부터 어떤 조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 아니어서 '스콜세지가 왠 풋내기 짓?' 정도의 감만 잡았다. 그러나 데니와 척이 병원의 환자들을 조사할 때는 완벽히 감을 잡게 된다. 도끼로 남편을 죽였다는 여인은 인터뷰 도중 물을 한잔 갖다 달라고 한다. 그녀는 척에게서 물 컵을 받아 들고 마시는 '시늉'을 한다. 척에게서 컵을 받아든 뒤, 마실 때 그녀의 손에 컵이 들려 있지 않고, 다음 쇼트에서 손을 내려놓을 때는 컵이 들려 있다. 이건 누가 봐도 옥에 티 정도로 치부할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대부분 반전을 눈치 챘을 거라고 생각했고, 극장 안은 술렁거릴 거라고 예상했지만 잠잠함으로 반전을 때렸다. 내겐 이 반전이 더 충격적이었다. 이 이상한 반전은 두 번째 관람 때 역시 벌어졌다.

  왜 관객들은 이 괴상한 복선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일까? 척 봐도 딱 이상한 장면에 왜 침묵하는 것일까? 스콜세지의 이 당찬 걸음에 왜 태클을 걸지 않을까? 반전 전까지 뒤를 돌아보게 하지 않는 이 당찬 이야기. 이 이야기는 무엇으로 이루어졌지? 수많은 음모들, 장르의 기호들, 이것들 저변에 깔려있는 사전에 합의 된 약속이라는 윙크. 나치와 관련하여 파급되는 이런 저런 것들. 공산주의 침공이 파급하는 이런 저런 음모들. 적이라 상정한 것들과 같은 짓을 하려는 국가의 이런 저런 음모들. 귀신들린 것 같고, 한번 들어오니 나가기 굉장히 힘든 섬. 광고용 그림처럼 화목한 척하는 폐쇄된 세계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권력의 실체. 2차대전 참전 후 얻은 이런저런 트라우마. 탐정이란 것이 파급하는 이런 저런 기호들.(이 중에 혹시라도 심슨가족에서 다루지 않은 것이 있나?) 이런 수많은 약속들은 서로 꼬리를 물고 머리를 물고 엉키고 엉켜, 스스로가 입증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약속으로 넘기고, 다른 약속이 증명 못하는 것을 자신이 받아 뭔가 그럴싸한 실체를 만들어낸다. 이 과정은 데니가 당찬 상상력으로 만드는 이야기의 생성과정과 많이 닮아 있다. 사전에 약속된 것들을 토대로 눈앞의 현상을 마구마구 집어 삼키기. 이 반성 없는 폭식 앞에서 음모들은 길게 꼬리를 빼고 서로를 꼬아, 스콜세지가 (아마도) 일부러 헝클어뜨려 놓은 것들을 봉합시켜 버린다. 이때 코니 박사는 안타까움에 속삭인다. "데니 당신은 전에도 지금처럼 치유된 적이 있지요. 하지만 당신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버려요"

  사전에 합의된 약속들을 착실하고 순진무구하게 믿어버리는 사람들. 눈앞의 것을 외면하는 사람들. 스크린에 무엇이 투사되는가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사람들. 이 이상한 상황은 코니 박사의 말처럼 다시 반복된다. 사람들은 셔터 아일랜드는 영화가 끝난 후 시작된다고 한다. 반전을 알기 전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화의 논리에 자신이 깔고 있는 음모들을 투사하여 받아들였다면, 반전을 알고 난 뒤는 반전을 지팡이 삼아 모든 어긋남을 봉합시켜 버린다. 관객은 스스로 무언가 잘못 되었지만 조금도 문제 될 것이 없는 상황으로 빠져버린다. 난 이 상황에서 셔터 아일랜드에서 3번 반복된 쇼트가 생각난다. 옆으로 누워있는 데니의 얼굴을 같은 사이즈와 같은 앵글로 찍은 쇼트들. 마치 쇼파에 누워 티비 보는 것만 같은 데니의 얼굴, 그런 태도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관객의 게으름. 코니 박사의 탄식은 이 때문에 발생한다. 이 탄식이 깊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장르의 나선을 확인 후, 그 나선에서 탈출을 시도하고 탈출하는 인물들이 장르 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가장 가까운 예로는 예언자의 말리크. 예언자의 결말은 속편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는데, 만약 속편이 만들어진다면 말리크는 장르의 나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스콜세지의 대답은 '아니다'일 것이다. 이것은 보는 이들과의 약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장르의 한계를 지목하는 것일까? 아니면 영화의 한계를 지목하는 것일까?

  나는 셔터 아일랜드를 생각할수록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이 떠오른다. 로이 오빈슨의 in dreams가 울려 퍼진 뒤, 프랭크 부스는 일당과 제프리를 이끌고 우리 모두 섹스를 하자며 외치고 신나게 웃다가, 프레임 안에서 감쪽 같이 사라진다. 공간과 웃음만을 남긴 체. 웃음은 길게 늘어지고, 프랭크의 실체는 사라진다.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음모들, 그 음모들은 갑자기 사라진 뒤 여운을 길게 빼곤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약속들은 꼬리를 물고 고개를 쳐든다. 음모(프랭크)가 장악하는 세계에서, 훔쳐 본 것들을 이어 붙여, 마치 약속한 거처럼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이야기에 범죄 이야기를 투사하고 탐정을 자처하는 제프리는 너무 순진해서 멍청해 보일 정도로 장르의 나선에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 제프리는 어떻게 그 나선에서 빠져 나오는가? 바로 사건을 훔쳐보던 그 자리에서 프랭크를 쏴 죽이고 나서야 그 나선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그리고 서툰 이야기의 결말 같은 해피엔딩으로 영화는 끝나면서, 프랭크를 쏴 죽이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고백한다. 스콜세지는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프랭크를 죽이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프랭크를 죽이지 않는 이상, 영화를 뚜렷하게 헝클어뜨려 놓아도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마도 뭔가 심각하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화도 (투사된 영화를 받아들이게 하는 약속들을 품고 있는) 세상도. 우리는 많은 것을 보았고 알고 있지만, 괴물이 되어 죽는 것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데니의 마지막 물음에 쾌감을 느끼는 이유 또한 그 때문일 것이다. 데니의 물음을 어떠한 고민 없이 극 중 흐름과 뉘앙스에 기대어 의미심장함이란 자극으로써 소모한다. 이때 심각하게 당황하고 안타까움에 눈물을 글썽이는 건 영화 속에 있는 시한 박사와 코니 박사뿐이다. 스크린을 마주하고 있는 관객은, 음모가 드러내지 않고 있는 거대함에 감동하는 것처럼 그 물음에 감동한다. 스콜세지는 이게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의 문제제기에는 공감하지만,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에는 찬성하기 힘든 것 같다. 스콜세지는 프랭크를 쏘아 죽이라며 많은 상황을 조성하긴 하지만, 그 거침없는 진행의 과정에서 프랭크로 영화를 장악해버린 것 같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스콜세지의 냉소인가? 스콜세지의 영화 저변에 깔려 있던 서늘함의 정체가 결국 냉소였던 것일까? 아니 그보다 스콜세지는 앞으로도 영화를 이렇게 만들 것인가? 솔직히 난 여기서 어떤 단언하기가 힘들다. 셔터 아일랜드가 스콜세지의 비관인지 냉소인지 안타까움인지는 다음 영화가 결정할 것 같다. 그래서 기다릴 테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거장인 노장의 다음 영화를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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