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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편지
정민.박동욱 엮음 / 김영사 / 2008년 10월
평점 :
IMF가 함께한 지난날을 떠오르게 하는 요즘, 다시 유행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고개 숙인 아버지가 되겠다. 그러한 모습들에서 상기되는 추억 때문인지, 체감 온도는 그 추억의 시간에 비해 한결 따스해도, 사람들의 표정은 그 추억의 시간 못지않게 얼어 있다. 너무 얼어 있어서, 손이 시려워 꽁!을 외치고 싶을 정도다. 살려 주세요. 좀 살게 해주세요. 이 곡소리가 고막을 울리진 않지만, 머리에선 쉼 없이 울리고 있으니, 내가 미쳤는지 의심이 된다. 정신 질환이 의심되어 정신병원을 가니, 한 아이의 아버지인 의사 선생님은 한껏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냥 나올 수밖에. 이런 서늘한 시기 우리에게 도착한 편지가 있다. 누가 보냈는지 살펴보니, 편지가 무겁게만 느껴진다. 발신인은 ‘아버지’, 어~마나! ‘아버지의 편지’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한다. 이 편지가 ‘지금’ 도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편지의 존재를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멘토를 잃은 지금, 아버지를 잃은 지금 누구에게 물으리. 숙고 끝에 다가간 아버지들은, 고개를 숙인 체 눈길을 피해버리니, 혼돈이 가중될 뿐이다. 아버지들은 유령이 되어버린 체, 유령처럼 가족이란 울타리만 침울히 떠다닐 뿐이다. 그렇다. 지금, 아버지란 존재들은 유령이 되어버렸다. 그 유령들은, 별말이 별로 없고, 자학적이며, 경쟁하듯 주름을 늘리고 고개를 숙이고, 조직 내의 자신의 위치를 미칠 듯이 부정한다. 이런 상황에서, 오이디푸스 같은 건, 잔인한 농담일 뿐이다. 프로이드가 무덤에서 나와 지금 남한으로 오면 미칠거야. 우린 죽일 아버지조차 없다. 유령이 되어버린 아버지들에게 우린 무얼해야 하나? 위로? 그들의 고개를 숙이게 한건 누구 혹은 무엇일까? 사라지듯 투명해져 버린 아버지란 존재는, 그러니까 유령이 되어버린 원인은 무엇 때문일까? 누구 때문일까? 그 범인은 바로, 유령이다! 즉, 아버지 자신들이 스스로 떠맡은 것이다.
아버지들이 유령을 자처했다는 증거가 있다. 우리 남한 사회, 좀 산다하면, 운명처럼 내려 받는 작위가 하나 있다. 그 작위는 오직 한 종족만을 위한 것이니, 그 종족은 바로 아버지다. 그렇다면, 그 작위란 무엇일까? 바로 기.러.기. 그 장엄하게 돈 냄새 풍기는 작위는 오직 아비라는 자들만 받들 수 있다. 기러기 아빠란, 현 남한 사회의 아버지들의 실태를 고스란히 들어내는 칭호다. 그 칭호를 부여받음으로, 그들은 가장의 역할을 포기했다. 그 기러기 아빠들은, 통념적 아버지와 같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들이 기러기 뒤에 ‘아빠’란 것을 다는 충족 조건은 오로지 ‘경제력’뿐이다. 거추장스러운 것 다 필요 없어! 돈만 있으면, 좋은 남편, 귀감이 되는 아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요상한 주문은, 그들이 조류임을 입증하듯, 조류독감 마냥 사방에 퍼져버렸다.
아버지의 상징이 ‘기러기’인 요즘, 단언컨대 ‘경제’란 단어의 발음이 쉬웠더라면, 아버지들은 경제라 불렸을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고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아기들에게,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감사해야 한다. 그만큼 그들은 돈과 자신들의 물리적, 상징적 위치를 교환했다. 여기서 ‘부정’따위 언급하지 마시라! 이 모든 고통은 당신들이 선택 했으니. 그 선택을 행한 시간을 잊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바로 올해 초, 아버지란 이들은 ‘다’ 필요 없으니 경제‘만’ 살리라는 선택을 했다. 그 고귀한 선택을 한 뒤, 아랫 것들이란 소리를 하면 곤란하다. 우리도 돈을 아버지로 섬기기 싫었단 말이다. 허나 이건 돌연변이처럼 튀어나온 결과가 아니다. 현재의 아버지들의 모습을 예견한 영화가 있으니 바로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 되겠다. 극 중 주인공 송강호가 결국 기러기 아빠의 위치를 선택한 후, 외국 유학 중인 가족들의 홈비디오를 보며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에서 우리가 눈물을 꾹 참고 웃음을 터뜨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자기 무덤 자기가 파는 삽질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있으랴.
아버지가 유령이나 기러기가 되어버린 지금 도착한 '아버지의 편지'는, 그 결여의 자리를 채우려 한다. 돈이 아닌 아버지라면 했을 법한 조언과 잔소리들이 몇백년의 시간을 거쳐 도착한 것이다. 그 몇백년의 간극은, 그만큼 참된 아버지의 소리를 찾기가 힘들었음을 뜻한다 생각한다. 참 된 공부를 해라, 남을 흉보지 마라, 자만하지 마라, 사람을 대할 때 항상 공손히 해라 그리고 돈에 홀릴 바에 차라리 배고프고 청렴하게 사라라 등, 우리의 아버지들에게 듣고 싶은 말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다. 너무도 당연한 소리들을 우리는, 아버지들에게 듣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책에 담겨있는 어른들의 편지가 한껏 무거워만 보인다. 그리고 값지다. 허나 이 값짐은 비극이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혔듯, 책 속 글들은 소박한 잔소리로 가득하다. 우리는 여기서 슬픔을 느껴야 한다. 우리가 왜 ‘잔’소리를 책 속에서 각 잡고 들어야 하나? 아무리 이황, 백광훈, 유성룡, 이식, 박세당 등이 굉장한 어른이지만, 그 어른들의 명성만큼 큰 깨우침도 아닌 소박한 잔소리를 ‘읽어야’할까? 왜 우리의 아버지들은 그 당연한 잔소리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체 돈을 내밀야만 하나? 왜 그 돈으로 '아버지의 편지'를 굳이 사서 읽어야만 하는 것인가? 아버지들이 제 역할만 했더라면 종이 낭비였을 책이 값지게 된 건 제 역할을 못하는 아버지들 탓이다. 변명처럼,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편지들의 원문들은,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좀 해’라고만 보인다.
난 가부장을 혐오한다. 죽어라 목을 세우고, 가족의 희생을 담보한 체, 남자 놀이하는 놈들은 때려죽이고 싶다. 허나 자식들에게 윤리적 노선의 제시해야할 아버지는 존재했으면 한다. 귀감의 존재가 있으면 한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더 이상 돈을 내밀지 말고, 참된 꾸중과 격언을 내밀길 바란다. 아버지의 편지를 읽는 것이 아닌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그렇기에 난 진심으로 ‘아버지의 편지’가 무용(無用)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