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 그의 아내 - 아웃 케이스 없음
박희순 외, 신동일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신동일 감독의 <신성가족>을 보면, 가족사진이 있는 액자가 깨지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신동일 감독의 프레임은 깨져 있다. 이미지들이 주는 날 선 느낌은, 애초에 프레임이 깨져있기 때문이다.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영화 속 인물의 눈이 잘려 나갔다면, 신동일 감독의 영화는 보는 이의 눈을 잘라낸다. 인물들의 바스트를 잡은 단순한 장면에서도, 불편하고 괴로운 건 상처 나는 눈 때문이다.

깨진 액자에서 알 수 있듯, 평범한 이미지(가족사진)는, 없는 듯 그것을 보호하고 있던 ‘것’의 균열과 파괴로 변형된다. 망각했던 것이, 혹은 자신의 존재를 망각 시키던 것이 균열을 일으키며 존재를 드러내고, 그 들어난 존재로 인해 안에 있는 이미지는 변형된다. 평범한 이미지는 깨진 유리로 인해 변형되는 데, 그 변형은 본질을 들어내는 상징이 된다. 중요한 건, 깨진 액자 유리로 인해 변형되는 이미지에서 본질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결국 보는 이가 그렇게 받아들인 다는 것이다. 이 받아들임에는 약속이 전제되어 있다. 우연히 떨어진 액자가 깨짐으로 인해 파국이 다가온다는 것은, 보편적인 약속이다. 약속이 뜻하는 바는, 우리가 본질을 애초에 알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보편성의 연쇄 속에서, (약속되어 있는)균열을 일으켜 우리가 알고 있지만 망각한 것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두 남자와 한 여자라는 다소 친숙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의 흐름 또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허나, 영화 오프닝에서 본 결혼식 이미지, 영화는 그 박제된 이미지들을 감싼 망각된 것을 부시고, 본질적인 것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끄집어낸다. 앞서 말했듯 영화의 프레임은 깨져 있다. 깨진 유리가 직접적으로 제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물 뒤의 책장, 숏의 지연, 갑작스레 말을 멈추는 인물, 연극 같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애매한 구도, 직접적인 정치적 언급 등은 우리가 보고 있는 이미지에 낯선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 낯선 장치들은 영화의 숏이 제시하는 주된 정보는 아니지만, 주된 정보에 섞여들어 낯설음을 일으키고, 그로인해 눈앞에 제시된 이미지에서 안도하지 말 것을 환기시킨다. 깨어진 유리는 숏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인물들이 마주보고 앉아 대화를 나눌 때, 마스터 숏이 등장한 후 쪼개서 각 인물들의 독립된 숏으로 이어 들어갈 때, 항상 180도 선을 넘어서 찍는다. 이상하리만큼 180도 선을 넘음으로 생기는 어색함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러한 편집이 성립해 버린다. 허나 성립함에도 낯설음이 발생하게 된다. 단순한 대화의 연결 자체에 낯설음이 발생하고, 영화의 흐름에 안주하는 것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에서 일으키는 경각심은, 영화에서 지목하는 정치적 사실만이 아니라, 영화에 안주하는 태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예준과 지숙이 헤어숍에서 분식을 먹을 때, 그 밑에 깔려 있는 신문의 기사들은, 영화를 관람하는 이들이 극장 밖의 세상에 차단되는 것을 경계하며 끊임없이 현실 문제를 끌고 온다. 혹시라도 이 영화가 아무리 생각해도 불편하다면, 영화에서 경각심을 일으키는 것들이 보편성을 띄고, 우리의 삶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어, 삶 속 이미지들을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보게 된 이유들 중 하나는, 어디선가 책장을 미장센하려면 바로 이 영화에서처럼 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영화의 책장은 망각된 과거를 고스란히 박제해놓은 상징이다. 그런 책장 앞에서 예준은 가장 추잡한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책장은 깨어진 유리 역할을 하면서도, 보편성을 띄게 된다. 영화에서 깨어진 유리 역할을 하는 많은 것들이 상당히 보편성을 띄는데, 이러한 보편성으로 인해 이것들이 일으키는 경각심은 영화의 밖으로도 이어지게 된다. 떡볶이 밑에 깔린 신문, 무심코 켜놓은 TV, 손대지 않은지 오래된 책장은 보편성을 통해 우리의 삶을 환기 시키고, 우리는 알고 있지만 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면은, 영화에서 언급하는 정치적 주제보다 보편을 부수고 환기시켜 실제 삶의 보편적인 것의 표정을 바꾸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지숙의 헤어숍에서 예준이 지숙의 손가락을 빨 때, 유리창이 부셔지는 소리가 난다. 깨진 유리 파편을 볼 순 없다. 여기서 깨어진 건 유리창보단 영화의 프레임이다. 끔찍하게도 영화 속 인물들은 깨어진 것을 알아차린다. 이것을 기점으로 가려진 사실은 들어나고, 예준의 처단으로 향하지만, 영화는 이를 (어떻게 보면)모호하게 처리한다. 허나 이 모호함은 극심한 아리송함을 남기지 않는다. 영화는 끊임없이 우리가 ‘알고 있지만’ 망각한 것을 일깨우며, 그것들을 쌓아왔다. 그로인해서인지 이 후반부 시퀸스는, 모호함보단 넉넉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개입시키기 수월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이 시퀸스에 질문을 던지고 파고들기보단, 그 시퀸스를 보며 느꼈던 것을 간직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남의 것을 쉽사리 써먹는 것 같아, 겸연쩍지만 그럼에도 이동진 기자가 이 영화를 환상적이리만큼 잘 요약한 문장이 있어 안 적고는 못 배기겠다. ‘죽비처럼 내리친다.’ 정말 죽비, 아니 깨져서 날카로운 유리방망이로 눈을 후려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호되게 후려 맞은 상처투성이 눈이 어느 때보다 맑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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