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에로스] 서평을 올려주세요
-
-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혁명 ㅣ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6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서점에 가면 온갖 설명서들이 판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놀랄 일도 아니다. 설명서들이 빼곡히 들어찬 서점의 모습에 놀라움이 들지 않는다. 다만 씁쓸할 뿐이다. 그만큼 설명서들이 점령한 서점은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부동산, 증권, 수능전략, 입시전략, 연애 등등, 서로들 이렇게만 하라며 난리를 친다. 자본주의의 패악이 극을 치닫는 지금, 사람마저 상품화 되었다. 서점을 메우고 있는 설명서들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마저 상품이 되었기에, 그 상품 사용법을 설명해 주겠다며 교태를 부리며 진열되어 있는 것이다. 참혹한 광경이라 생각되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책들이 끊임없이 출간 되어 자신들의 존재가 유능하지 못함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그 책들이 명쾌한 척 품고 있는 설명들이 쓸모가 없기에 그 책들의 수요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그럼으로 다행히도 인간은 상품이 아닌 것을 나타낸다. 역설적인 희망이라도 남아 있으니 다행이다.
서점을 당당히 장악하고 있는 설명서들이 설명하려는 것은, 결국 현재 우리가 가장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욕망을 파고들어, 찬란한 환상을 서술하며, 그 환상이 현실로 치환할 수 있다며 주문을 거는 것이다. 숭그리 당당 숭당당. 이건 야동보고 자위하며, 눈앞에 그녀가 실재라고 믿는 것과 같다.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종료’되어 사라지고, 현실에 남는 건 발그레한 손과 구겨진 휴지 쪼가리뿐이다. 몰려드는 허무함이여! 백번 양보하여, 자기 계발서들이 주장하는 설명들이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고 치자. 그래봤자, 그 책들이 주장하는 것은, 환경을 바꾸지 않고 그 환경에 ‘나’를 적응 시키라고 독려하는 것뿐이다. 명쾌하게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현재의 상황을, 품고 있는 환경이 변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주위가 시궁창인데 나를 시궁창에 적응시킨다고, 삶이 윤택해질까? 결국 위대한 쥐새끼일 뿐이지 않을까?
시궁창 속에서 벗어나지 않고 적응하기 위해 설명서를 탐독하니 변화가 없다. 설명서가 제시하는 환상에 눈이 사로 잡혔기에, 코를 쑤시고 드는 악취에 골이 띵해도, 자신의 주위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궁창은 무엇이고, 그 시궁창 속 우리가 쓰고 있는 쥐의 탈은 무엇일까? 개인적인 생각에 시궁창은 경제에 미쳐버린 현재의 남한이고, 우리가 쓰고 있는 쥐탈은 상품화다. 경제적 가치로 모든 것을 제단하고, 그럼으로 사람 또한 경제적 가치를 매겨 상품화 하며, 그것이 곧 그 사람의 가치로 여겨지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그러니 우리가 설명서를 보며 꿈꾸는 환상 속에 있던 행복이, 이 땅위에 중력의 법칙을 받으며 우리 옆에 함께하기 위해선, 시궁창이 내세우는 실용성을 내다버리고, 탈을 벗고 인간으로써 존재해야 할 것이다.
‘호모 에로스’는 우리에게 시궁창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 우뚝 서서 사랑하자고 제안한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사랑을 위해 설명서가 필요하게 되었는지 밝히고, 시궁창을 인지하고, 탈을 벗자는 것이다. 우리의 주변에 널린 사랑들을 추적해가며, 그 환상의 껍데기를 뜯어내어 우리가 여태 꿈꾼 것이 무엇인지 들어낸다. 그 환상의 껍데기를 이루고 있는 것들은 차, 돈, 외모, 순정, 쿨, 통속 및 영원 등이다. 우린 그런 껍데기로 만든 모피를 입고 카페, 백화점, 차안, 모텔 등을 섭렵하며 데이트한다. 아니 저자의 표현대로 ‘쇼핑’을 한다. 그것이 우리가 아름답고 신성하다고한 데이트다. 그렇기에 우리의 사랑의 가장 큰 장벽은 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주거나 받는 선물의 가치가, 거기에 투여된 돈으로 매겨지니 이 얼마나 분통 터질 일인가? 허나 이러한 메커니즘에 쉽사리 문제제기를 못한다. 브라운관에서 끝없이 터져 나오니, 또 그것을 선남선녀가 이상적인 것이라 주장하니,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어머나! 저게 사랑이야. 그 브라운관 속 사랑들은 순정의 탈을 쓰고, 쿨의 탈을 쓰고 우리들의 감정을 파고들어, 그 잘난 사랑이 품고 있는 실체의 앙상함을 가린다. 우리는 신파에 펑펑 울며 눈물로 눈을 가리고, 쿨 한 원나잇이 제시하는 살갗에 눈이 가려져 핵심을 보지 못한다. 이러한 현대의 사랑을 정리하는 말이 책 속에 새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둘이 대화하기 위해 돈을 써요’ 혹은 ‘돈을 쓰기위해 둘이 함께해요’ 펑펑 돈 쓰며 이야기하기. 이것이 우리의 사랑.
책은 이런 우리의 사랑을 맑스, 니체, 스피노자, 에리히 프롬, 동의보감, 들뢰즈 등을 언급하며 얼마나 황량한지 증명하려 한다. 그 언급은 상당수 ‘아포리즘’으로 제시된다. 과정 없이 원론적인 것이 던져진다 할 수 있다. 물론 그 사이사이를 저자가 촘촘히 메우고 있다. 책의 가독성이 높음에서 알 수 있듯, 툭툭 내던지 듯 쓰여 있어, 원론적이고 저돌적인 모습 같아 보이긴 한다. 여기서 우리가 당연한 소리를 한다며 투정하는 것은 다소 성급하다. 자기 계발서들이 배설하는 정보들이 이상적이고 원론적이 되어 버린 지금, 진짜 원론적인 것들을 인지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원론인 척 하는 것을 없애기 위해 원론을 들어내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며 ‘너무 원론적이다’라고 느낀다면 상당히 긍정할만한 것이다. 우린 썩지 않았어! 허나 책의 성격이 원론적인 것이 강하고 저돌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킴에 생기는 문제가 없지 않다. 특히 동의보감을 상당히 중요히 다루지만, 그 이론을 단도직입적으로 제시되어, 너무 허공에 뜬 느낌이 강하다. 저자에게는 당연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것들에 동의가 형성되지 않은 마당에 믿으라하니 가끔 당황스러움이 생길 수 있다. 다른 많은 철학자들의 아포리즘 또한 그들을 읽었다는 전제가 없으면 허공으로 떠버리는 경향이 발생하는 요지가 크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책에서 강하게 비판하는 ‘자기 계발서’들과 맞물리려는 지점이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짝사랑하는 자가 사랑에 성공하려면, 초월적 집중을 통해, 그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동의보감을 들며, 기를 거쳐 발원에 이르며 설명하지만 그 황당함을 해소 시키지 못한다.
인간과 인간의 소통 중 가장 황홀한 사랑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에, 현재 남한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원론적 삶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에 온갖 문제점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나를, 너를, 사랑을 알지 못하니 사방이 막힌다. 사방이 막혀 원론적인걸 탄탄히 못하니, 외부에서, 감각적인 것에서, 단순 쾌락에서, 삶의 가치를 찾는다. 환경이 시궁창이니 그런 것이 탐이 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제대로 사랑하자. 이렇게 말하면 또 누군가 이렇게 말하겠지. "이상에 빠져 살지 말고 현실을 봐!" 그럼 난 이렇게 대답해야지. “그래.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시궁창에 처박힌 체 적응하려 애 쓰는게 더 이상 같아. 난 현실을 볼거야. 난 시궁창에서 나갈래.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