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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공선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양희진 옮김 / 문파랑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일본에서 80년 전 소설이 재발견 되어 굉장한 지지를 받으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말을 들었다. 그 소설의 판매부수가 증가해 감에 따라 일본 공산당의 신입 당원 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 그 소설이 재발견되어 각광 받는 이유는, 일본 사회의 양극화와 청년 실업, 비정규직 인구 증가 등의 사회 현상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어라? 이러한 문제가 굉장히 친근하다. 당연하게 낯설지 않다. 적지 않은 곳에서 일본보다 심하다는 진단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남한에서 살면서 어찌 이 책의 배경에 솔깃하지 않을 수 있으랴. 니혼을 건너 남한까지 실려와 강렬한 공감을 끄집어내는 이 소설은 고바야시 다카지의 <게 공선>이다.
게 공선. 도무지 입에 붙지 않는 단어다. 도대체 이건 뭔가 했다. 어찌 이리도 심오해 보일까? 눈에 익숙하지 않은 제목을 보곤 꽤나 긴장을 하며 책을 펼쳤다. “게 공선은 ‘공장선’으로 ‘선박’이 아니었다. 그래서 항해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게다가 배가 아닌 순수한 ‘공장’이었다. 하지만 공장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작가의 말이 가장 먼저 보인다. 그렇다. ‘게 공선’은 터무니없이 겁먹게 하는 인상과 달리, 단지 게를 잡아 통조림을 만드는 공장선일뿐이다. 허나 그 공장선일뿐인 것이 보통이 아닌 것이 문제다. 캄차카 해안에서 게를 잡아 통조림을 만드는 공장선에서의 온갖 패악, 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패악을 벌이는 곳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보통일 리가 없다. 그 패악의 규모는 쉽사리 파악할 수도 없게 극렬해, 판타지만 같다. 한계를 넘어선 노동과 핍박받는 노동자의 모습들이 묘사될 때마다 호러소설을 읽고 있는 것만 같다. ‘작가가 고바야시 다카지가 아니라 스티븐 킹이나 클라이브 바커일거야’하며 주문을 걸어보지만 쓸 때 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극렬한 패악을 환상으로 치부하고 싶을 때마다,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노동자들의 숙소인 ‘똥통’의 게 비린내와 지른 땀 냄새가 뺨을 후려갈긴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문제로 부각되었던 이야기들이기에 묘사의 충격은 더욱 크다. 이 공포의 이야기를 버텨낼 수 있는 건 그 이야기의 흐름이 노동자들의 전환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극한의 핍박에서 노동자들은 각성하고 ‘연대한다’로 이야기의 흐름이 흘러 갈 때의 안도감이란. 이렇게 노동자가 각성하고 자신들의 문제의 개선을 위해 뛰어드는 이야기는 당연히 감동스럽지만 소설과 같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지금의 현실에 끌어와 외치는 것이 지금 <게 공선>의 유행의 이유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이 소설의 유행의 연유는 핍박받는 이들의 연대를 어느 소설보다 간절히 외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읽으면서 신기했던 것은 80년전 일본의 상황과 현재 남한의 상황이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굉장히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것이고, 기득권의 행태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설 속 인물들이 “우리에게, 우리 말고 같은 편은 없다”라고 말할 때 나도 그 우리에 속한 마냥 고개를 흔들어댔다. 소설 속 상황 중 가장 눈을 후벼 팠던 건, 일본이 제국주의 상황에서 어떻게 자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했는지를 묘사하는 점이다. 애국주의를 부각시키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노동을 강요하고, 그 노동에 대한 반발을 억제하고, 각기병이 걸려 벌벌 떠는 손에 애국주의를 쥐어주며, 다시 그 극한의 사이클을 돌리는 묘사는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이런 식의 애국주의의 이용은 최근 남한 사회에서도 번번이 들어나고 있기에 더욱 눈에 불이 들어 올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양상이 다른데, 현재의 남한은 ‘경제 강국’이란 낚시 밥으로 농락하고 있는 점이다. 88만원을 손에 쥐고 아등바등거리는 이들의 눈에 경제 강국되서 다 먹여 살릴게라는 눈가리개를 씌우고, 좀더 희생하라며 요구하는 모습은 쉽사리 볼 수 있다. 한국 자본주의란게 이리도 치졸하다. 이데올로기를 통한 농락 외에도 소설 속 자본주의의 폐해 중 강렬히 다가온 것이, 공권력이 운영되는 이유가 자국민 보호보단 유산계급의 보호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문제가 여전히 뉴스에 부각되기도 하고, 요즘 많은 이들의 미간의 주름을 짙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해 분노는 더 크다.
소설이 말하는 모든 것을 긍정하고 싶지만,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중 감독만이 ‘아카사와’란 이름으로 호명되고, 다른 대부분의 인물들인 노동자는 ‘무슨 특징을 지닌 노동자’로 호명되어 노동계급이란 집단에 개인을 증발시켰다는 점이다. 물론 소설이 간절하게 연대를 외치고 그것과 같은 연유로 집단을 통한 돌파를 강조한 것이지만 개인까지 증발시키고 집단에 무조건적 귀속을 요하는 행위는 결국 개인에게 또 다른 희생을 요하는 것이기에 못내 아쉽다. 하지만 “노동자를 미조직인 상태로 조직하지 못하게 놓아두려고 하는 자본주의가 오히려 자연발생적으로 노동자를 뭉치고 조직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는 작가의 말처럼 자본가가 어떤 패악질을 부려도 무산계급은 더더욱 뭉칠 것이란 믿음, 그 맹목적 믿음 속에 희망을 내세우고 있기에 쉽게 생각하고 말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현실은 휘몰아치는 격랑 속 게 공선 위에서 파도를 맞으며 비린내를 느끼고 만 있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현실로 끌어와 주변을 둘러볼 것을 강변하는 것이 이 소설이 현재 발휘하는 힘인 것 같다. 남한에서도 <88만원 세대>로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가 부각되긴 했지만, 사회에서 그 문제들을 수용하는 것이 거시적 문제의 곁가지로 취급을 하고 일본처럼 공산당 당원 증가 등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못내 아쉽다. 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들을 풀려면, 아니 풀지는 못하더라도 견뎌 내기 위해 결국 필요한 것은 연대인 것 같다. 일본에서 문제의 당사자들의 전격적 연대 소식은 없는 듯 하지만, 많은 이들이 연대의 필요와 당위성을 알기에 소설의 재발견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한국에서 <게 공선> 수준의 문학이 없어서가 아니라(물론 없을 수 있다) 연대의 가능성이 척박하기에 재발견과 그에 합당한 호응이 적다는 생각이 들어 몹시 속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