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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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 이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아니 체감한 것으로만 따지면 어찌나 긴지 가늠하기 힘들다. 지난 시간들을 정리하려 머리를 굴리지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소고기 파동, 촛불, 물대포, 비정규직, 부동산 투기, 사채, 재개발, 낙하산, 유해도서 등 온갖 이미지들이 쏟아져 내리는 시간을 쉽게 정리하기 힘들다. 그 지난 시간에 대해 공안정국이란 별명을 붙이고 당선자에게 쥐새끼 등의 별명이 붙었다. 한나라당이나 자유선진당 등이 ‘잃어버린 10년’을 외쳤지만, 대선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은 40년은 족히 지난 것만 같다. 아 그 길고 길게 느껴지는 시간 속 광경은 결국 쑥대밭이다. 말 그대로 괴물 한 마리가 탄생되어 남한을 한껏 짓밟아 놓은 것만 같다. 쿵쾅! 쿵쾅!

  솔직히 최근까지 삐쳐있었다. 그 끔찍한 스펙터클의 시간을, 그 시간을 이루어낸 장로 대통령을 국민들이 원해 뽑았기 때문이다. ‘그래 이번에 호되게 당해봐라’를 곱씹었지만 그러한 원한은 결국 부질없는 것임이 곧 들어났다. 이번 대선의 결과는 남한 사람이 극한의 이기적이고 악랄한 놈들 투성이라서 생긴 것이 아닌 구조 문제였다. 결국 또 그놈이 문제였다. 그러한 구조 속 명박 경제는 기류였고, 질서였고, 대의였다. ‘이기적’의 척도로 따졌을 때 현 기류상 ‘경제만 살려라’가 행복 찾기의 유일한 척도였다. 누굴 원망하리. 지금 생각해도 ‘경제만 살려라’아니 ‘경제만 살아라’는 무지몽매한 선택일 뿐이다. 그러한 아둔한 선택의 원인을 주변에서 주어보고 들은바, 한국민이 부자를 좋아해서란 말과 한국민의 계급적 이해도가 어리석기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개인적으로 후자의 견해가 적확하다 생각되고 눈에 좋고 귀에 좋다. 투표자 대부분이 자신의 계급을 올림해서 가늠했기에 그 터무니없는, 소수를 위한 공약이 자신의 것으로 들렸다는 것이다. 전부 중산층은 되는지 알았던 모양이다. 그로인해 집 없는 사람이 뉴타운 공약에 만만세를 외쳤다. 집 떨어져라라고 빈 주문보다 허무맹랑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래서 집 잃고 가게 잃고 패인 주름을 더 패가며 넋을 잃어도 현재의 지옥은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소망교회에 가서 하느님의 시험이라 자위해도 현실은 지옥일 뿐인 것이다.

  지옥 속 우리는 원망의 대상을 찾게 되고 그 대상을 찾아 온갖 미움을 쏟아 부으며 안도를 맛본다. 그런 원망의 대상은 개인일수록 빛을 발한다. 하지만 IMF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발판을 마련한 김대중 혹은 탄핵 돌파 후 무서울게 없는 노무현의 성장에 대한 꿈을 위한 FTA 등 개인의 오인된 선택으로 ‘괴물의 탄생’을 마련한 것 같지 않다. 또 이명박이 태생 자체가 괴물 같은 놈이라 지금의 지옥을 만든 것 같진 않다. 우석훈 박사의 ‘괴물의 탄생’의 말미 주목할 만한 말이 나온다.


“한국 경제는 설날 덕담으로 ‘부자 되세요’라고 말하던 바로 그 1990년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의 어느 순간부터 붕괴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기가 ‘괴물의 탄생’을 마련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부자 되란 말인 즉 행복하게 살라는 말일 것이다. 허나 부자 되란 말에서 행복하란 말을 찾아야 했을 때, 부자가 행복하기 위한 하나의 척도가 아닌 절대적 조건으로 자리바꿈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부자 되세요’의 폐해를 지적하는 우석훈의 말이 김정은을 때려 죽여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명박 역시 때려 죽여야 된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명박이 다소 멍청하고, 다소 악질적이고, 심할 정도로 유머감각이 없지만 그가 괴물의 실체는 아니다. 괴물의 실체는 우리에게 있다. 땅값을 따지고 올리기 위해 발악하고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고 ‘부자 되세요’를 덕담으로 씹어 뱉은 우리가 괴물인 것이다.

  우석훈 박사의 한국경제대안 시리즈 마지막 권인 ‘괴물의 탄생’은 괴물이 탄생할 수 밖에 없는 원인을 찾고 탄생의 순간을 추적하여 해체에 대한 방법을 제안한다. 1부에선 세계 경제의 흐름과 경제이론의 역사적 변화를 짚어 본다. 그 과정 속 경제를 신봉하는 한국에서의 경제학의 수준을 가늠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꼬마들도 경제란 단어를 입에 담는 남한의 경제학 수준은, 순수이론가는 거의 전멸하였고 ‘배운 대로 응용’하고 ‘단순 (이론)수입’을 하는 학자들이 한국을 채워버린 현실을 맞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한국 경제학자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전문가’임을 내세우며 실속을 차지하는 이들을 지칭한다. 아 자랑스러운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여. 그러한 ‘단순 수입형’ 학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한국은 기존 이론들을 한국 실정에 맞게 변화 대입 시키는 것이 아닌, 단순 대입과 오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애덤 스미스, 캐인즈 등의 경제학자들은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증발한 체 문장과 공식만 남아 오독되고 잘못 알려져 왔다. 특히 한국에서 내세우는 애덤 스미스는 악용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시장주의는 현 한국에서 말하는 시장주의와는 성격 자체가 다르다. 쉽게 말해 현 한국에서 말하는 시장주의란 5% 남짓의 상위 계층의 사람과 시장만이 남는 시장주의일 뿐이다. 이러한 차이는 국부론을 읽어만 보아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에 악용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괴물의 탄생’ 속 우리가 오독, 악용하는 애덤 스미스란 이름이 갖는 가치와 진가가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하는 말이 있다.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가 위대한 건, 그 전 2세기 동안 지배적이던 중상주의를 깬 것도 있지만 국민 경제 프레임을 개괄한 것도 있다. 중세를 지배하던 ‘귀족’들을 ‘지주’라는 이름으로 격하시켰고, 농노에서 노동자로 새로운 시민이 될 사람에게는 ‘임금’이라는 장치로 그들이 움직일 공간을 마련해 주고, 20세기 내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기업들을 향해 ‘견제’란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조율한 정부의 위상을 조세와 무역, 국방 등 활동을 통해서 중요한 조정자로 올려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조율할 정부의 위상을 조세와 무역, 국방 등 활동을 통해서 중요한 조정자로 올려놓은 것이다.”

이것이 모든 걸 증발 시킨 채 ‘시장주의 창시자’로 불리던 애덤 스미스의 가치다. 이렇게 1부는 한국 경제학의 수준과 한국 학자들이 오독 악용한 순수이론과 이론자들을 반추해보며 지금의 한국 경제란 것이 얼마나 앙상하고 잔혹한지를 들어내고 있다.

 

  2부의 초기는 신화의 파괴로 구성되어 있고, 후기는 신화 위에 건축된 한국 자본주의의 폐해와 그로인한 붕괴에 대한 시나리오로 구성되어 있다. 2부 초기의 신화 파괴에서 지칭하는 신화란 한국의 우익이 설파하는 ‘잃어버린 10년’ 전을 뜻한다. 그 잃어버린 10년 전의 신화의 파괴는 대통령들의 실체와 지금 추억하는 것만큼 그 시절의 자본주의가 (지금에 비해) 흉폭 하지 않다는 것을 들어낸다. 한국 근대화의 신화로 불리는 박정희 정권이 1974년 석유파동을 맞으며, 유가 상승과 부동산 투기로 인해 한국 경제는 점차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빠져들고 2차 석유파동까지 겪게 된다. 그로인해 고용불안이 생기고 물가 불안이 생기면서 국민경제의 안정성이란 말은 민망하게 되었다. 그로한 국민경제의 불안은 결국 박정희 정권을 전복 시키고 ‘그 시절 먹고 살기 좋았다’란 신화가 갖는 실체란 이런 것이다.  기업을 철저히 국가에 귀속시키고 수익에 대한 분배와 적극적 국책 사업 등 반공을 외치면서도 정권성격이 굉장히 사회주의적인 것은 재미있는 부분이다. 한국 경제 대안 시리즈의 세 번째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 집중적으로 다뤘듯이 한국의 진보 대통령 김대중과 노무현에 대한 신화 또한 파괴한다. 미국 경제조차 붕괴 시키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 김대중이고 완전히 본격화 한 것이 노무현이다. 특히 노무현은 MB전 한국 역대 정권상 가장 건설자본에 기대어 있었다는 것을 들어내고 임기 당시 시행한 새만금은 노무현 정권의 진가를 들어내는 표상이다. 또 역대 대통령 중 기업에 가장 많은 권력을 실어 준 것 또한 노무현임이 들어난다. 그리고 한국 보수에서 잃어버린 10년 전에 대해 설파하면서, 그 당시에 비해 굉장히 악랄한 자본주의를 펼친다는 것 또한 볼 수 있다. 심화되는 사교육과 건설 자본을 위한 환경 파괴는, 박정희 정권 당시 제정된 그린벨트와 전두환 정권 당시 사교육 금지 증에서 볼 수 있듯 굉장히 아둔한 선택과 악질적 행태임을 들어낸다. 재미있는 점은 박정희의 정치 운용이 굉장히 사회주의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2부 초기는 역대 대통령과 정권을 되짚어 보며 그들의 선택과 그들에 대한 재평가와 그러한 과정 속 발전해 나간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 설명한다. 2부 후기는 앞서 말했듯 한국 자본주의가 같는 폐해와 그 폐해로 인해 맞게 될 붕괴에 대한 시나리오로 구성되어 있다. 노무현 정권 당시 적극적인 신자유주의의 도입과 기업에 대한 국가의 귀속으로 인해 사법권마저 기업에 무릎 꿇게 되는 지경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압축 성장으로 생겨난 중앙형 시스템과 지방 토호 등이 얽힌 건설 자본의 패악과 만나 시너지를 발휘하게 된다. 단기간 압축으로 인해 시장의 활성화가 가장 극심한 서울로 인구가 몰리게 된다. 농촌에서 빠져나온 인구가 전국으로 분산되지 못하고 수도로 유입되며 국가가 맞는 위험에 대한 버퍼들이 미약하게 되었다. 그렇게 지방의 힘이 미약해지고 그 미약한 곳을 중앙 토호와 지방 토호의 투기의 장으로 탈바꿈 시키게 된다. 제주도만 해도 60% 면적이 외부인 소유로 되어 있는 현실을 맞게 된것이다. 저자는 그런 투기의 폐해가 극한으로 달리지 않는 건, 헌법121조가 지닌 경자유전이 간신히 막고 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될 상황이 코앞에 와 있는 것이다. 한국자본주의가 갖는 가장 큰 단점은 역시 건설만능주의다. 이게 마약과 같아서 위태로울 때마다 맞고 성장률을 부흥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명박이 대운하에 집착하는 이유는 노무현이 새만금을 시행해서 본 효과를 뻔히 알기 때문이다. 이명박의 일자리 창출과 경제 성장을 담당한 대책 모두 건설에 달려있다. 그렇기에 그린벨트는 갈수록 좀먹고 희미하나마 재 역할을 한 종부세 등의 존립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러한 건설만능주의의 끝은 무엇일까? 멀리 볼 것도 없이 일본의 헤이세공황만 봐도 그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건설은 한국 자본주의가 가진 가장 큰 단점이지만 그 건설이란 것이 생존해 있는 것은 투기에 동참하고 동의하고 경제 성장‘률’이 주는 쾌감에 안심하는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제 살 깎아 먹는 행위는 중산층을 증발시켰고 극심한 양극화를 부르게 된다. 8자형 경제 구조가 도래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러한 중남미형 경제로 향하는 행렬 속 극심한 경제난으로 증오를 쏟아 부을 대상을 찾게 되고 그로인해 파시즘을 부를 것이라는게 저자의 붕괴 시나리오다. 그러한 붕괴 전 괴물의 탄생을 마련한 대상은 우리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하고 우리가 전환해야 괴물은 해체될 것이다. 3장은 우리의 전환을 통한 괴물의 해체에 대해 다룬다.

  3부는 한국의 자본주의가 탄생시킨 괴물의 해체에 대해 헌급한다. 경제를 위해 희생시키는 가치들에 대해 설파하고 그를 통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 인식의 전환이란 ‘부자 되세요’가 ‘행복 하세요’로 변화하는 것을 뜻한다. 3부에서 다루는 대안들 중  가장 구체적인 모습을 띄는 건 ‘제3부문’에 대한 언급이다. 제3부문은 GDP 4만불에 넘거나 도달한 선진국에서 꼭 찾을 수 있는 점임을 지적하며, 저자가 현 시점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제3부문은 공공부문과 기업, 2부문으로 구성되었다고 여겨진 국민경제의 다른 한 축이다. 저자는 ‘사회적 경제’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예를 들자면 생협이나 사회적 기업 등이 제3부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제3부문의 특징은 단순히 소득 창출이 최우선에 놓여 있던 경제 행위에서 조금은 탈피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제3부문에 마에스트로나 생협 등 과다 생산 체계와는 맞지 않은, 조금 느리고 생산률이 더뎌도 자연적이고 좀더 인간적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 GDP가 4만불이 넘은 나라에선 항상 목격되는 모습인데, 저자는 이것이 국가 경제 위기에 범퍼 역할을 하며 위기를 줄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예로 일본의 ‘헤이세 공황’ 속 일본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지방에 잘 구축된 생협 덕분이라고 지적한다. 미친 듯 가속화되는 시장주의의 마지막 종착점이 중남미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사람이 살만한 경제를 획득하기 위한 비결이 제3부문이라는 것이다. 조금은 감상적인 견해일지 모르나 제3부문이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조금은 더 사람을 위해 가동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저자는 3부에서 좀더 사람답게 살기 위한 인식이 무엇인지 설파하고 경제에 종속되는 인식의 변화를 요구하며 제3부문이 보여주는 작은 희망의 가치를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의 대안은 공론의 장에서 나온 작은 주장에 불과하며 그 다음은 독자들이 꾸리길 희망하고 있다.

  ‘괴물의 탄생’에서 굵직굵직하게 짚고 넘어간 경제사와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등은 문장들 사이사이 공백의 공간을 지니고 있다. 저자가 다음을 독자에게 맡겼듯 그 공백들 또한 우리가 채워야 할 것이다. 생각할 거리를 남겨둔 것이 말할수도 있고 앙상한 것이라 말할수도 있다. 하지만 난 저자의 이러한 구성이 전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경제를 쉼 없이 외치고 경제가 향해야 할 길을 진지하게 고민한 학자들을 오독하며 저지를 아둔한 선택들은 그 공백을 채워가며 지우고 새로 세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공백들이 꼭 경제학만이 체워야 할 것은 아니라 생각되는데, 존재하는 문장들과 공백의 자리가 지향하는 문장의 가치란 매 한가지 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가치를 알게 되어 ‘부자 되세요’란 말을 덕담인양 내뱉는 것이 염치없는 행동임을 알 때를 저자는 바라고 있다. 

  ‘괴물의 탄생은’ 평소 곱씹으며 생각하던 것들과 겹치고 합일되고 저자의 전작과 블로그를 애독한 결과 완전히 새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자신이 3류임을 자처하는 한 경제학자의 눈으로 진심을 다해 인간을 위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라 생각된다. 그러한 감동을 연장하기 위해 소시민의 삶과 투쟁이 점점 가까워지는 참혹한 세상에 감동을 안겨준 이 책의 마지막 문구를 되새기고 싶다.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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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촌수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6
이문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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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맙소사의 연속이었다. 닳고 닳은 표현이지만 한번 펼치면 엉덩이 때기 힘들었고, 늘어가는 책장의 수가 몹시 서운했다. 호들갑이지만 관촌수필에 대한 호들갑은 마음껏 떨고 싶다. 조급할지 모르나 관촌수필에 사로잡힌 수많은 이유 중 하나를 어서 들고 싶다. 바로 근대화가 지닌 추악성이다. 내가 관촌수필에서 감탄한 모든 것들은 근대화가 지닌 추악성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에 비해져 더욱 가치를 발하고 있다. 항상 근대화에 대한 고민을 지니고 있었던 바, 그 테마를 관촌수필에서 격조 있게 다루는 것을 목격했을 때 어찌나 통쾌하고 감동했는지 모른다.

 

 

  여기서 잠깐 내가 왜 근대화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 설명하려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현재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 왔다. 11년 가까이 살고 있는 우리 동네는 다른 곳에 비해 공사가 잦았던 곳이다. 지금이야 서울, 아니 지방 곳곳 공사가 끊이지 않지만 이사 왔을 당시만 해도 위협적이었을 만큼 공사율이 현격히 높았던 듯하다. 코 흘리고 만화 케릭터 딱지를 모으며 놀던 시절부터 눈에 뵈는 동네 풍경엔 공사판이 꼭 끼어 있었다. 집체만한 트럭이 차도를 가르고 인도를 막고 동네를 가르며 돌아다녔고, 공사 장비의 소음과 위협적인 공사 자제들은 산속 새 울음과 나무마냥 동네를 수놓았다. 재개발이나 집값 시세 등의 단어는 아이들 입에서 쉽게 달려 나왔다. 그만큼 공사가 끊이지 않았다. 부실 것 다 부시고 세울 것 다 세웠다고 여길 때 쯤 부동산 투기 활성화로 조금만 늙어 뵈는 건물이란 건물은 죄다 헐리고 허연 대리석 건물이 동네를 채웠다. 눈에 항상 보이기도 보이고 공사란 것이 꽤나 흥미롭기도 한 광경이기에 자연히 머리에 중요히 들어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머리에 중요히 들어찬 다른 한 가지가 더 있다. 추억이 서린 공간에 대한 향수에 연유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옛스러움이 지닌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공사에 대한 생각이 잦고 깊어질수록 옛스러운 것이 주는 맛에 대한 생각 또한 잦고 깊어졌다. 공사하여 새로 들어선 건물들은 깔끔하고 사람 살기 편해 보이긴 하나 그 건물 전에 있던 것들에서 느껴지는 향수에 비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암튼 지랄 맞게 미친 것처럼 공사로 동네를 들쑤시는 것을 멈출지 모르는 곳에 살았기에, 또 그 공사로 앗아가는 아름다움에 대한 향수가 커다랬기에 근대화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관촌수필에 두 손 다 들고 뿅 갈 수밖에 없었다.

 

 

  작가이면서 주인공이기도 한 이문구가 옛 고향 관촌부락을 방문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그때부터 놀라울 정도로 세세한 것까지 죄다 살아나는 관촌에 대한 묘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세밀한 묘사로 살아나는 이문구의 기억 속 관촌의 풍광은 구수한 문체와 풀내음 나는 단어들로 직조되어 그 자체로 과거의 가치, 그리움, 아쉬움, 그 시절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한다. 자잘한 수많은 사물을 애정 어린 묘사로 인해 마치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생긴다. 그래서 인지 슬레이트 지붕 등 근대화의 표상으로 묘사된 사물은 눈에 보이듯 불편함을 일으킨다. 그렇게 미려한 문체는 변해버린 현재의 관촌과 과거의 관촌을 자연스레 비교하게 한다. 그 비교 속에서 수많은 발전과 시간의 흐름 속에 채워지기 보단 부재한 것이 현격히 많음은 자연히 들어난다. 그런 부재의 씁쓸함을 느끼다 보면 순간 더욱 씁쓸한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 씁쓸함이란 바로 책속에 새겨진 단어들이 지금은 눈에 익지 않은 잊혀진 단어란 사실이고, 과거와 비교되어 많이 황폐해진 현재의 관촌도 소설 밖 현재와 비교하면 정겹기만 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잊혀진 단어 중 방언과 비속어가 더러 있긴 하지만 그 많은 단어들의 잊혀짐은 그 단어들이 묘사할 사물의 결여와 굳이 묘사할 가치나, ‘때’가 없음을 고스란히 들어내고 있기에 씁쓸함이 더욱 크다. 그 잊혀진 단어가 묘사할 사물이나 그 뜻이 몹시도 따스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관촌수필을 읽으며 이문구 선생에게 정말로 감사한게 있다. 바로 옛 것의 그리움이 수구적 태도를 지닌 꼰대의 잡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옛 것에 대한 그리움은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 어릴적 놀이와 마을 잔치, 동네 뒷산과 갯벌의 풍광,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아름다움의 가치일 것이다. 그 상실된 가치에 대한 기록과 증명이자 안쓰러운 현재가 ‘요즘 것들이 못 되 처먹어서’가 아닌 근대화란 이데올로기의 폐해임을 들어내고 있기에, 그것에 대한 안쓰러움이기에, 그 태도에 정말로 감사하단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관촌수필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말을 소개하고자 한다. 누구든지 가장 감동스러운 편(篇)으로 꼽을 공산토월에서 서울로 가는 주인공과 작별을 고하는 석공이 한 말이다. 


  “부디 성공해서 옛말 허며 살으야 되어. 원제던지 편지허구, 한번이나 내려오게 되면 내 집버텀 들르야 허네.... 기별 자주 허구, 몸 성이 잘 올러가게....”


  이 석공의 말에서 옛말하란 당부가 내 마음을 심히 흔들었다. 사람의 생각이란 말의 직조로 형성되는바, 생각의 기초를 다진다 할 수 있다. 옛말을 하란 말인 즉 옛 정신을 버리지 말고 품고 살라는 당부이면서 관촌수필이 반복해 말하는 테마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 관촌수필이 증명하는 가치에 동의하고, 석공이 작가에게 하는 당부이면서 작가가 우리에게 하는 ‘당부’이기도 하니 심히 감격스러웠다. 공산토월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 마음 씀씀이가 굉장히 커다란 어른의 진심 어린 당부인 탓인지 굉장히 감격스러웠던 것이다. 그런 석공이 백혈병에 걸리고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작가와 악수를 할 때, 일주일간 울음을 참던 작가가 “나는 울었다”며 고백할 때, 나 또한 터져 나오는 눈물을 겨우 참았다. 그런 진심어린 당부가 기록된 책이 출간 된 후 많은 시간이 지났다. 분명 옛 정신은 더욱 많이 지워졌으리라 생각된다. 그 정신과 가치가 지워진 자리, 그 공백에는 돈의 가치와 힘의 가치가 채워졌다고 생각된다. 그렇기에 석공과 작가의 고별에 난 울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단 생각이 든다. 돈이나 힘의 가치를 쫒는 세상에 별 생각 없이 또는 무의식에라도 동조했을 것이란 생각에 염치가 없어 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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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공선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양희진 옮김 / 문파랑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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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최근 일본에서 80년 전 소설이 재발견 되어 굉장한 지지를 받으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말을 들었다. 그 소설의 판매부수가 증가해 감에 따라 일본 공산당의 신입 당원 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 그 소설이 재발견되어 각광 받는 이유는, 일본 사회의 양극화와 청년 실업, 비정규직 인구 증가 등의 사회 현상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어라? 이러한 문제가 굉장히 친근하다. 당연하게 낯설지 않다. 적지 않은 곳에서 일본보다 심하다는 진단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남한에서 살면서 어찌 이 책의 배경에 솔깃하지 않을 수 있으랴. 니혼을 건너 남한까지 실려와 강렬한 공감을 끄집어내는 이 소설은 고바야시 다카지의 <게 공선>이다.




  게 공선. 도무지 입에 붙지 않는 단어다. 도대체 이건 뭔가 했다. 어찌 이리도 심오해 보일까? 눈에 익숙하지 않은 제목을 보곤 꽤나 긴장을 하며 책을 펼쳤다. “게 공선은 ‘공장선’으로 ‘선박’이 아니었다. 그래서 항해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게다가 배가 아닌 순수한 ‘공장’이었다. 하지만 공장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작가의 말이 가장 먼저 보인다. 그렇다. ‘게 공선’은 터무니없이 겁먹게 하는 인상과 달리, 단지 게를 잡아 통조림을 만드는 공장선일뿐이다. 허나 그 공장선일뿐인 것이 보통이 아닌 것이 문제다. 캄차카 해안에서 게를 잡아 통조림을 만드는 공장선에서의 온갖 패악, 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패악을 벌이는 곳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보통일 리가 없다. 그 패악의 규모는 쉽사리 파악할 수도 없게 극렬해, 판타지만 같다. 한계를 넘어선 노동과 핍박받는 노동자의 모습들이 묘사될 때마다 호러소설을 읽고 있는 것만 같다. ‘작가가 고바야시 다카지가 아니라 스티븐 킹이나 클라이브 바커일거야’하며 주문을 걸어보지만 쓸 때 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극렬한 패악을 환상으로 치부하고 싶을 때마다,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노동자들의 숙소인 ‘똥통’의 게 비린내와 지른 땀 냄새가 뺨을 후려갈긴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문제로 부각되었던 이야기들이기에 묘사의 충격은 더욱 크다. 이 공포의 이야기를 버텨낼 수 있는 건 그 이야기의 흐름이 노동자들의 전환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극한의 핍박에서 노동자들은 각성하고 ‘연대한다’로 이야기의 흐름이 흘러 갈 때의 안도감이란. 이렇게 노동자가 각성하고 자신들의 문제의 개선을 위해 뛰어드는 이야기는 당연히 감동스럽지만 소설과 같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지금의 현실에 끌어와 외치는 것이 지금 <게 공선>의 유행의 이유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이 소설의 유행의 연유는 핍박받는 이들의 연대를 어느 소설보다 간절히 외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읽으면서 신기했던 것은 80년전 일본의 상황과 현재 남한의 상황이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굉장히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것이고, 기득권의 행태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설 속 인물들이 “우리에게, 우리 말고 같은 편은 없다”라고 말할 때 나도 그 우리에 속한 마냥 고개를 흔들어댔다. 소설 속 상황 중 가장 눈을 후벼 팠던 건, 일본이 제국주의 상황에서 어떻게 자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했는지를 묘사하는 점이다. 애국주의를 부각시키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노동을 강요하고, 그 노동에 대한 반발을 억제하고, 각기병이 걸려 벌벌 떠는 손에 애국주의를 쥐어주며, 다시 그 극한의 사이클을 돌리는 묘사는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이런 식의 애국주의의 이용은 최근 남한 사회에서도 번번이 들어나고 있기에 더욱 눈에 불이 들어 올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양상이 다른데, 현재의 남한은 ‘경제 강국’이란 낚시 밥으로 농락하고 있는 점이다. 88만원을 손에 쥐고 아등바등거리는 이들의 눈에 경제 강국되서 다 먹여 살릴게라는 눈가리개를 씌우고, 좀더 희생하라며 요구하는 모습은 쉽사리 볼 수 있다. 한국 자본주의란게 이리도 치졸하다. 이데올로기를 통한 농락 외에도 소설 속 자본주의의 폐해 중 강렬히 다가온 것이, 공권력이 운영되는 이유가 자국민 보호보단 유산계급의 보호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문제가 여전히 뉴스에 부각되기도 하고, 요즘 많은 이들의 미간의 주름을 짙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해 분노는 더 크다.




  소설이 말하는 모든 것을 긍정하고 싶지만,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중 감독만이 ‘아카사와’란 이름으로 호명되고, 다른 대부분의 인물들인 노동자는 ‘무슨 특징을 지닌 노동자’로 호명되어 노동계급이란 집단에 개인을 증발시켰다는 점이다. 물론 소설이 간절하게 연대를 외치고 그것과 같은 연유로 집단을 통한 돌파를 강조한 것이지만 개인까지 증발시키고 집단에 무조건적 귀속을 요하는 행위는 결국 개인에게 또 다른 희생을 요하는 것이기에 못내 아쉽다. 하지만 “노동자를 미조직인 상태로 조직하지 못하게 놓아두려고 하는 자본주의가 오히려 자연발생적으로 노동자를 뭉치고 조직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는 작가의 말처럼 자본가가 어떤 패악질을 부려도 무산계급은 더더욱 뭉칠 것이란 믿음, 그 맹목적 믿음 속에 희망을 내세우고 있기에 쉽게 생각하고 말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현실은 휘몰아치는 격랑 속 게 공선 위에서 파도를 맞으며 비린내를 느끼고 만 있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현실로 끌어와 주변을 둘러볼 것을 강변하는 것이 이 소설이 현재 발휘하는 힘인 것 같다. 남한에서도 <88만원 세대>로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가 부각되긴 했지만, 사회에서 그 문제들을 수용하는 것이 거시적 문제의 곁가지로 취급을 하고 일본처럼 공산당 당원 증가 등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못내 아쉽다. 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들을 풀려면, 아니 풀지는 못하더라도 견뎌 내기 위해 결국 필요한 것은 연대인 것 같다. 일본에서 문제의 당사자들의 전격적 연대 소식은 없는 듯 하지만, 많은 이들이 연대의 필요와 당위성을 알기에 소설의 재발견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한국에서 <게 공선> 수준의 문학이 없어서가 아니라(물론 없을 수 있다) 연대의 가능성이 척박하기에 재발견과 그에 합당한 호응이 적다는 생각이 들어 몹시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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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 상 북공간 세계문학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 북공간(프리치)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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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즘 가장 큰 관심사는 시스템 속의 개인이다. 시스템이 개개인을 어떻게 다루어 집단화하고 전복과 반기를 억제하고 처단하는지 등이 가장 큰 관심사다. 지금까지 시스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 중 가장 흥미롭고 설레며 읽은 책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다. 감시와 처벌은 감옥의 역사를 집어내면서 기득권이 법 집행으로 자국민을 어떤 식으로 다스리고 감옥이 시스템 안에서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지에 대해 밝히는 내용은 충격과 흥분의 연속이었다.


  그 흥미롭고 흥분되었던 푸코의 작업을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볼 수 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집어든 소설에서 푸코의 성과를 만났을 때, 읽어가며 그 성과의 질이 동질에 가까움을 느껴가는 흥분이란 정말 대단하다. 푸코가 국가를 한정치 않고 감옥의 역사를 탐방했다면, 톨스토이는 러시아 사회에 집중한다는 차이를 제외하곤 두 책이 말하는 바는 분명 같다.


  소설은 네플류도프라는 시스템의 모순에 각성한 귀족의 눈으로 러시아의 법 집행과 처벌 행정의 전반을 들여다본다. 귀족이란 계급으로 인해 그의 탐방은 순조롭게 행해져, 러시아의 법-처벌 행정의 상위부터 하위까지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되는데, 인맥을 타고 계급을 내세우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자체에서 러시아 시스템의 모순을 알 수 있다. 네플류도프의 탐방에 수많은 모순들이 발견되는데, 그 중 가장 중점적으로 논해지는 것은, 불공정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란 존재가 법 집행을 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패악과 법-처벌 시스템이 기득권층의 안위 보장과 그 처벌로 인한 지속적인 범죄자 생성 문제이다.


   범죄자의 범죄는 범죄자의 자의여도 자의가 아니다. 그것이 자의가 아닌 것은 구조상 필연적으로 범죄를 생성할 수밖에 없는 모순된 시스템 때문이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생성된 범죄자를 강압적 처벌로 권력의 위신을 내세우고, 폐쇄적이고 모순적인 감옥 체계로 인도함으로 인해 끊임없이 퍼지는 점염병과 함께 범죄의 연쇄를 촉발한다. 이 모순의 싸이클은 연쇄 작용으로 끊임없이 충족되며 작용한다.


  이러한 시선과 많은 질문들로 가득한 소설은 말미에 단점을 남긴다. 성경책을 펼쳐 본 네플류도프가 계시라도 받은 듯 성경 구절을 통해, 소설 속 문제들을 기독교적 관점으로 해결을 제시하는 것이다. 너무 관념적인 제안으로 지금까지의 성과를 비약하고 봉합해 버릴 때는 감동은 증발하고 실소만이 가득해진다. 철저히 기독교적, 종교적 과장으로 비약하여 그 수많은 성찰이 흐릿해져버리기에 아쉬움은 크다.


  아니 어쩌면 그 비약적 봉합이 단점이 아닐지도 모른다. 네플류도프가 귀족이 아니였다면 소설의 진행이 불가능했던 것과 같이, 그런 과장과 비약이 아니면 그러한 모순점들에 대한 해결은 가당치도 않다는 것의 증명이라는 역설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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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의 계절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고작 20대 초반이라 그런지 성장소설에 감정이입이 잘 되는 편이다. 내가 성장하며 겪고 있는 일과 유사한 에피소드들이 주는 공감과 작가의 선경험이나 그 경험을 통해 유추된 사회에서 발생될 에피소드들이 주는 애환은 강렬한 이입을 일으키곤 한다. 성장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읽은 성장소설 중 단연 최고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다. 소설은 한 인간의 성장이 주를 이루는 ‘인간실격’은 잦은 자살시도, 약물 중독, 아내의 강간 목격 등 수많은 실패와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다. 허나 삶에 대한 온갖 비관으로 얼룩진 소설이 우리에게 냉소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처절한 삶과 우리의 삶을 비교하고 답을 찾을 것을 요한다고 생각한다. 그 절망적인 삶의 기록이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임이 들어 났을 때, 소설을 읽고 있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였음이 들어날 때의 감동이란 쉽게 표현하기 힘들다. 

 

  천둥의 계절 또한 성장소설의 분류에 든다고 할 수 있다. 성장을 하게 되며 겪는 공포를  ‘바람와이와이’란 정령에 의지하여 돌파하는 이야기가 주인 판타지지만 온이란 곳이 비밀의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도쿄의 다른 차원이 듯 현실의 자락을 쉽사리 놓지 않는다. 도쿄와 온은 서로의 과거인양 미래인양 은유로 작용되고 있다. 여러 명의 버림받고, 혼자가 될 것을 강요받는 이들이 성장하며 맞닥뜨리는 공포는 자신이 의지하던 세상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행하는 악행을 발견했을 때의 충격과 그 질서의 요구에 모든 것을 증발시켜 꼰대가 되어버린 실체와의 조우다.


  시스템 유지를 위한 폭력은 최근 가장 큰 관심사이기도 하여 소설에서 가장 흥미롭고 아찔한 부분이었다. 옛 멋을 간직하고 풀 냄새가 가득한 전원처럼 묘사된 가상의 공간인 온이 유지되기 위해 벌이는 사람들의 악행의 실체와 그 비정한 질서에 순응하고 실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주는 비관의 감흥은 강렬했다.


  시스템에 완전히 적응하여, 그 시스템의 맹점을 이용해 악행을 버리던 ‘도바 무네키’는 그 자체로 소설 속 극강의 악으로 그려지고 있다. 불멸의 존재로써 끊임없이 되살아나던 ‘도바 무네키’는 결국 참담한 최후를 맞는데, 심장을 뜯겨 봉인 당해 살아나도 곧 죽어버린다는 것이다. 심장을 잃고 시스템에 천착한 (영겁의 회기를 하는) 악인의 소설 속 세계가 지옥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찌하여 ‘악인이 되어버렸냐?’만이 아닌, 어떻게 하여 ‘악인을 이겨내고 버텼는가?’다. 세상에 치여 아이다움이 증발하여 냉랭해진 ‘겐야’가 냉소에 함몰되지 않고 ‘바람와이와이’로 상징되는 ‘그것’을 끝까지 놓지 않았기에 그 폭력에서 버텨 낸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시간이 흘러 새로운 계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태도라 생각한다.

 

  수많은 인물들을 조리 있게 엮고, 재치 있는 복선과 서사가 주는 묘미와 그로인해 발생되는 반전은 꽤 흥미롭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인해, 흥미로운 기호들과 세계관이 증발하는 것은 큰 단점이다. 이러한 빠른 진행이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일본 소설을 잘 읽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서사의 묘미가 주는 흥분과 재미는 충분히 느낄 수 있지만 그 속도에서 증발되는 수많은 것들이 못내 아쉽기에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천둥의 계절 또한 풍부한 듯 묘사된 세계가 복기하면 분열되어 황량하게 붕 떠버린 느낌이 강하다. 그 풍부한 것 같은 세계는 읽고 있는 그 순간, 그 속도 속에서만 존재해 버린다 생각된다. 필연적으로 황량해질 세계란 단점과 함께 인물들의 사연 또한 속도 속 착각의 풍성함인 빈약함이기에 못낸 아쉽다. 속도로 즐기고 접어서 온의 저편으로 보내버리기엔 소설이 내세우는 기치가 너무 어울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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