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절판


회장님 가라사대, 인간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책을 읽는 인간과 읽지 않는 인간.-15쪽

셜리 잭슨 『힐 하우스의 유령』, 리처드 매시슨 『지옥의 집』, 헨리 제임스 『나사의 회전』, 빅토리아 홀트 『비밀의 여자』, 다프네 뒤 모리에『레베카』, 에드거 앨런 포 『어셔 가의 몰락』. 그렇군. 이 집의 원래 주인은 고전적인 고딕 호러 소설까지 섭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모두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하나같이 뭔가 사연이 있는 커다란 저택을 찾아온 사람이 봉변을 다하는 이야기뿐이다. 지금의 자기 상황에 딱 들어맞지 않는가! 일부러 이 방에 놔두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상당히 공을 들인 농담이다.-31쪽

커피 향과 브랜디 향. 그때 고이치는 문득 '지복(至福)'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어두운 밤, 따뜻한 실내에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먼 옛날부터 세계 곳곳에서 있어왔을 행위. 역시 인간이란 픽션이 필요한 동물이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것은 바로 그 한 가지뿐일지도 모른다.-52쪽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책을 좀 읽는다고 자만하는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것도 터무니없는 환상이에요. 인간이 한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거든요. 서점에 가면 아주 잘 알 수 있어요. 나는 서점에 갈 때마다 내가 읽지 못한 책이 이렇게나 많다니, 하고 늘 절망합니다. 내가 읽지 못하는, 천문학적인 수효의 책들 중에 내가 모르는 재미가 넘치는 책이 수없이 많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심란할 수가 없어요.

- 정말 공감하였던 구절. ^^-58쪽

"맞아요. 히어로는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으니까 다른 사람의 개입이 별로 필요하지 않잖아요? 여자 처지에서 보면, 그래, 혼자서 멋대로 하드보일드하라지, 하는 기분이 들죠. 여자는 상대방을 통해서 자기를 보는 면이 있으니까, 상대방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고 싶다, 상대방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가장 크거든요. 결국 자존심에 지나지 않지만요. ...."-61쪽

자기 안에 존재하는 커다란 모순을 깨닫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63쪽

"... 최근에는 이른바 액자소설이라는 게 유행이라더군요. 하나의 이야기 안에 몇 개의 이야기가 들어 있고, 마지막에 가서 포괄된다는 형식인데, 나는 이것이 현대의 우리 생활이 바로 거대한 액자라는 상황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줄거리나 인물의 성격이 상품이나 기호로서 이야기됩니다. 수많은 게임 소프트 속에서 우리는 가상의 전쟁과 여러 개의 대안을 소비하죠. 스위치를 끄는 순간 상자 안의 이야기는 종료되고, 우리는 그 바깥쪽의 생활을 살아갑니다. 신문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일상생활 또는 현실이라는 바다를 표류하는 수많은 작은 액자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아요. 그리고 그 바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몽 같은 세계가 펼쳐져 있죠. 예전에는 인간이 거시적 시점을 획득하려면 나름대로 노력을 해야만 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대항해를 하든지, 종교나 철학 등을 통해 배워나갈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간단하게 거시적 시점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항공지도라든지 우주에서 바라본 푸른 지구의 사진을 보면 그만이죠. 모든 사람이 신의 시점을 손에 넣은 겁니다. 그렇게 해서 가끔 넓은 세계를 획득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모두들 그렇게 행복해진 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지 그것만이 뼈저리게 느껴져서, 다른 사람과의 차별화에 열을 올리게 되었어요.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생이 제트 코스터처럼 전개되되 자기 손바닥 위에 머무는 픽션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인생을 다른 사람이 소비한다는 건 부정하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자기가 쥐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고 싶어합니다. 자신은 바깥쪽 세계에 있다는 기분, 그것이 이렇게 많은 액자식 구조의 이야기를 낳은 배경이 아닐까, 그런 문제가 이 4부에 함축되어 있는 느낌이에요."-65-66쪽

<삼월은 붉은 구렁을>. 인상적인 제목이다. 심장의 표면을 차가운 손이 스윽 어루만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70쪽

"그렇죠. 독자는 언제나 탐욕스러우니까요. 늘 새로운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죠. 새로운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꿈이랍니다. 책을 덮고 나서도 책 밖에 지평선이 펼쳐지고, 어디까지고 바람이 불어갈 것 같은 이야기. 눈을 감으면 모자이크 같은 반짝반짝하는 단편들이 잔상처럼 되살아나가는 이야기"
"인생과 사랑의 수수께끼가 숨어 있는 이야기"
"사람들이 이어서 써나가고 이어서 이야기해 나가는, 전설이 새로운 전설을 낳는 이야기."
"맞아요. 그게 우리의 목표니까요."

- 이 대사는 마지막 장에서 다음과 같이 변주된다. -
책을 덮고 나서도 책 밖에 지평선이 펼쳐지고, 어디까지고 바람이 불어갈 것 같은 이야기. 눈을 감으면 모자이크 같은 반짝반짝하는 단편들이 잔상처럼 되살아나가는 이야기. 사랑과 인생의 수수께끼가 숨겨진, 손에 든 순간 묵직하게 무게가 느껴지는 열매 같은 이야기.-109, 393쪽

아카네는 다카코 몫으로 준비해 온 컵에 버번을 기운차게 따라주었다. 콧속에 잠들어 있는 도마뱀이 서서히 깨어나는 것 같은 향에 어깨에 남아 있던 낮의 잔재가 사라지는 것 같다.-122쪽

언제나 우리는 밤 바다를 달려간다. 우리는 어둠의 바닥을 홀로, 원하지도 않은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133쪽

미스터리 팬은 본래 욕심 많고 탐욕스러운 인종이다. 미스터리로 읽을 수만 있다면, 다른 장르에서 진출해 오든 새로 개척하든 뭐든지 환영이다. 순수문학이든 논픽션이든, 매력전인 수수께끼가 많고 문장도 능숙하고 분위기가 있으면 오케이. 소도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즐거움은 커진다.-142쪽

"야아. 그땐 쇼크였지. 모든 책이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써서 생겨났다는 걸 알았을 땐 말이야. 난 그 때부터 별로 진전이 없나 봐. 지금도 소설을 사람이 쓴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거든. 어딘가 소설이 열리는 나무 같은 게 있고, 다들 거기서 따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출판 일을 한 지 꽤 오래 됐는데도 아직도 속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니까. 언젠가 반드시 '에이, 거봐'하면서 현장을 덮치겠다고 마음먹고 있어."

- 멋진 상상이다. 나도 사람이 소설을 쓴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150쪽

워드 프로세서는 이상한 기계다. 워드 프로세서를 앞에 두고 앉아 있으면 생각지도 않던 것을 쓰게 된다. 어렴풋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던 것이 유난히 뚜렷한 형태를 갖게 된다. 워드 프로세서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워드 프로세서는 그런 의미에서 허구에 이용된다.-308쪽

유년기에 받은 영향은 재미있다. 같은 세대 사람이 만든 것은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와 만화 등 시각매체의 영향은 특히 크다. 디지털 세대인 요즘 아이들이 자라나면 무엇을 만들지 매우 궁금하다. 게임 세계의 영향을 받은 그들은 어떤 꿈을 꿀까? 그들이 만들어내는 허구는 우리의 것과 얼마나 다를까?-338쪽

빛은 언제나 뭔가의 방아쇠가 된다.-340쪽

어째서 인간은 '잘 된 이야기'에 감명을 받을까? 이야기의 내용에 감동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부모자식 간의 사랑, 삶과 죽음의 갈등, 아낌 없이 주는 사랑.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감정이입한다. 그것은 알겠다. 하지만 '잘 된 이야기'에 대한 감동은 이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그 감동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 들어맞았다는 쾌감이다. 어째서 쾌감일까? 그리고 '잘 된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이야기 같은 착각을 하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인간에게는 몇 종류의 이야기가 입력되어 있는 것이리라. 입력된 이야기와 일치하면 빙고(!) 상태가 된다. 어째서? 픽션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제4 욕망인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에? 아마도 상상력이라는,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능력 때문이리라. 픽션을 추구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동물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우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마지막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날부터 우리는 고독하고 복잡하며 불안정한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343-344쪽

어쩌면 내가 지금 여기 있지 않아도, 이 세계는 언제까지고 이렇게 여기에 있는 것일까?-385쪽

"좋은 글을 읽는다는 건 쓰는 것과 같으니까. 아주 좋은 소설을 읽다가 행간에 숨어 있는, 언젠가 자기가 쓸 또 하나의 소설을 본 적 없어? 그게 보이면, 난 아아, 나도 읽으면서 쓰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거든. 또 행간에서 그런 소설을 볼 수 있는 소설이 나한테는 좋은 소설이고."-150쪽

이미 밤이 깊었다. 방 안을 비추는 어슴프레한 오렌지색 불빛은 함께 밤을 보내는 이들을 친밀하게 한다. 방 안에는 여행 중의 밤에만 존재하는 농후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조금은 감상적이고, 조금은 우화적인 공기가.-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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