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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따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 지음, 부희령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7년 4월
평점 :
현존하는 마닐라의 유명한 환락가 에르미따. 그거리의 이름을 딴 모진 운명을 타고 태어난 여인 에르미따의 이야기.
7천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 필리핀은 근래 우리에겐 훌륭한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마젤란에 의해 서양에 알려진 이후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를 거쳐 2차대전 시기엔 일본의 점령하에 힘든 근대를 보냈고 독립 후에도 미국과 일본의 영향이 큰 나라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시류를 타고 부를 형성한 메스티소(스페인계 혼혈) ‘로호 가문’의 막내딸 콘치타는 일본군 병사에게 강간당하고 비밀리에 에르미따를 낳고 미군 장교와 결혼하며 딸을 수도원에 버리고 미국으로 떠난다. 에르미따의 이모 펠리치타와 외삼촌 호셀리토는 에르미따를 가문의 수치로 여겨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미국의 영향력과 부패한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자신들의 재산과 쾌락에 몰두한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된 에르미따는 그들에게서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었지만 그를 모욕하고 자식임을 인정하지 않는 어머니와 그녀의 형제들을 위한 복수를 위해 부유하거나 권력을 가진 이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육체와 아름다움을 팔게된다.
에르미따의 메스티소와 일본계의 혼혈이라는 설정이나 생모가 미군과 결혼하고 그녀 자신도 짧지만 미국인과 결혼하는 모습 속에서 현재 필리핀 상류층의 정체성이라는 부분을 드러내준다. 그리고 근현대 역사와 경제적 바탕이 되는 미국과 일본의 영향 등을 통해 현재 필리핀의 모습이 에르미따를 통해 투영된다. 행복을 갈구하고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원하지만 그를 위한 치부의 방법이 가지는 모순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잃어가는게 현재 필리핀이 안고 있는 모순은 아닐까? 에르미따의 복수가 미완성이듯이 필리핀의 개혁과 짓밟힌 자존심의 회복도 아직은 미완성인 상태가 아닐까?
자신을 수탈하고 치욕의 멍에를 지고 살게했던 미국과 일본이라는 폭력에 대한 복수는 꿈조차 꾸지 못하고 현재의 안락과 평안함을 주는 존재로 생각하고 그들의 것을 배울려고 애쓰는 모습이 지금 필리핀이 가지고 있고 또 우리도 가지고 있는 자기 모순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