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멋진 하루 - 아웃 케이스 없음
전도연 외, 이윤기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전에 영화를 찍기 위해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어떻게 해야 좀더 비극적일까?'이다. 어떻게 하면 인물들이 좀더 비극적일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영화를 볼 사람들에게 비극이란 감정을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 그 전달된 비극을 어떻게 분노로 치환할 수 있을지 고심했다. 나는 그 당시 알게 모르게 항상 분노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명박은 대통령이고, 오세훈은 서울시장이고, 사람들은 점점 무미건조해지고, 헛된 선택을 하거나 아예 방관해버리고, 사방에서는 먼지를 일으키며 공사만을 하고, 말도 안 되는 터전에서 좀더 빡세게를 주문처럼 외우고 그것을 젊은이들에게 강요하는 사람들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생각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이처럼 '핵폭탄존재의목적은끝장십억볼트필요'를 외치고 다닌 것 같다. 그 대사처럼 영화 속에서 모든지 끝장내려고 열심히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면서 시간을 보내던 중, 내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군이 대사보다 훨씬 많이 입에 달고 다니는 좋은 세상에 대한 믿음말이다. 이 깨달음은 어느날 불쑥 찾아 온 것이 아니다. 몇몇 계기가 있었는데, '멋진 하루'도 그 중에 하나이다.
영화는 차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남녀를 비추며 시작된다. 그들은 전형적인 한국사람인 듯 돈과 부동산, 투기를 해서 한탕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대화를 하며 은근한 시기를 들어내는데, 그 남녀의 대화 속 주인공은 꼭 '희수'와 같다. 희수는 지나치는 사람처럼 소박히 등장한 것이나 영화에서 별다른 관계가 없는 남녀가 지칭하는 사람과 흡사한 인물로 그려지듯, 별로 특징될 것이 없는 한국사람이다. 방어적이고, 계산적이고, 공과 사에 대한 구별을 중요시하는 인물 말이다. 한국에서 특히 서울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전형을 띄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희수가 병운을 만난다. 병운은 희수와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공과 사의 경계가 없는, 그래서 자꾸만 희수의 화를 돋우는 인물인데, 병운은 희수의 화만 돋우는 것이 아니라, 희수의 태도가 도시인의 덕목이라고 생각할 관객 대다수의 화를 돋운다. 어중간한 병운의 태도 때문에 잔뜩 화가 난 희수와 관객은 화가 났기에 그들의 하루를 멋지게 받아들일 수 있다. 돈을 갚고 받기 위해 서울을 헤매는 병운과 희수는 여러 사람을 만나는데, 만나는 사람이 늘어갈 때마다, 병운을 바라보는 희수의 시선을 누그러들고 관객의 시선 역시 누그러들고 결국엔 병운의 진심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이 더욱 멋진 것은 서울이란 도시에서 자신들만의 벽을 만들어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명랑한 발걸음으로 찾아가, 반대편 벽에 있는 사람과 만나게 하면서 명랑하게 경계를 허문다. 영화는 그 허물어지는 경계를 희수의 변화하는 태도로 조금씩 드러내고, 결국 영화 말미에 가서는 희수는 자신의 벽을 넘어 다른 벽 뒤에 살고 있는 사람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그러한 선택을 택하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가 정말 멋진 것은, 단순하게 변화하는 희수를 나열하고, 이래야만 멋지다고 관객을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희수의 자리에 위치시킨 다음 희수가 진심으로 상대에게 응원을 보낼 때쯤 관객도 그러한 희수의 응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하는데 있다.
영화는 희수의 변화를 들어내기 위해, 서울을 돌아다니며 고운 순간들을 잡아낸다. 주행중인 차 안으로 쏟아지는 햇살이나, 평범한 건물의 난간에서 일광욕을 하는 시간, 긴 버스가 커브로 인해 앞 칸에 탄 인물이 가려졌다 들어나는 등 우리가 별다른 주시를 하지 않고 지나갔을 순간들을 끄집어내어 희수와 병운의 길을 감싼다. 이렇게 알지만 잊거나 주시하지 않았던 것들은 우리가 쌓아 올린 벽에 균열을 가하고, 벽 쌓기를 멈추고 무언가 느긋이 응시하고, 그 응시를 통해 본연의 가치를 찾는 순간과 관계를 드러낸다. 이 드러남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기억에서 웅크리고 있던 것들까지 흔들어 깨워 어느새 희수의 변화와 병운의 삶의 태도를 받아들이게 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이윤기 감독은 이렇게 건조하고 냉랭한 땅과 그 땅 위에서 발을 딛고 있느라 삭막해진 희수와 관객에게 병운과 이 땅위에 고운 순간들을 응시하는 시간을 보내 준다. 그리고 정말 멋지게도 관객은 병운의 삶의 태도를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 땅위에서의 이익과 합리와는 다른 길을 걷는 병운의 삶의 태도에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을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은 내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근엄한 목소리와 충격적인 장면들로 사실을 들추며 영리한 짜임세와 흐름으로 관객을 괴롭히고 괴롭힐수록 좋은 길로 이행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좋은 세상을 믿는 고운 마음과 같은 고운 태도로도 관객에게, 자신들과는 다른 삶의 태도를 긍정할 수 있게 만든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정말 큰 가르침이었다. 분노를 일으키는 대상에 대해 분노로 대응하며 나를 망치지 않아도, 좋은 세상을 믿는 고운 마음을 유지하고도 충분히 혹은 더 따스하게 그 믿음으로의 이행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생각이 그쯤 미치자 결국 차에서 내리지 않는 희수에 대한 아쉬움 또한 바뀌게 되었다. 차 안에 앉아 있는 희수, 영화를 보기 위해 앉아 있는 우리, 영화가 끝난 후 일어나야만 하는 우리, 극장 안에서든 거실에서든 영화가 끝나면 일어나야만 하는 우리, 즉 차 안에 희수와 관객을 남겨둔 이윤기의 사려 깊은 배려는 선택을 우리에게 맡긴다. 차문을 극장 문을 대문을 방문을 열고 우리가 어디로 갈 것 인지에 대한 선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