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두비 - Bandhobi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처음 ‘반두비’를 보곤 놀랐다. 이유는 다소 관념적인 대사를 내뱉을 때도 십대 소녀의 핍진성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과 ‘나의 친구, 그의 아내’보단 후퇴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난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본 후 방문자를 보았다. 그래서 두 영화사이의 발전을 확연히 느꼈던 터라 ‘반두비’의 후퇴는 다소 아쉬울 수밖에 없다. 허나 ‘반두비’에서 후퇴했다고 생각되는 점들을 단순히 단점이라고 하기 힘들어진다. 예를 들어 소격효과, 신동일 영화의 인장 중 하나인 관객에게 말을 걸기 장면들을 들 수 있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영화 후반부 지숙은 예준에게 올라탄 체, 관객에게 말을 거는 장면은 지숙의 관능적인 몸짓처럼, 천장을 덥쳐 가는 불길의 아찔한 광경처럼 완벽했다. 개인적으로 ‘방문자’에서 아쉬웠던 점들이 이상적으로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반두비’에서의 소격효과들은 직설적이고 투박하고 생각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그 아쉬움을 함부로 단점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 소격효과 장면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곳에 감독은 사라지고 관객에게 말을 거는 인물만 남는다. ‘반두비’에서의 소격효과는 현실에서 들을 수 없는 목소리, 볼 수 있으나 외면하던 인물들에게 영화의 한 부분을 고스란히 넘겨주는 감독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인터뷰 자리에서 멋있는 척 ‘인간이나 삶에 비해 영화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쉽사리 내뱉고 마는 감독들과 달리, 연출자로써의 욕심을 털어내고 사회적 약자들과 그들의 목소리를 위한 감독의 윤리적인 모습이 가장 빛나는 곳이, 영화에서 다소 아쉽다고 생각되는 그 부분이다.




  아쉽다고 생각되면서도 곱씹으면 절대 단점이 될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이는 ‘반두비’에서 굉장히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된다. 바로 관습적 전개에서 떨어지는 영화의 밀도다. ‘반두비’에선 관습적 전개에서 느껴질 만한 흔한 긴장감 같은 것이 유발되지 않는다. 이것은 연출력의 미흡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좀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




  그 아쉬움을 좀더 곱씹게 하는 씬이 있다. 민서와 카림이 바닷가에서 밤을 보내고, 카림의 작업장으로 돌아온 뒤 카림이 가장 행복했다고 고백하는 순간 경찰이 들이 닥쳐 카림을 체포한다. 불운한 인물이 가장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전개는 뮤직비디오들에서 몇 번인가 본 기억이 있다. 그만큼 관습적인 전개였고, 그러한 전개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느낄 수 없지만, 이러한 장면들은 연출력의 부재란 말을 하기 힘들게 한다. 카림이 체포된 뒤부터, 민서는 프레임 아웃하고, 목소리만이 프레임 안으로 파고든다. 격렬한 헨드헬드로 불안감이 증폭된 카메라는 카림과 일정거리를 두고 서 있다. 카림은 울분이 터짐에도 거리를 두고 있는 카메라로 인해, 관객은 그 상황에 완전히 빠져들기 보단 응시하게 되고 나아가서 관습적 전개, 그 자체를 보게 된다. 재미있는 건 이 씬에서 민서는 카림이 체포 직후 한참을 프레임 밖에서 목소리만 외치다가 나중에서야 프레임 인하게 된다. 프레임 인 하기 전까지 민서의 위치는 관객과 동일하다. 그리고 민서가 프레임 인을 한 뒤, 그녀는 관찰자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 상황을 파고든다. 여기서 민서가 프레임 인 한다는 것, 그녀가 관찰자의 자리를 내던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이유는 극의 전개를 보면 민서의 프레임 인 후, 가뜩이나 자아정체성이 뚜렷하던 그녀가 완전히 주체성을 얻게 된다.




  관찰자로써 민서를 생각할 때 중요한 씬. 그것은 반두비에서 보고 있기 힘든 장면 중 하나인, 민서가 카림에게 유사 성행위를 해주는 장면이다. 여기서 민서에게 유사 성행위를 받던 카림은 갑자기 민서의 방을 박차고 나가고 민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떠나는 카림을 바라본다. 이 장면은 누구에게나 불편하면서도, 이성적으로는 민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자신이 카림에게 해준 것은, 대딸방에 손님으로 온 남성들은 모두 좋아한 것이었기에 카림도 당연히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허나, 카림이 민서의 행동을 뿌리쳤을 때, 민서의 관성적인 삶 속의 태도가 거부당했을 때, 당연한 운동이 중단을 요구 되었을 때, 민서는 화내거나 울거나 망연자실하지 않고 ‘어리둥절’해 한다. 자신의 질서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이때부터, 어리둥절한 민서는 관찰자의 위치에 선다. 영어 강사와 카림이 대화 할 때 민서의 위치, 카림과 다툰 후 하인즈를 바라보는 민서의 위치, 결국 불법 체류자가 된 카림이 바닷가에 가서 절규할 때 민서의 위치. 카림이 민서의 방을, 민서의 관성적인 삶을 박차고 나간 이후, 민서는 관성에 따라 꾸역꾸역 운동하는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관성적인 세상을 넘어서 관객의 위치에 자리해 관성적인 전개(카림 체포 씬)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 앙상한 얼개를 봐 버린 민서는 당연히 그 나선에서 벗어난다.




  관성과 관습에서 벗어나게 된 민서는 관성과 관습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살고 있는 이들을 호되게 질책한다. 그 후, 학생으로써 관성적인 삶을 살 것을 종용하는 학교에 도착하여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 나갈 것을 천명한다. 그때 민서가 내뱉는 말은 ‘인생이 더 큰 학교자나요’이다. 다소 낯간지러울지 모르겠으나, 전개의 얼개를 바라보고 그것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대사인 것이다. 그 후 민서가 마지막으로 다다른 것은 방글라데시 식당. 그곳에서 한상 가득 방글라데시 음식을 시켜 놓고 이것저것 맛보던 민서는 갑자기 자신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힌다. 그 행동은 카림을 떠올리는 행동인과 동시에, 관객(=민서)를 간질이는 것이다. ‘친구를 웃게 하는 자는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 이 말을 민서에게 전해준 카림의 나라에선 친구를 초대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 민서의 그 간질임은 새로운 질서로의 초대라고 생각한다. 관객은 민서와 함께, 그 관성적이고 관습적인 세상이 인물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았고, 그 앙상한 얼개를 함께 목격 했으며, 민서가 어떤 길을 걷는지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민서와 ‘함께’ 보았기에 ‘반두비’ 속의 관습적 전개의 앙상함이 단점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우리가 그 얼개를 보는 것은 ‘중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얼개’를 보았다. 그렇다면 영화가 끝난 이후는? 보고 난 이후는? 민서는 그 이후를 함께하자며 우리를 간질이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가 프레임 인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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