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거미원숭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사상사 / 2003년 6월
구판절판


3년 동안 교제하며 결혼하기로 약속한 애인이 도넛화해 버리고, 그래서 우리들 사이가 거북해졌을 때쯤 -- 도대체 어느 누가 도넛화해 버린 애인과 잘 지낼 수 있겠는가? -- 나는 매일 밤마다 고주망태가 되어 <시에라 마드르의 보물>에 나오는 험프리 보가트처럼 비쩍 마르고 초췌해져 있었다.
"오빠, 제발 부탁이니깐 그녀는 단념해요. 이러다가 쓰러지겠어요."
누이동생이 충고했다.
"오빠 마음은 잘 알지만, 한번 도넛화해 버리면 다신 원상 복귀되지 않아요. 이젠 확실하게 결단을 내려야 한다구요. 안 그래요?"
분명히 그녀 말이 맞다. 여동생이 말하듯, 한번 도넛화한 것은 영원히 도넛화한 채 있는 것이다.
나는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작별을 고했다.
"너하고 헤어지는 것은 괴롭지만,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나 봐. 너를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어쩌고 저쩌고."
"당신은 아직도 모르는군요."
도넛화한 애인이 말했다.
"우리들 인간 존재의 중심은 無에요. 아무것도 없는 제로라구요. 왜 당신은 그 공백을 똑바로 직시하려고 하지 않죠? 왜 주변부에만 눈길이 가느냐구요?"
왜?라고 질문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왜 도넛화한 사람들은 그처럼 편협한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걸까?
그러나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나는 애인하고 헤어졌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의 이야기다. 그리고 작년 봄, 이번에는 여동생이 아무 예고도 없이 도넛화해 버렸다. 조치대학을 나와 일본항공에 근무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출장 간 삿포로의 호텔 로비에서 갑자기 도넛화해 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집에 틀어박혀 매일매일 울면서 보내고 있다.
나는 가끔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잘 지내?" 라고 물어본다.
"오빠는 아직도 몰라?"
도넛화한 여동생이 말한다.
"우리들 인간 존재의 중심은 ……." -99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