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진정한 신학적인 개념은 결코 밖에서 갑자기 인간에게 도래하는 미래의 기쁜 상황-또는 그것이 멸망인 경우에는 기쁘지 않은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구원이란, 다만 도덕적인 판단에 의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상황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구원이란, 인간이 자유로이 하느님 앞에서 가지는 진정한 자기이해와 진정한 자기 실현의 최종 결정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유로이 초월을 해석하고, 이것을 선택할 때 자신에게 개시되고 제공되어 있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수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것이다. 인간의 영원성은 오직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자유의 본래성 그리고 최종 결정성으로서만 이해되는 것이다. 그밖의 모든 것은 결국 시간 속에 있다. 거기에 영원은 없다. 영원이란 시간의 반대의 것이 아니라, 자유의 시간의 완성인 것이다.

요새는 그림책, 만화책 외에는 책을 일부러 잘 읽지 않으려고 하니 "엑스 리브리스"에 쓸 것이라곤 공부하는 책 뿐이다. 하지만 이렇듯 훌륭한 사상을 접할 때면 다른 책을 못 읽고 있는 것이 조금 덜 안타까울 때도 있다.  하지만 신학 책 속에만 박혀 있을 때면 늘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이 드는 걸 어찌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비종교인(또는 비 그리스도교 신앙인)에나 종교인(또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에게나 외면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비종교인에게 신학은 지하철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떠들어내는 이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며 일명 "독실한" 신앙인들에게 역시 "믿음이 부족해 머리로만 따지려 한다. 신앙은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물론 종래의 신학이 일정 부분 스스로 그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일조한 것은 여전히 자기 반성의 과제로 남아 있다.

하지만 어느 선배의 말처럼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학은, 그리고 진지한 신학자들의 사상은 결국 그들이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이해하려 했는가에 있을 지도 모른다. 자연과학자들이 우리 주변의 자연 현상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학 역시 우리의 일상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신학자들이 논하는 것은 하늘 위 구름 속에 갇힌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그들이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해결되지 않는 신비이다. 따라서 설령 그들의 언어가 스콜라 철학의 용법에 갇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논구하고 있을 때라도 우리는 그들이 왜 이것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이것이 우리 신앙에서, 삶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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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4-28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요즘 다른 책은 읽지 못하고 있어서 님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신학....그 뜨거운 감자가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제게도 참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깊이 공감됩니다.
그럼에도 님의 말씀처럼 너무나 소중한 의미가 있네요....
그래도 저처럼 신학에 관심을 갖는 님같은 분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