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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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 이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아니 체감한 것으로만 따지면 어찌나 긴지 가늠하기 힘들다. 지난 시간들을 정리하려 머리를 굴리지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소고기 파동, 촛불, 물대포, 비정규직, 부동산 투기, 사채, 재개발, 낙하산, 유해도서 등 온갖 이미지들이 쏟아져 내리는 시간을 쉽게 정리하기 힘들다. 그 지난 시간에 대해 공안정국이란 별명을 붙이고 당선자에게 쥐새끼 등의 별명이 붙었다. 한나라당이나 자유선진당 등이 ‘잃어버린 10년’을 외쳤지만, 대선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은 40년은 족히 지난 것만 같다. 아 그 길고 길게 느껴지는 시간 속 광경은 결국 쑥대밭이다. 말 그대로 괴물 한 마리가 탄생되어 남한을 한껏 짓밟아 놓은 것만 같다. 쿵쾅! 쿵쾅!

  솔직히 최근까지 삐쳐있었다. 그 끔찍한 스펙터클의 시간을, 그 시간을 이루어낸 장로 대통령을 국민들이 원해 뽑았기 때문이다. ‘그래 이번에 호되게 당해봐라’를 곱씹었지만 그러한 원한은 결국 부질없는 것임이 곧 들어났다. 이번 대선의 결과는 남한 사람이 극한의 이기적이고 악랄한 놈들 투성이라서 생긴 것이 아닌 구조 문제였다. 결국 또 그놈이 문제였다. 그러한 구조 속 명박 경제는 기류였고, 질서였고, 대의였다. ‘이기적’의 척도로 따졌을 때 현 기류상 ‘경제만 살려라’가 행복 찾기의 유일한 척도였다. 누굴 원망하리. 지금 생각해도 ‘경제만 살려라’아니 ‘경제만 살아라’는 무지몽매한 선택일 뿐이다. 그러한 아둔한 선택의 원인을 주변에서 주어보고 들은바, 한국민이 부자를 좋아해서란 말과 한국민의 계급적 이해도가 어리석기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개인적으로 후자의 견해가 적확하다 생각되고 눈에 좋고 귀에 좋다. 투표자 대부분이 자신의 계급을 올림해서 가늠했기에 그 터무니없는, 소수를 위한 공약이 자신의 것으로 들렸다는 것이다. 전부 중산층은 되는지 알았던 모양이다. 그로인해 집 없는 사람이 뉴타운 공약에 만만세를 외쳤다. 집 떨어져라라고 빈 주문보다 허무맹랑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래서 집 잃고 가게 잃고 패인 주름을 더 패가며 넋을 잃어도 현재의 지옥은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소망교회에 가서 하느님의 시험이라 자위해도 현실은 지옥일 뿐인 것이다.

  지옥 속 우리는 원망의 대상을 찾게 되고 그 대상을 찾아 온갖 미움을 쏟아 부으며 안도를 맛본다. 그런 원망의 대상은 개인일수록 빛을 발한다. 하지만 IMF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발판을 마련한 김대중 혹은 탄핵 돌파 후 무서울게 없는 노무현의 성장에 대한 꿈을 위한 FTA 등 개인의 오인된 선택으로 ‘괴물의 탄생’을 마련한 것 같지 않다. 또 이명박이 태생 자체가 괴물 같은 놈이라 지금의 지옥을 만든 것 같진 않다. 우석훈 박사의 ‘괴물의 탄생’의 말미 주목할 만한 말이 나온다.


“한국 경제는 설날 덕담으로 ‘부자 되세요’라고 말하던 바로 그 1990년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의 어느 순간부터 붕괴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기가 ‘괴물의 탄생’을 마련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부자 되란 말인 즉 행복하게 살라는 말일 것이다. 허나 부자 되란 말에서 행복하란 말을 찾아야 했을 때, 부자가 행복하기 위한 하나의 척도가 아닌 절대적 조건으로 자리바꿈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부자 되세요’의 폐해를 지적하는 우석훈의 말이 김정은을 때려 죽여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명박 역시 때려 죽여야 된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명박이 다소 멍청하고, 다소 악질적이고, 심할 정도로 유머감각이 없지만 그가 괴물의 실체는 아니다. 괴물의 실체는 우리에게 있다. 땅값을 따지고 올리기 위해 발악하고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고 ‘부자 되세요’를 덕담으로 씹어 뱉은 우리가 괴물인 것이다.

  우석훈 박사의 한국경제대안 시리즈 마지막 권인 ‘괴물의 탄생’은 괴물이 탄생할 수 밖에 없는 원인을 찾고 탄생의 순간을 추적하여 해체에 대한 방법을 제안한다. 1부에선 세계 경제의 흐름과 경제이론의 역사적 변화를 짚어 본다. 그 과정 속 경제를 신봉하는 한국에서의 경제학의 수준을 가늠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꼬마들도 경제란 단어를 입에 담는 남한의 경제학 수준은, 순수이론가는 거의 전멸하였고 ‘배운 대로 응용’하고 ‘단순 (이론)수입’을 하는 학자들이 한국을 채워버린 현실을 맞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한국 경제학자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전문가’임을 내세우며 실속을 차지하는 이들을 지칭한다. 아 자랑스러운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여. 그러한 ‘단순 수입형’ 학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한국은 기존 이론들을 한국 실정에 맞게 변화 대입 시키는 것이 아닌, 단순 대입과 오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애덤 스미스, 캐인즈 등의 경제학자들은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증발한 체 문장과 공식만 남아 오독되고 잘못 알려져 왔다. 특히 한국에서 내세우는 애덤 스미스는 악용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시장주의는 현 한국에서 말하는 시장주의와는 성격 자체가 다르다. 쉽게 말해 현 한국에서 말하는 시장주의란 5% 남짓의 상위 계층의 사람과 시장만이 남는 시장주의일 뿐이다. 이러한 차이는 국부론을 읽어만 보아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에 악용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괴물의 탄생’ 속 우리가 오독, 악용하는 애덤 스미스란 이름이 갖는 가치와 진가가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하는 말이 있다.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가 위대한 건, 그 전 2세기 동안 지배적이던 중상주의를 깬 것도 있지만 국민 경제 프레임을 개괄한 것도 있다. 중세를 지배하던 ‘귀족’들을 ‘지주’라는 이름으로 격하시켰고, 농노에서 노동자로 새로운 시민이 될 사람에게는 ‘임금’이라는 장치로 그들이 움직일 공간을 마련해 주고, 20세기 내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기업들을 향해 ‘견제’란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조율한 정부의 위상을 조세와 무역, 국방 등 활동을 통해서 중요한 조정자로 올려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조율할 정부의 위상을 조세와 무역, 국방 등 활동을 통해서 중요한 조정자로 올려놓은 것이다.”

이것이 모든 걸 증발 시킨 채 ‘시장주의 창시자’로 불리던 애덤 스미스의 가치다. 이렇게 1부는 한국 경제학의 수준과 한국 학자들이 오독 악용한 순수이론과 이론자들을 반추해보며 지금의 한국 경제란 것이 얼마나 앙상하고 잔혹한지를 들어내고 있다.

 

  2부의 초기는 신화의 파괴로 구성되어 있고, 후기는 신화 위에 건축된 한국 자본주의의 폐해와 그로인한 붕괴에 대한 시나리오로 구성되어 있다. 2부 초기의 신화 파괴에서 지칭하는 신화란 한국의 우익이 설파하는 ‘잃어버린 10년’ 전을 뜻한다. 그 잃어버린 10년 전의 신화의 파괴는 대통령들의 실체와 지금 추억하는 것만큼 그 시절의 자본주의가 (지금에 비해) 흉폭 하지 않다는 것을 들어낸다. 한국 근대화의 신화로 불리는 박정희 정권이 1974년 석유파동을 맞으며, 유가 상승과 부동산 투기로 인해 한국 경제는 점차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빠져들고 2차 석유파동까지 겪게 된다. 그로인해 고용불안이 생기고 물가 불안이 생기면서 국민경제의 안정성이란 말은 민망하게 되었다. 그로한 국민경제의 불안은 결국 박정희 정권을 전복 시키고 ‘그 시절 먹고 살기 좋았다’란 신화가 갖는 실체란 이런 것이다.  기업을 철저히 국가에 귀속시키고 수익에 대한 분배와 적극적 국책 사업 등 반공을 외치면서도 정권성격이 굉장히 사회주의적인 것은 재미있는 부분이다. 한국 경제 대안 시리즈의 세 번째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 집중적으로 다뤘듯이 한국의 진보 대통령 김대중과 노무현에 대한 신화 또한 파괴한다. 미국 경제조차 붕괴 시키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 김대중이고 완전히 본격화 한 것이 노무현이다. 특히 노무현은 MB전 한국 역대 정권상 가장 건설자본에 기대어 있었다는 것을 들어내고 임기 당시 시행한 새만금은 노무현 정권의 진가를 들어내는 표상이다. 또 역대 대통령 중 기업에 가장 많은 권력을 실어 준 것 또한 노무현임이 들어난다. 그리고 한국 보수에서 잃어버린 10년 전에 대해 설파하면서, 그 당시에 비해 굉장히 악랄한 자본주의를 펼친다는 것 또한 볼 수 있다. 심화되는 사교육과 건설 자본을 위한 환경 파괴는, 박정희 정권 당시 제정된 그린벨트와 전두환 정권 당시 사교육 금지 증에서 볼 수 있듯 굉장히 아둔한 선택과 악질적 행태임을 들어낸다. 재미있는 점은 박정희의 정치 운용이 굉장히 사회주의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2부 초기는 역대 대통령과 정권을 되짚어 보며 그들의 선택과 그들에 대한 재평가와 그러한 과정 속 발전해 나간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 설명한다. 2부 후기는 앞서 말했듯 한국 자본주의가 같는 폐해와 그 폐해로 인해 맞게 될 붕괴에 대한 시나리오로 구성되어 있다. 노무현 정권 당시 적극적인 신자유주의의 도입과 기업에 대한 국가의 귀속으로 인해 사법권마저 기업에 무릎 꿇게 되는 지경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압축 성장으로 생겨난 중앙형 시스템과 지방 토호 등이 얽힌 건설 자본의 패악과 만나 시너지를 발휘하게 된다. 단기간 압축으로 인해 시장의 활성화가 가장 극심한 서울로 인구가 몰리게 된다. 농촌에서 빠져나온 인구가 전국으로 분산되지 못하고 수도로 유입되며 국가가 맞는 위험에 대한 버퍼들이 미약하게 되었다. 그렇게 지방의 힘이 미약해지고 그 미약한 곳을 중앙 토호와 지방 토호의 투기의 장으로 탈바꿈 시키게 된다. 제주도만 해도 60% 면적이 외부인 소유로 되어 있는 현실을 맞게 된것이다. 저자는 그런 투기의 폐해가 극한으로 달리지 않는 건, 헌법121조가 지닌 경자유전이 간신히 막고 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될 상황이 코앞에 와 있는 것이다. 한국자본주의가 갖는 가장 큰 단점은 역시 건설만능주의다. 이게 마약과 같아서 위태로울 때마다 맞고 성장률을 부흥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명박이 대운하에 집착하는 이유는 노무현이 새만금을 시행해서 본 효과를 뻔히 알기 때문이다. 이명박의 일자리 창출과 경제 성장을 담당한 대책 모두 건설에 달려있다. 그렇기에 그린벨트는 갈수록 좀먹고 희미하나마 재 역할을 한 종부세 등의 존립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러한 건설만능주의의 끝은 무엇일까? 멀리 볼 것도 없이 일본의 헤이세공황만 봐도 그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건설은 한국 자본주의가 가진 가장 큰 단점이지만 그 건설이란 것이 생존해 있는 것은 투기에 동참하고 동의하고 경제 성장‘률’이 주는 쾌감에 안심하는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제 살 깎아 먹는 행위는 중산층을 증발시켰고 극심한 양극화를 부르게 된다. 8자형 경제 구조가 도래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러한 중남미형 경제로 향하는 행렬 속 극심한 경제난으로 증오를 쏟아 부을 대상을 찾게 되고 그로인해 파시즘을 부를 것이라는게 저자의 붕괴 시나리오다. 그러한 붕괴 전 괴물의 탄생을 마련한 대상은 우리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하고 우리가 전환해야 괴물은 해체될 것이다. 3장은 우리의 전환을 통한 괴물의 해체에 대해 다룬다.

  3부는 한국의 자본주의가 탄생시킨 괴물의 해체에 대해 헌급한다. 경제를 위해 희생시키는 가치들에 대해 설파하고 그를 통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 인식의 전환이란 ‘부자 되세요’가 ‘행복 하세요’로 변화하는 것을 뜻한다. 3부에서 다루는 대안들 중  가장 구체적인 모습을 띄는 건 ‘제3부문’에 대한 언급이다. 제3부문은 GDP 4만불에 넘거나 도달한 선진국에서 꼭 찾을 수 있는 점임을 지적하며, 저자가 현 시점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제3부문은 공공부문과 기업, 2부문으로 구성되었다고 여겨진 국민경제의 다른 한 축이다. 저자는 ‘사회적 경제’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예를 들자면 생협이나 사회적 기업 등이 제3부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제3부문의 특징은 단순히 소득 창출이 최우선에 놓여 있던 경제 행위에서 조금은 탈피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제3부문에 마에스트로나 생협 등 과다 생산 체계와는 맞지 않은, 조금 느리고 생산률이 더뎌도 자연적이고 좀더 인간적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 GDP가 4만불이 넘은 나라에선 항상 목격되는 모습인데, 저자는 이것이 국가 경제 위기에 범퍼 역할을 하며 위기를 줄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예로 일본의 ‘헤이세 공황’ 속 일본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지방에 잘 구축된 생협 덕분이라고 지적한다. 미친 듯 가속화되는 시장주의의 마지막 종착점이 중남미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사람이 살만한 경제를 획득하기 위한 비결이 제3부문이라는 것이다. 조금은 감상적인 견해일지 모르나 제3부문이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조금은 더 사람을 위해 가동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저자는 3부에서 좀더 사람답게 살기 위한 인식이 무엇인지 설파하고 경제에 종속되는 인식의 변화를 요구하며 제3부문이 보여주는 작은 희망의 가치를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의 대안은 공론의 장에서 나온 작은 주장에 불과하며 그 다음은 독자들이 꾸리길 희망하고 있다.

  ‘괴물의 탄생’에서 굵직굵직하게 짚고 넘어간 경제사와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등은 문장들 사이사이 공백의 공간을 지니고 있다. 저자가 다음을 독자에게 맡겼듯 그 공백들 또한 우리가 채워야 할 것이다. 생각할 거리를 남겨둔 것이 말할수도 있고 앙상한 것이라 말할수도 있다. 하지만 난 저자의 이러한 구성이 전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경제를 쉼 없이 외치고 경제가 향해야 할 길을 진지하게 고민한 학자들을 오독하며 저지를 아둔한 선택들은 그 공백을 채워가며 지우고 새로 세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공백들이 꼭 경제학만이 체워야 할 것은 아니라 생각되는데, 존재하는 문장들과 공백의 자리가 지향하는 문장의 가치란 매 한가지 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가치를 알게 되어 ‘부자 되세요’란 말을 덕담인양 내뱉는 것이 염치없는 행동임을 알 때를 저자는 바라고 있다. 

  ‘괴물의 탄생은’ 평소 곱씹으며 생각하던 것들과 겹치고 합일되고 저자의 전작과 블로그를 애독한 결과 완전히 새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자신이 3류임을 자처하는 한 경제학자의 눈으로 진심을 다해 인간을 위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라 생각된다. 그러한 감동을 연장하기 위해 소시민의 삶과 투쟁이 점점 가까워지는 참혹한 세상에 감동을 안겨준 이 책의 마지막 문구를 되새기고 싶다.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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