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를 찾아줘>(Gone girl, 2014)
스릴러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다. 사건이다. 사건들의 씨실과 날실이 주인공이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이 등장하면서 베틀이 삐꺽거리며 움직인다. 욕망이 사건의 이름으로 몸을 부르르 턴다. 곧이어 영화는 인물들의 시선과 욕망에 따라 숨가쁜 교차 운동을 진행할 것이다. 데이비드 핀처의 <나를 찾아줘>는 160분이 넘는 시간동안 관계의 강박에 대한 타피스트리를 엮어 낸다. 시끄러운 데뷔작이었던 <에이리언3>에 이어, <쎄븐>,<파이트 클럽> 등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 장르계의 장인 반열에 올랐던 그이다. 이번 영화< 나를 찾아줘>에서 핀처는 현대인의 욕망과 타자성 그리고 강박증을 스릴러의 형식을 통해 풀어 낸다. 그가 찾아낸 장소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또한 가장 먼 거리를 가진 부부라는 이중성의 공간이다. 어떤 이들에게 이 공간은 -비록 매우 소수이겠으나- 베아트리체의 천국이 될 것이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연옥으로 오인된 곳이거나, 또는 림보(limbo)이거나, 더 많은 사람들에겐 지옥 그 자체이다. 안타깝게도 주인공 닉 던(벤 에플랙)은 단테 알레기리와 다른 방향으로 이를 경험하게 된다.
영화에서 부부의 공간은- 영화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중요하다. 영화의 중심적 배경이 되면서, 또한 욕망과 관계의 엇갈림이 만드는 거리감이 생성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쓴 '어메징 에이미'라는 성장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한 에이미 던(로자먼드 파이크) .그녀는 소설의 모델로 어려서부터 셀레브레티였다. 그런 그녀가 매력적이지만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닉과 결혼한다. 그리고 뉴욕에서 닉의 고향인 미주리로 이사한다. 이 둘은 아름다운 2층 집에 산다. 하지만 해자( 垓字) 건너편 동경의 시선으로만 존재하는 중세 성의 내밀성처럼, 이 부부의 공간은 절대적 타자들의 공간이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만든 근대 세계에서 우리는 흔히 사생활이라는 이름하에 가족의 공간을 할당 받고 보호받는다. 즉 이 곳은 생의 욕망 피라미드에서 가장 기초적인 안정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곳이다. 또한 노동력의 안정적 재생산의 요체로서 일종의 침범할 수 없는 배타적 공간이다. 이 절대적 공간 속에는 두 명의 남녀, 즉 친밀성과 거리감이 하루에도 수 없이 교차할 수 있는 또 다른 절대적 타자가 존재한다. 사건을 추동하는 강박증적 욕망의 시선은 이 집 내부에서 있는 두 명의 타자들 속에서 1차적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2차적인 시선은 이 집 자체를 -즉 에이미의 실종사건- 바라보는 여론이라는 시선 속에서 발생한다. 즉 욕망이 집이라는 공간을 두고 내부/외부 사이에 충돌하고 있으며 이 둘이 상호참조적으로 반응한다. 사건의 중심 인물인 에이미는 이 자신과 타자들의 욕망이 가진 상호참조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그녀의 범죄는 약간의 클리쉐처럼 범죄소설을 탐독한 결과이고, 그 결과물은 사건과 사건의 해결방식이 결국 욕망의 거대 서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발적 사건을 통해 사건의 방향이 바뀌게 되었을 때도 그녀는 지속적으로 일종의 대타자와의 상호참조를 놓치지 않는다.
핀처가 이 두 욕망의 매개를 각자의 시점을 통해, 그리고 미디어의 시선이라는 부부의 타자가 되는 시선을 통해 교직하는 방식은 뛰어나다. 특히 매력적인 지점은 이 수많은 타자들의 시선이 가진 희극성을 메인 요리 위에 뿌리는 검은 후추처럼 블랙 유머의 요소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영화 <나를 찾아줘>의 식감이 완성된다. 이 살짝 살짝 씹히는 검은 후추의 맛은 이 영화의 전체적 긴장감을 이완시키는 요소이면서 또한 장인의 손 맛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매혹의 포인트이다.
영화 속에서 욕망의 가장 중심인물은 에이미다. 그녀의 삶은 베스트셀러 소설 속에 이미 선행되어 있었다. 영화 중반부 '어메이징 에이미가 실제 에이미보다 앞서간다.'는 대사가 나온다. 에이미의 삶은 어머니의 욕망- 영화 속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녀의 존재는 일종의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상상계 속의 거울 안에 머물러 있다. 영화는 이 상상적 관계성의 일치가 일종의 절대적 타자를 만나게 되면서 강박증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녀의 모든 연애는 일종의 타자와의 접촉이고 이것은 늘 실패로 끝났다. 물론 스릴러의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에이미의 증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에이미에게 상징질서들은 적응하고 내면화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오로지 저항하거나 이용해야하는 도구들일 뿐이다. 그녀는 거울 속으로 프레임화된 자신의 모든 욕망에 최대한 충실하다. 사랑 또는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와의 접촉이 생겼을 때 발생하는 변화들에 대해 강력한 자기생존의 저항선을 긋는다. 즉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상징 질서의 주체는 빗금쳐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상상계 속에서 그 상상계를 유지하기 위해 타자에 빗금을 긋는 방식을 택한다.
그녀가 여기에 동원하는 것은 더 큰 타자의 욕망과 시선이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그녀가 어린 나이부터 셀레브레티였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실종 첫 날부터 기자회견이라는 방식을 통해 에이미의 실종을 스펙터클화하는 부모들의 태도로 부터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녀에게는 불특정 다수의 시선은 삶을 이루는 중요한 무엇이 될 수 있겠으나, 구체적 개인들은 소거된다. 에이미는 영화 속 현재 속에서 어떤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다. 관계의 기호성 지수 0 이다. 그녀가 관계를 얻을 수 있는 방식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도망가 있던 때뿐이다. 퍼팅 연습하는 아주 짧은 장면이다. 모르는 두 남녀와 잠시 함께 있는 이 장면에서 핀치는 에이미의 유일한 타자와의 접촉을 -익명성으로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내 영화적 터닝포인트로 활용하고 그녀의 접촉을 재앙화시켜 버린다. 즉 그녀는 애처롭게도 어떠한 관계성 자체도 맺을 수 없는 존재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절박해진다. 영화의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다. 비로소 그녀는 상상계의 환상을 유지시킬 수 있었던 유일한 방식 즉 '죽음충동' 의 낭만성을 포기한다. 그녀는 이제 냉정하게 상징질서와 상상계 사이를 순환하는 뫼비우스의 띠를 발견한다.
흥미로운 것은 닉이다. 닉은 아름다운 아내 덕에 살고 있는 평범한 남자처럼 보여진다. 상황파악 못하는 곳에서 썩소도 날리고, 어린 제자와 불륜도 저지르고, 결혼생활의 불만도 극도에 닿아 있다. 그렇다고 목을 매달아야 되는 정도의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곧 그렇게 될 운명에 처해진다. 약간 허당기 있어 보이는 이 인물은 사건의 과정에서 반짝이는 몇 몇 모습을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수동성이다. 필름 느와르의 남자 주인공들이 가진 우수와 우울증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를 오고 가지만, 영화 초반부를 제외하면 영화는 그를 고군분투하는 피해자의 시선에서 접근한다. 영화에서 가장 큰 아쉬움 중에 하나는 바로 닉의 수동성이 그 일관성이다. 물론 이 인물은 마지못한 상황에 소극적 방식으로 대처하기는 한다. 허나 그가 가진 내적 일관성을 위해서 포기해야 했던 것은 인물인 만들어내는 극적 긴장감이다. 일종의 거세당한 현대의 남성성을 포여주는 것 같은 인물로서 드러나는 닉은 사건에서 단 한번을 제외하면 능동적 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가 불리한 상황에서 인터뷰를 통해 분위기를 전환하는 것이다. 그가 택한 전략은 에이미에게 까지 효과를 발휘한다. 그것은 에이미의 깨어진 상상계의 거울에 새로운 거울을 들어주는 방식이었다. 닉이 가진 유일한 일격이자, 닉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방식이다. 그렇지만 그의 전략이 가진 효과는 결국 다시 그를 더욱 강하게 옮아매는 방식으로 돌아온다. 그런면에서 그의 유일한 능동성은 그를 더 깊은 수동성으로 포획하는 자승자박의 실패한 전술이 된 셈이다.
영화의 서사는 결국 에이미의 실종과 에이미의 귀환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녹록치 않은 실종이며 또한 쉽지 않은 귀환이다. 이타카로 돌아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법이다. 하물며 자아/타자를 동시에 파괴하려는 원대한 욕망을 가졌던 이의 귀환이라면 더더욱 만만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이에 사건들의 연쇄가 있었다.사건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들 있다. 이들은 집 앞에 모인 수 많은 중계차들, 선정적인 TV 토크쇼, 에미미를 찾기 위한 자원봉사자들의 모임 등으로 존재한다. 즉 구체적인 개인으로 호명되는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에이미가 도구적으로 이용한- 좀 더 친숙하게 말하자면, 호구로 이용한 사람들을- 이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렇게 구체성을 띠지 않은 인물들은 존재하지만 포획될 수 없는, 유동적인 대중의 욕망 그 자체 상징한다. 닉은 시니컬하게 "좋아하다가, 증오하다가, 사랑한다."라고 이 욕망의 속성을 표현한다. 상황주의자 기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스펙터클에 대해 "사람들로 하여금 다양한 전문화된 매개체들에 의존해서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경향" 이라는 정의한다. 에이미의 욕망과 대중의 욕망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에이미 귀환 과정이 이루어지는 결정적 계기에서 그녀는 자기가 도구적으로 활용하고 계획했던, 스펙터클의 이미지를 스스로 참조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녀의 세계는 상상적으로 완결된 세계이다. 즉 그녀에게는 절대적 타자라는 개념이 없다는 뜻이다. 오로지 그녀에게 존재해는 타자란 스펙터클화된 타자, 즉 자신의 존재 자체를 스펙터클화하고 또 세계 그 자체를 이미지화한 그곳의 주민들이다. 이 만남이 만들어내는 환상의 강박 그리고 구체적인 내밀성까지 침입한 그곳에서 '그녀는 사라졌다.'
대단히 긴 영화 시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다지 지루하지 않다. 시점의 교차가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고, 핀처가 군데군데 깔아 놓은 시니컬한 유머코드들도 재미를 더했다. 스릴러 영화가 가져야 하는 사건 전개의 논리적 빈틈들은 꽤 있어보인다. 약간 허당까가 있다. 영화에서 논리적 빈틈을 찾는 것은 사실 좀 허접해보이기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사건 자체가 주인공이라면 사건의 얼개가 좀 더 치밀했어야만 했다. 에이미가 자살 결정을 번복하는 과정이나, 그녀의 배치물들이 효과를 발휘하고 또는 의심을 사는 과정들이 치밀하지 않다. 어떤 심리적 변화요인들을 이미지화하지 않는다. 종종 등장하는 축약형 나래이션처럼 그렇게 사건 자체를 압축시키는 요소가 있다. 마지막 중요한 사건에서 에이미의 살해동기와 과정 역시 인과율이 떨어진다. 그녀의 악행을 드러내기 위한 그녀의 노력만이 부각되고 있다. 살인의 추억이 없는 셀레브레티가 마치 <원초적 본능>의 얼음 송곳녀처럼 단호하고 확실하다. 또한 CCTV 알리바이 조작 장면은 인과율 측면에서는 거의 치명적이다. 초호화 주택의 CCTV는 필요한 살인 장면만 찍는다는 말인가? FBI가 바보도 아닌데 전국민적 관심사가 된 인물과 연관된 살해 사건이 일어난 집에 그 수많은 CCTV 화면을 스캐닝도 하지 않을 수 있는가...그녀가 납치되었었다는 한 달간 CCTV 녹화 장면 확인하면 그녀는 곧 구속될 것 같다. 핀처는 블랙 코미디 스릴러를 만들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두 주인공 벤 에플랙은 약간의 허당 이미지를 잘표현해 냈다. 그의 넓은 어깨는 단단하고 강인한 무엇이 아니라 아내와 쌍동이 여동생, 어린 제자, 그리고 흑인 변호사에게 조언을 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어른-아이의 모습 그 자체다. 스릴러 영화에 나온 심각한 아담 샌들러 동생쯤으로 보인다. 에이미 역의 로자먼드 파이크는 데이비드 핀처덕에 계 탓다. 희대의 악녀라는 샤론 스톤은 파이크에 비하면 너무 천박했다. <보디 히트>의 캐서린 터너급이다. 로자먼드 파이크는 떡이라도 돌려야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