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책이 꽤 오래 알라딘 종합순위 1위다. 흥미로운 현상이다. 통상적으로 정치철학책은 가장 인기 없는 책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속칭 '과잉 정치화' 되어 있다는 한국 사회.  '정치'는 술자리 안주 목록에 있어 직장상사와 함께 데일리 베스트를 다투지만 기실 '정치학' 은 넥센 히어로즈 8번타자정도의 취급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학'은 이론이나 담론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넒은 의미에서 '정치학'이 다루는 범주들까지 포함한다. 예를 들자면, 국가, 정체, 자유, 정의 등등의 범주들 말이다. 술자리에서 이런 용어들은 분만촉진제를 1박스 맞아도 나오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토론은 대개 지지않으려고 벌어지는 에피소드다. 물론 거기에는 불명확하고 모순적이기는 하지만 세계관이 투영되어 있기는 하다. 주로 이런 난상토론은 온건하다고 칭해지는 '비정치적인물'이나 자칭 '중도주의자' 또는 '냉소주의자'들에 의해 정리되곤 한다. 변증법적 화해는 애초부터 화장실 물소리와 함께 떠내려갔던 것이다. 결국 대화당자자들은 속으로 '빌어먹을 꼴통보수 새끼' 또는 '겁대가리 없고 대가리만 큰 진보 쪼가리 새끼'로 잘근잘근 마음에 짱아지나 담아둔다. 소통이란 이름으로 벌어진 정치논쟁은 앙금과 복수에 대한 염원만 남기고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수순을 따른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가 판매 순위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먼저 좋은 쪽으로 보자. 멱살잡이 하는 '정치토론' 말고 좀 더 근원적인 '정치적인 것들'에 대한 독자들의 허기감이 있다는 것이다. '정의'를 제목으로 한 책이 세인의 눈길을 끄는 것은 징후다. 다분히 역설적 현상이다. 책이 유통되는 시대가 그만큼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반증이며 독자는-또는 시민은- 종적을 감추어버린 '정의'를 찾기 위해 장농 대신 서가를 뒤진 것이다.

 마케팅면에서는 역시 브랜드의 힘이다.  분명히 김영사라는 브랜드와 '하버드'라는 브랜드의 시너지 효과는 무시하지 못한다. 신문에 전면 광고로 이 책을 띄울 수 있는 출판 메이저 김영사. '하버드' 라면 화장실도 왠지 '하버드' 스러울 것 같다고 생각하는 한국민'의 '하버드'에 대한 신화적 상상. 거기에  '하버드 20년 명강의'라는 카피는 분명 불쏘시개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몇 주 전에 <스펀지>를 봤다.  하버드 졸업생이라는 청년이 인증서 같은 것 까지 들고와서 노래를 불렀다.(가수에게  '하버드 졸업장'이 무슨 소용이랴? 그저 TV 버라이어티에 자기를 부각할 소재 외에) 어쨋든 패널들은 모두들 모도폴리 하듯  "와...진짜" 라고 감동해주었다. 정작 인상적인 것은 MC 강호동의 정리였다. 하버드에 대한 한국민의 기묘한 신화를 짧은 몇 마디로 잡아 낸 것이다.  강호동 왈 ..."그쵸. 스탠포드...예일..뭐 이러면.....사람들 반응이 ..'아 아'...뭐 그 정도. 그러다가...하버드 하면 '와우...역시 하버드. 넘버원. 와우...그렇잖아요. 스탠포드...예일 그러면 뭔가 좀..ㅋㅋ"   세계에는 훌륭하고 좋은 대학도 많지만 역시 한국에는 '하버드'다.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 샌델은 하버드 출신, 20대에 하버드 교수가 되었다. 또 정치학계에서 '공동체주의자'의 대표학자로 거론되는 사람이다. 거기에 이 책에 대한 입소문과 책 정보는 '결코 어렵지 않다' '다양한 사례가 중심이 된다' 뭐 이렇게 해놓았으니. '하버드'가 시공간을 넘어 잘 말린 캘리포니아 롤처럼 내 입 안으로 쏙 넘어들어 가는 기대감을 갖을 만하다. 

그런데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쉬운 책일까?  어떤 면에선 그렇다. 다양한 사례가 중심이 되어 있고, 또 실제 강의에 바탕을 두고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는 말이다. 개념을 재규정 한다거나 거기서 더 나아가 미묘한 차이를 두고 새로운 자기개념을 만들어내곤 하는 프랑스 철학책들에 비하면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쉽다라고만 말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다.  

이 책을 읽는 방식은 다양할 것이다. 그중에 두가지 방식에 주목하고 싶다.  

하나는 샌델이 제기하는 각 사례에 직접 답을 하는 방식이다.  이건 굳이 샌델의 책이 아니어도 가능하다. 신문을 본다거나 아니면 소설을 통해서도 머리 아픈 질문을 끌어낼 수 있다. 토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이반 같은 인물은 얼마나 머리 아픈 질문을 던져내던가? 샌델의 책을 읽고 각자 답을 도출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철학의 틀을 주조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 '낙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자기결정권인가 생명보존인가?  여기에는 자기 입장의 재무장을 위한노력은 득이 되질 않는다. 설령 내가 선택하지 않을지라도 '사고실험'으로 밀고 가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측면에서든 그 근거가 충분하기 때문에 답을 찾는 과정은 벽에 부딪히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이고 그 과정 속에 자기철학의 한 조각을 추렴할 수 있다.('-고 믿고 싶다.'는게 정확한 내생각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약간의 시뮬레이션을 해보자. 대학강당. 수많은 수강생들. 세계적인 교수가 직접 당신을 지목해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변과 논거를 대야한다. 일종의 '아테네 강당' 시뮬레이션 같은 것이다. 가슴은 콩닥이고 머리 온도가 높아지는것은 명약관화하다. 아마 수업 뒤에 '아...내가 왜 그렇게 말했지. 이렇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었는데' 라고 후회에 후회를 되뇌일 것이다. 지면으로 만나는 책은 그런 심리적 부담을 없애니 훨씬 낫다. 이런 시뮬레이션 과정은 일종의 훈련이다. 그러므로 혼자서는 할 수 없다. 한계에 부딪힌다. 결국 '책을 눈으로 읽는다'는 특성을 가진 근대적 '독서주체' 의 책읽기 방식으로 이 일은 너무 쉽거나 또는 너무 감당 하기 힘든일이 된다. 사람들은 그래서 대안으로 토론이나 함께 읽기 방식을 택한다.   

다음으로는 '정치철학사'를 짚어가는 방식이다. 마이클 샌델의 책을 읽고 그가 말하는 정의나 도덕등에 고개를 끄덕이다 보면 그가 도출한 결론이 모두 맞는 것 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과연 그런가?  물론 공동체주의가 '완전한 도덕'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매킨타이어의 말처럼 공동체의 도덕은 다분히 역사적이고 구성적이다. 하지만 공동체주의 내에서의 '가치 통합' 내지는 '도덕 정치'의 굴레를 벗겨내기는 쉽지 않다.(물론 공동체주의자들은 이것이 오해라고 말한다.) 특히 맥킨타이어와 이 책의 저자 샌델은 그런 혐의를 많이 받는다. (하지만 샌델의 경우에도 주체구성의 문제, 보편적 정의에 대한 거부 같은 것들은 동의한다.문제는 '좋음'에 대한 가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이런 질문들이 가능하다.  '정치적 공동선'과 '도덕적 공동선'이 과연 같은가?  샌델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다 이런 질문 받으면 또 머리가 빡빡해진다. (내가 한 질문이 아니다. 샌델 만큼 유명한 분들이 샌델을 걸면서 한 이야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샌델식의 '도덕 정치'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정치'를 소멸시키는 '비정치'라는것이 비판자들의 입장이며, 나 역시 동의한다.(전정치적이라는 표현도 결국 이와 유사한 말이다.) 

결국 <정의란 무엇인가>를 비판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과 주변적인 정치 철학의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 '자유주의/공동체주의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정의론>의 주인공 존 롤스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공동체주의'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정의론>을 비판하면서 '공동체주의'라는 말을 꺼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칸트-롤즈'를 소개하고 그리고 각 장의 끝부분 쯤에는 비판의 예를 든다. 책의 후반부,아리스토텔레스를 경유하여 그는 '정치=도덕의 구현'이라는 결론을 맺는다. 직접적으로 그는 '도덕에의 개입'을 요청한다. 다분히 미국적 맥락이라고 보이는데, 그 개입에는 영적인 문제에 대한 고려까지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이는 자칫 역사적으로 축적되어온 '자유'의 가치에 대한 심각한 침해가 되지는 않을까? (물론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모두 '자유'나 '평등'의 문제가 독립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둘은 상호전제적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도덕을 결정하는 최후의 주체는 누구인가? 근대적 민족국가 시스템에서는 국가가 아닌가? 만약 국가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공동체주의자' 샌델이 잡은 방향에는 다른 문제가 없을까?  

 먼저 '자유주의/공동체주의'논쟁은 다양한 전선과 접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두가지가 상호비판의 덕목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또한 상호 중첩되는 부분도 매우 많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둘의 논쟁을 상호 보완적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정의론>의 주인공 롤스 역시 공동체주의자의 비판에 맞서 자기의 논의를 수정한다. 이 말을 공동체주의의 승리라고 오해하면 안된다.  

 다음으로는 공동체주의자로서 샌델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샌델과 맥킨타이어는 공동체주의 내에서도 '가치다원성'이라는 측면에서 경직된 편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가치 다원주의는 사실 자유주의의 가장 큰 미덕인데, 다른 말로 하면 맥킨타이와 샌델은 공동체주의 내에서도 온건한 형태의 완전주의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같은 공동체주의자라도 테일러와 왈쩌 같은 경우 다원주의를 훨씬 더 많이 수용하는 형태를 보인다. '영역의 정의'같은 개념이 그렇다.(이 말은 각각의 영역이 자체동력을 갖는 정의가 있다는 것이다. 일원적 형태의 도덕선은 여기서는 비판된다.)  

'자유주의/공동체주의'의 공동의 적은 '자유방임주의'이다. 롤스식 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자체의 한계와 그의 이론의 한계는 있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하이에크나 노직식의 자유방임주의, 요즘 말로 하면 신자유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롤스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자유라는 기본권을 제 1원칙으로 하여, 분배의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완전 평등주의와는 다르게 '차등의 원칙'이라는 형태의 조건적 불평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롤스가 정치철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이 '조건적 불평등'이다. 그리고 롤스가 제시하는 조건적 불평등은 까다롭다. 그는 사회적 우연성에 대한 불평등(예를 들자면 있는 집 자손들의 대를 이어 가는 성공)은 물론이고 타고난 재능에 의한 불평등도 용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에 조건을 단다. 최소수혜자의 원리라고 하는데, 평균적 평등의 분배 몫보다 불평등 분배의 수준이 높아야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분배 역시 '기회의 균등'을 선행하지 못한다고 못박는다.  

롤스의 이론적 정리는 매우 체계적이며 위계가 존재한다. 자유-기회균등-조건적 불평등의 분배. 이런 식으로 정리된다.

그리하여 롤스식 자유주의는 복지국가 모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있다. 실제로 롤스의 정의론은 유렵의 사회민주주의 전통 하에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한국사회에 적용하면 어쨋거나 롤스식 자유주의만 해도 감지덕지 해야 할지 모른다. 물론 그의 모델이 생산 영역의 문제 그리고 그에 포괄되는 권력의 문제들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분배의 원칙 또한 복지라는 이름의 시혜자 위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 좌파의 입장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샌델이 지적한 '무지의 베일'이 가진 '주체구성 의 문제'등은 매우 적절하다. '하지만 그의 <정의론>은 영미철학에서 패러다임의 전환 수준의 사건이었고,  결론적으로 공동체를 강조한 샌델이 롤스를 비판했다고, 롤스를 만만히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가 관심있었던 덕목, 그가 정치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바로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정의'였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불평등'은 정치적인 것을 방해한다고 믿었고,경제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정치적인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다가치 속에서 우선적으로 거론해야 될 과제와 그에 대한 합리적 원칙을 도출하려 한 것이다. 롤스는 그런 의미에서 '원형적 조건'이라는 상태로 사고실험을 했다. 여기에는 그가 정치를 조화와 합의, 그리고 제도화로 본다는 생각이 바탕이 되어 있다.  

 어쨋거나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은  결국 롤스로 부터 시작될 수 밖에 없고, 그를 비판하던지 반비판하던지, 또는 재구성하던지 간에 그를 경유하게 된다. 이 책의 저자 샌델이 세계적 명성을 얻은 것도 롤즈의 <정의론>을 체계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략적으로 이들을 '권리중심주의'라고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시 되는 권리는 '자유'이다. 시민혁명의 중심사상이 되기도 했던 '자유'는 '개인'의 천부인권적 자유와 사회로의 그 확장이다. 자유주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합의'에 바탕을 둔 정치이다. 사회계약이란 것도 결국 그런 '합의'와 같은 말이다.(그리고 사회계약이란 것은 가상적인 개념이기도하다. 푸코가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대한 비판도 그런 맥락 속에 있다.) 또한 자유주의의 경우 궁극적으로 '국가의 개입'에 대해 부정적이다.  노직같은 이가 말하는데로 '최소국가'. . 우리에겐 자율적 시장이 있고 국가는 관망이나 해라.' '국가 중립'의 개념은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지만, 하여간 그런 말이다.  (그 반대에 있는 것이 라즈의 완전주의이다.)  

 자유주의 내에서도 이들이 너무 간다고 믿는 이들이 있었다.  '야...그건 좀 아니잖아' 라고 하는 이들.. 대표적인 학자가 이 책에 서 비판적으로 언급되는 롤즈이고 그의 저작이 <정의론>이다. 롤즈는 '자유방임식의 자유주의자' 와는  다르다. 흔히 '자유주의적 평등주의'라고 말한다. 그가 '정의'의 문제를 두고 평생 고민하는 것도 그런 이유이고 '공정성'이나 '차등원칙'같은 것도 자유주의를 지향하지만 자유지상주의식으로는 아니라는 생각에서 나온거다. 국가 개입 문제에 있어서도 분명한 원칙을 정하고 있다. 

이 때 하이에크나 롤즈 나 결론은 자유주의자고 이들이 말하는 '개인과 자유'는 실제적 사회성이 결여된 '무연고적 개인' 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었다. 자유주의는 그렇게 공동체와 결연된 존재를만들어낸 못되먹은 것이라는 거다. 이들이 '공동체주의자'이다. 이들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동물'에 기댄다.  샌델과 그가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덕의 상실>의 맥킨타이어가 대표적이다. 샌델 역시 맥킨타이어의 '서사'개념을 이용해서 '독립된 개인'은 상상일 뿐이라고 말한다.(예를 들어 라캉 같은 이들은 무의식마저도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하는 형국에 '독립된 개인'은 사실 이성의 추론일 뿐이다.)  

일단 공동체주의자들은 롤스가 가상한 주체 문제나 보편적 도덕같은 것에 반대한다. 이는 공동체주의가 다원성을 포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공동체주의는 단 하나의 그룹이 아니다. 공동체주의 내부에서도 각자의 이론을 비판하는 흐름이 있다. 센델의 비판자들은 그가 '정치=도덕의 구현'이라고 본다는 측면에서 이를 비판한다. 같은 공동체주의자라고 하지만  테일러나 왈쩌같은 이들은 샌델식의 '정치=도덕의 구현'을 거부한다. 급진민주주의자인 상탈무페는 샌델이 <정의론>비판에서 롤즈가 간과하고 있는 '구성적 주체'의 문제를 롤스 비판의 정점으로 한점을 높이 평가한다. (무페는 거기까지만 샌델의 미덕이라고 본다.) 갈등론적 관점에서 보면 롤스 역시 자유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한계 즉, 민주시민의 합의성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페같은 경우에는 슈미트를 경유하여 해소되지 않는 '갈등'을 정치라고 규정한다. (롤스식의 조화나 합의와는 거리가 있다.)

 여기에 또 약간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공화주의라는 것도 있다.공동체주의와 공화주의는 내적연관이 있다고 보는 경우도 많다. 아렌트, 포콕,스키너와 패티트가 많이 거론된다.  패티트 같은 이들은 '자유'에 대한 개념을 '지배의 부재'로 정의하며 '간섭'하지 않는 자유(흔히 이사야 벌린의 소극적 자유) 와 구별하면서도 공동체주의자 샌델에 대해 '도덕의 과잉'만 추구할 뿐 '덕과 자유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라고 한다. 

사실 다양한 입장을 몇가지 선으로 넣기는 힘들다. 자유주의 내에서도 다양한 흐름이 존재하고 또 공동체 내부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가장 헷갈리게 하는 건 서로가 서로의 이론을 오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둘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르기도 한다. 자유,평등, 분배,정의,공동선, 도덕,국가중립 등등등에 따라 조금씩 어디에 조금 더 함량을 높이느냐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를 몇 몇개의 주의로 정리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사후적이다.(음악에서의 장르도 그렇다.) 

정리하자.하이에크식의 자유주의에는 적이 많다. 사람들이 개인화되고, 정치공동체에 관심이 없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자유주의의 영향이자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그 반대급부로 '공동체'를 외치는 것은 저항의 거점으로 의미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다양한 흐름이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하야 한다. 또한 서구정치사회의 발전사 모델과 한국의 것과의 차이도 고려해야 한다. 포스트주의에서는 한동안 '한국의 집단주의'에 대해 많은 비판을 했었다. 그래서 '더 많은 개인'의 요구 역시 맞는 말이다. 요즘 인기 있는 저항담론을 슬로건화하자면 '더 많은 개인들의, 더 많은 연대' 아닌가?

쉽게 할하면 '모 아니면 도'도 아니고 '모가 아니라고 도'도 아니다.    

그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딱잘라 흥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샌델의 사회 접착력을 떨어뜨리는 자유주의 비판과 도덕의 복원을 '진보적'인 것이라고 박수를 치며 좋아할 것이다.어떤 이는 공동체주의도 국가적의미의 거대공동체와 작은단위의 공동체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국가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경우 다음으로 이야기할 것은 애국주의논쟁이 된다. 후자는 흔히 요즘 말하는 생태공동체나 자율적흐름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개인화에 저항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주의에서 말하는 '덕의 실현'이 가장 극단적으로 추진될때- 비판자들은 이런 것을 '공동체주의 오해'라고 하는데- 나타날 수 있는 사회는 어떤 것일까? 

샌델의 책은 무너지는 정치 공동체에 대해 우려를 표현하고, 독자에게 이를 뒷받침해 줄 정당한 근거를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에만 모든 생각을 집중해서 모든 것에 접근하는 것은 세상은 '반MB와 친MB' 만 있다는 것 처럼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정치학자 김만권은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이 논쟁을 비교적 쉽게 정리해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롤스에 대한 설명이 풍부한 편이다. 김만권은 스스로도 자유주의자라고 말한다. 대신 지금 만연한-그로 인해 비판이 되기도 하는- 자유주의는 그가 따르는 자유주의가 아니라는 점도 말한다. <자유주의에 관한 짧은 에세이들>은.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현대정치철학의 흐름들을 교과서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자유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예를 들자면 세간에 입도마에 오르는 자유주의는 '진정' 자유주의가 아니다라는 식- 그리고 공동체주의,공화주의등을 다루며 각 흐름 내의 비슷하지만 다른 차이들도 설명한다. 설명투로 쓴 문장이라 읽기도 쉽다. (그래서 딱 1권만 볼 요량이라면 이 책을 추천한다.) <불평등의 패러독스>는 전작의 확장판이라고 보면된다. 하지만 조금 더 논의를 세밀화하며 자세한 부연설명이 있다. 앞의 책이 중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빠른 서술에 들어간다면 이 책은 조금더 학술적인 면이 강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준비만 되어 있다면 결코 어렵지 않다. 이 책에서 김만권은 그가 생각하는 자유주의 철학과 공동체주의 철학의 접점을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아렌트와 롤즈를 연계하는 방식으로 이를 헤쳐간다. 이 과정 중 롤즈와 그를 둘러싼 비판/반비판들이 설명된다. <그림으로 보는 정치사상>. 이건 '자유주의/공동체주의'논쟁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마키아벨리부터 근현대 주요 정치학 개념어집 정도다.좀 범위가 넓다. 대신 내용은 좁고 압축적이다.  

지식인마을 <롤스와 매킨타이어>는 롤즈와 그에 대한 대응으로 맥킨타이어를 병치시킨다. 전체적으로 보면 롤즈에 대한 설명과 비판이 중심이다. 샌델의 사진이 딱 한번 나온다.  공동체주의에 대한 비판은 주로 '공동체주의에 대한 오해'정도로 넘어간다. 지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정도로는 나쁘지 않다.   

상탈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을 전체적으로 비판하면서 그녀의 급진민주주의 이론을 구축한다.그녀는 슈미트를 중심으로 '적대'의 정치학을 구축한다.(이 책의 저자는 그녀를 그람시적 포스트마르크주의자라고 칭했다. 전통 마르크스주의에서 그녀의 이론은 마르크스도 뭣도 아닌 즉 비마르크스적이라라고도 한다.) 

조승래의 <공화국을 위하여>는 이 논쟁에서 빠져있는 공화주의 전통과 현대 철학자들에 대해 언급한다. 공동체주의와 공화주는는 유사한 부분이 있어서 일부에서는 공동체주의를 현실적으로 밀고나가다보면  공화주의적 결론으로 간다는 사람도 있다. 특히 이 책은 고전적 공화주의 전통과 아울러 현대 공화주의자들-스키너와 패티트등-의 이야기가 이 잘 정리되어 있다.   

조금 벗어난 듯 보이지만 <미국의 정치문명>도 고전적 의미의 '자유주의/공동체주의'의 현실적 쟁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거기에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치철학의 근저를 살펴보는 데도 매우 훌륭하다. 권용립교수는 미국을 '근원적 보수주의'국가로 설정하면서 '자유주의/공화주의/청교도주의'가 미국 정치를 만들고 이끄는 세가지 중요한 힘이라고 본다. 특히 미국 독립과정에서 벌어지는 자유주의/공화주의의 갈등은 이 논쟁뿐만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흑인이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나라이며 동시에 세계를 불바다로 만들기도 하는 나라. (미국은 '그래봐야 악이다' 하면 이런 책은 볼 필요가 없다.)최소한 '악'인데 어떻게 생겨먹은 악인지 그 얼굴을 보려는 관심은 있어야 이야기가 된다.)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과는 관련없지만 롤스가 따르고 있는'칸트'의 윤리철학과 마르크스라는 비판이론을 경유한다는 차원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책도 의미가 있다. 가라타니는 사회주의는 윤리문제라고 선언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책 중 그의 문제의식에 대해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대담형식의 글이다. 역자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진의 입문서로서 가장 좋다고 말하는데, 나 역시 동감이다.

사족> 1) 이 책이 역자가 정치학자 출신이었다면 보론으로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에 대한 이야기를 반드시 넣었을 것이라는게 내 생각이다.   

2) 참고로...나는 정치학과 출신도 아니고 정치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아니다. 대략 교양 수준으로 이야기하는 것 뿐이다. 충분한 이해 부족으로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오해한 부분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샌델에 대한 비판적 읽기를 위해서 자유주의자 롤스를 많이 부각했다. 하지만 굳이 나누자면 나는 마르크스에 더 관심이 많고 영미철학적 논쟁보다는 난삽하다는 유럽쪽이 내 취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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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2016-06-15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와우,,,멋진 정리이십니다!!!!
 

나는 아무하구나 친구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하구나 소통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에게나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이건 내 친구들과 나누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며 함께 웃을 몇 명의 친구들...제 상황아시죠.^^  

친구들, 전 잘 지내고 있어요. 그 쪽도 다들 그러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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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들은 엎어지고 있다. 그러나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들 낮달을 바라보 듯 서로의 얼굴을 보며,또 한숨을 한번 쉬고 다시 돌아갈 뿐. 

... 

 포정의 칼을 생각한다. 생명의 온기로 데워진, 

 ....그리고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붉은 핏방울.   

 

종이에 배인 상처를 매만지며  

생리를 시작한 어린 사슴처럼 굴지 말길 바랄 뿐이다.당신. 

 ...

그러한즉 나는 다시 한번 포정의 칼을 생각한다. 

내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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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세프www.unicef.or.kr/main.asp 

월드비전www.worldvision.or.kr/html/main.asp 

세이브더 칠드런www.s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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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라딘 불매운동에 대하여 

"알라딘의 대표가 홈페이지 첫 화면에 배너 공지 형태로 이 문제에 대한 공식적 사과와 향후 유사한 사태의 재발 방지'를 게재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제가 20여일 전 올렸던 요구사항입니다. 조유식 대표는 신밧드의 이름으로 블로그라는 마술 양탄자를 타고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술렁술렁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입니다. '이 정도면 됐다' 라는 반응부터 또 '이게 뭔가? 장난하냐?' 라는 반응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단계로 가기 위한 이행의 제안도 있습니다. 환영합니다.  

 바람구두님을 비롯해서 이미 다른 분들이 잘 정리해 놓았듯이, 그리고 제 지난 페이퍼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싸움은 크게 두 가지 문제와 한 가지 사족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1) 김종호씨의 거취 문제였고 또 다른 하나는 2) 사과와 재발방지를 위한 공식 입장 표명 이였습니다. 그리고 곁가지 문제는 3) '알라디너들 사이의 싸움' 이었습니다.   세번째 것은 처음부터 제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다른 분들이 적당히(?) 대응하는 수고도 해주셨습니다. 가장 미숙한 저격범은 늘 자기가 저격하는 위치에만 놓여 있지 타깃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저격이 실패할 경우 자기 위치가 노출되고 이어서 자기 코 앞에 수 십개의 총구가 놓여질 것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련의 일들은 제 관심사는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장기에서는 기물을 잡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라는 것이지요. 제 나름대로는 이 싸움에 있어서 철학, 내부 동력, 방향, 전술 등이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나름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심을 생각하며 평상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개인적 과제였습니다. 제가 알라딘 내 불매운동에서 주로 다룬 것은 첫번 째 것보다는 두 번째의 것에-즉 사과와 재발방지-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알라딘 불매운동은 선언 이후 별다른 일이 없었으며 욕구는 일괄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직화로 보자면 첫 단계에 있었고 그 단계에 맞는 실천 과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국면이 움직이며-저는 이런 현실의 역동성이 매우 좋습니다. 글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것이지요- 시간이 지나며 새로운 이행을 위한 욕구와 제안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세번째의 잡음과도 단절하며 그동안 집중하지 못했던 첫번째 문제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진다는 면에서 환영합니다. 제가 지난 번 페이퍼에서도 인용했던 '물의 흐름'과도 같은 방향이라고 봅니다. 물론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대해에서 만나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틈틈히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슬쩍 건네겠습니다.

 조대표의 사과건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논어> 자로편에 보면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니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함께 하지만 같지 않고 소인은 같지만 화합하지 못한다.' 는 뜻입니다. 흔히 '화이부동' 이라는 성어로 잘 알려져있습니다. 제가 볼 때 조유식 대표를 향한 편지 글은 '화이부동'의 실천적 재현입니다. 각자가 모두 다른 형식과 글을 쓰지만 '조유식 대표를 향한 편지글 NO '로 '같음' 을 이루어 냅니다. 관망을 하고 계시던 분들도 이 릴레이에 참가해 주셨습니다. 바람돌이님의 노고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참여해주신 분들의 노력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유식 대표는 생각보다 일찍 나왔습니다. 조유식대표의 신밧드 블로그는 사실 꼼수입니다. 제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시간에 올라와서 약간 당황했습니다만 쭉 읽어보니 결국 조기수습용 꼼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성이 차지 않습니다. 히딩크 감독님 말을 빌자면 '많이 배고픕니다.'  이것이 '꼼수' 임을 알지 못한다면 상황은 달라질겁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이 사과가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알라딘 CEO의 수싸움임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앞서서도 이야기했지만 '대중효과'를 발휘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냐 하지 않느냐' 가 아닙니다. 이런 꼼수를 알면서 그걸 용인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옳지 않은 것이냐' 가 핵심입니다.  어떤 분은 '상관없다. 타협은 중요하다' 라고 말합니다. 전 그게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견해이고 또 타당하기도 한 생각입니다.  

타협은 중요한 덕목입니다. 물 위에서든 물 밑에서든 대화와 타협은 어딜 가나 있습니다. 하지만 타협이란 것도 나름대로 질서가 있는 법입니다. 첫째, 상대가 진정성을 가지고  둘째, 그 진정성에 맞는 형식을 취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최소한 어린 아이들의 다툼이 아닌 이상은 그렇습니다. 조유식 대표가 정공법을 쓰지 않은 것은 그런 면에서- 설령 그의 말이 진심이었다 하더라도- 그 진정성 마저 의심받기 쉬운 떳떳하지 못한 수인 셈입니다. 아닌가요?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소한 그가 이 문제에 대해 정말 떳떳하게 뉘우치고 앞으로의 '금과옥조'로 삼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우회적인 방식으로 대처할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일개 파견(도급) 노동자 하나 때문에 알라딘 대표로서 창피하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방송에 나와서 무릎 꿇고 인터뷰 하라는 것도 아니고, 머리를 풀어 해치고 석고대죄를 하라는 것도 아닌데 그것이 그렇게 수치스러운 일일까요. 자존심이 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중요합니까? 같은 하늘 아래 평생 누군가로 부터 원을 사지 않겠다는 그 마음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자존심이 중요합니까? 제가 듣고 싶고, 정도에 맞다고 생각하는 길은 '블로거 신밧드' 의 입장이 아닙니다. '알라딘 CEO 조유식' 의 것입니다. 내년 1월 부터 제도 개선을 한다고 조대표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을 굳이 말하지 못할 이유도 없을 듯 합니다. 전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 술은 새부대에 담으라' 는 말이 있습니다. 묵은 해가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알라딘 CEO 조유식 님이 이 해가 끝나기 전에 '정도'에 맞는 방식으로 다시 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요청드립니다. 알라딘 CEO 조유식 대표님!  

 책 읽는 선비와도 같은 CEO를 꿈꾸신다고 들었습니다. <사서>에는 항상 두가지 인물형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군자와 소인'입니다. <사서>는 군자의 덕을 칭송하고 그걸 이루기 위한 타산지석으로 소인을 대칭적으로 언급합니다. 맹자는 세상에 군자와 소인이 따로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대체를 따르면 대인이 되고 소체를 따르면 소인이 된다' 라고 했습니다. 즉 밝고 맑은 큰 길을 따르면 군자가 되는 것이고 이익과 삿됨의 길을 따르면 소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매심제기>에서 다산은 '뉘우침의 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뉘우침에도 방법이 있다. 만약 밥 한 끼를 먹을 사이에 불끈 성을 냈다가 어느 새 끈 구름이 허공을 지나가는 것처럼 한다면 어찌 뉘우치는 방법이겠는가? 작은 허물은 고치고 나서 잊어버려도 괜찮다. 하지만 큰 허물은 고친 뒤에 하루도 뉘우침을 잊어서는 안된다. 뉘우침이 마음을 길러주는 것은 똥이 싹을 북돋우는 것과 같다. 똥은 썩고 더러운 것인데 싹을 북돋아 좋은 곡식을 만든다. 뉘우침은 허물에서 나왔지만 이를 길러 덕성으로 삼는다."  

어느 누구도 완벽한 기업, 완전한 CEO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실수도 하고, 때로는 현실과 타협도 합니다. 조유식 대표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알라딘은 더 많은 가능성으로 사랑을 받을 수 도 있고 그렇고 그런 인터넷 서점이 될 수도 있을 겝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동안 알라딘을 통해 좋은 책과 좋은 인연을 맺은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의 인터넷 서점 중에서 하나쯤은 괜찮은 기업이 있었으면 합니다. 조대표에게 다시 공은 넘어갔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대신 켄트는 "명예는 단도직입적이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저의 알라딘 불매는 계속 될 것이며 저는 조금 더 미리 주문하는 불편을 감내하더라도 동네서점과 보수동 헌책방, 오프라인 음반매장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오늘 내일 안에 예치금등은 털어낼 생각입니다.) 

2. 글쓰기를 중지하며... 

 알라딘에 집터를 잡은지 어느 덧 6년이 되었습니다. 연애 편지를 많이 쓰다가 -저 많이 썻습니다.ㅎㅎ- 그것도 뜸해진 시점에 '쓰고 싶다는 마음' 에 서재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리뷰랄 것도 없이 그냥 저냥 몇 가지 생각을 쓰며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새 알라딘에서 꽤나 알려진 서재인이 되었습니다. 논쟁에 참여하기도 했고, 또 그런 것에 심드렁해지기도 했습니다. 지난 1년간은 서재 댓글 기능도 아예 막아 놓고, 몇 몇 분들과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제대로 된 소통은 최소한의 상대에 대한 존중과 자기 품위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간혹 이를 지키지 못한 경우가 있었던 듯 합니다. 서재 댓글기능을 막았던 것은 그런 면에서 외부 만을 통제한 것이 아니라 제 내부 역시 자정하고 있던 셈입니다. 생각 보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어찌 해서 한 해의 마지막에 그 동안 했을 이야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도 부덕함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그 말들 속에 제 진심이 있었고 또 믿는 바를 제가 선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서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역량이 있었다면 더 많은 일들을 도모할 수도 있었겠지만  제 그릇의 한계인 듯 합니다. 

<대학>의 첫번째 장구는 이겁니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知止而后에有定이니 定而后에能靜하며 靜而后에能安하며 安而后에能慮하며 慮而后에能得이니라   

제가 외우는 <대학> 구절 두 개 중에 하나 입니다. 사실 <대학>의 모든 것은 첫번째 장구에 다 들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두고 두고 곱씹어도 아깝지 않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술적 차원에서 공부를 할 만큼의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책 읽기도 일종의 삶을 위한 공부라면 '큰 공부'가 되길 바라는 마음은 늘 갖고 있습니다. 최소한 제 '책 읽기' 공부의 목표가 글자에 집착하거나 이해 하는 차원이 아니라 뜻을 세우고 인간의 길에서 어긋나지 않는 길이길 늘 바랍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회사에서 나오면서도 이 구절을 다시 뇌되었습니다. '대학지도는 재명명덕하며 재친민하며 재지어지선이니라, 지지이후에 유정이니 정이후에 능정하며 정이후에 능안하며 안이후에 능려하며 려이후에 능득이니라.' 

<대학>6장에는 제가 좋아하는 말이 또 하나 있습니다. 

 所謂誠其意者는 毋自欺也이니 如惡惡臭하며 如好好色이 此之謂自謙이니 故로 君子는 必愼其獨也이니라. 

그 뜻은 이렇습니다. " 이른바 그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악한 내음을 미워하는 것같이 하며 좋은 빛을 좋아하는 것같이 함이 이 이르되 스스로 쾌족함이니,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가니라." 

마지막에 나오는 말이 '愼獨' 신독'이지요. '스스로 삼가한다'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절에는  此謂誠於中이면 形於外니 故로 君子는 必愼其獨也 (속마음에 성실하면 밖으로 드러난다. 고로 군자는 스스로 있을때 삼가한다.) 라고 하여 한번 더 강조합니다. <중용>의 첫장 역시 '신독'에 대한 강조가 나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 동안 저는 제가 인용한 말들을 가슴 깊이 새기고 또 새길 생각입니다.

6년이란 시간 동안 많은 글들을 썼습니다. 사실 제대로 된 글이라고 할만한 것은 거의 없지만 글이라 불리웠고, 알라딘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서는 '허명'도 얻었습니다. 저로서는 잠시 모든 글쓰기를 중단할 시점이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책을 더 많이 읽을 것이고, 더 많이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글은 전혀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기존의 글들은 그대로 둘 생각입니다만 그곳에 저는 없습니다. 사실 바람구두님네의 출산을 축하해주고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것에 연연해 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곳에서든 또 어떤 형태로든 아름다운 탄생을 기억할 것이며 또 축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산이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면서도 산모와 태어나는 아이, 그리고 가족 모두에게 긴장감을 주는 일입니다. 저희집 아이들은 모두 조산원에서 태어났고, 가족적인 친밀한 분위기 안에서 저는 그 모든 과정에 참여했기 때문에 탄생을 위한 엄마와 아기의 위대한 쟁투를 기억합니다. 바람구두의 사랑스러운 아이가 무탈하게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첫번째 꽃숨을 건네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  

기쁨도 아쉬움도 없는 평안한 마음으로 사라집니다.

風來疎竹 風過而竹不留聲  풍래소죽 풍래이죽불유성  
  대숲을 흔들며 불어온 바람은 지나간 뒤에 소리를 남기지 않으며 

雁度寒潭 雁去而潭不留影  안도한담 안거이담불유영   
찬 연못을 날아가는 기러기는 사라진 뒤에 연못에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따로 한 분 한 분 인사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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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6 00: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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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6 02: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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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6 13: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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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6 22: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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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8 23: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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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9 04: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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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0 11: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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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4 2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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