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구판절판


나로 말하자면, 나에 관해 굳이 말하자면, 나는 엉망이었던 사람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았고,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누군가를 사랑이라든가 우정이라든가 하는 이름으로 내 생 속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나만을 위해 존재하다가 심지어 나 자신만을 위해 죽고자 했다. 나는 쾌락의 신도였다. 자신을 잃고 감각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나는 언제나 내 견고한 가족의 성곽으로 발길을 내지르곤 했다.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밤새 춤을 추었다. 그 사소한 일상이 실은 나 자신을 차근차근 파괴해가고 있다는 것을 몰랐고 설사 알았다 해도 멈추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파괴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온 은하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야만 성이 차던 존재, 술에 취한 날이면, 닫힌 문들을 발길로 차면서 나는 진실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발음해본 적은 없지만 그때 누군가 내 심장에 청진기를 가져다 대었다면 아마도 이런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왜 태양은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 거야? 왜 니들은 내가 외로울 때만 내 곁에 없는 거야? 왜 내가 미워하는 놈들은 승승장구를 하는 거지? 왜 이 세상은 내 약을 바싹바싹 올리면서 나의 행복에 조금도 협조하지 않는 거냐구!... 라고.-15쪽

할렘은 이를테면 뉴욕시와 그리고 도심지에서 돈을 벌며 사는 부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고발이다. 할렘의 유곽과 윤락녀들과 마약중독자들과 기타 모든 것들은 파크 애비뉴의 의젓하고 세련된 가식 속에서 무수히 행해지는 이혼과 음행의 거울이요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하느님의 평가이다. - 토마스 머튼-6쪽

사람을 괴물처럼 대하면 그 사람은 괴물이 된다. - 범죄심리학-35쪽

"너한테는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에 버려도 되는 그 삼십 분이 그들에게는 이 지상에서 마지막 삼십 분이야. 그들은 오늘이 지나고 나면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런 오늘을, 그런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라구!.... 네가 그걸 알겠니?"-40쪽

누구에게나 슬픔은 있다. 이것은 자신이 남에게 줄 수 없는 재산이다.
모든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있지만 자신만은 남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이 소유한 비극은 있다.
그 비극은 영원히 자신이 소유해야 할 상흔이다.
눈물의 강, 슬픔의 강, 통곡의 강,
슬픔은 재산과는 달리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 분배되어 있다. - 박삼중 스님-126쪽

신기하게도 기억은 그 당시에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보게 해준다. 무대 구석에서 작은 제스처를 하는 엑스트라에게 비추어지는 핀 라이트처럼, 기억은 우리에게 그 순간을 다시 살게 해줄 뿐 아니라 그 순간에 다른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가치는 때로 우리가 우리의 기억이라고 믿었던 것과 모순될 수도 있다.-129쪽

죄란, 한번 뱉어진 말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것은 그냥 불어 사라지는 바람처럼 없어지는 사건이 아닌 것이다.
"내가 널... 보자고.... 왔다!"
윤수의 어깨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의 온몸이 작은 바람에 부들거리는 잔가지처럼 떨고 있었다. 겨우, 이런 존재였다, 인간이라는 것은. 살인자라 해도, 우리는 겨우 그렇게 부들거리며 떨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실은 조금은 비감해졌다.-133쪽

내가 삼양동 할머니의 집까지 차를 몰고 가는 동안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가 혼자 지은 깊은 침묵의 방에 들어가 있는 듯했고, 진실로 중대한 일 앞에서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고자 고민하는 인간이 언제나 그렇듯이 그녀의 행색과 교양과 이런 것에는 아무 상관도 없이 위엄과 품위를 지니고 있는 듯했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그녀는 또 구부러진 허리로 빈 병과 신문지를 모아 자신의 통장에 3,150원이라든가 2,890원 같은 숫자를 찍겠지만, 돈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쌀말이나 고기 근을 가지고 오면 어쩔 수 없이 비굴한 표정을 짓겠지만,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은 어떤 황후의 것보다도 찬란한 휘광에 쌓여 있는 듯했다.-137쪽

"..... 고모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위악을 떠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남에게 악한 짓을 하면서 실은 자기네들이 어느 정도는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위악을 떠는 그 순간에도 남들이 실은 자기들의 속마음이 착하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래. 그 사람들은 실은 위선자들보다 더 교만하고 가엾어..."

"그리고 고모가 그것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아무 기준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남들은 남들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물론 그럴 때도 많지만 한 가지만은 안 돼. 사람의 생명은 소중한 거라는 걸. 그걸 놓치면 우리 모두 함께 죽어. 그리고 그게 뭐라도 죽음은 좋지 않은 거야... 살고자 하는 건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에 새겨진 어쩔 수 없는 본능과 같은 건데, 죽고 싶다는 말은,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거고,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다시 거꾸로 뒤집으면 잘 살고 싶다는 거고... 그러니까 우리는 죽고 싶다는 말 대신 잘 살고 싶다고 말해야 돼. 죽음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하는 건, 생명이라는 말의 뜻이 살아 있으라는 명령이기 때문이야...."-158~159쪽

".... 착한 거, 그거 바보 같은 거 아니야. 가엾게 여기는 마음, 그거 무른 거 아니야. 남 때문에 우는 거, 자기가 잘못한 거 생각하면서 가슴 아픈 거, 그게 설사 감상이든 뭐든 그거 예쁘고 좋은 거야. 열심히 마음 주다가 상처 받는 거, 그거 창피한 거 아니야.... 정말로 진심을 다하는 사람은 상처도 많이 받지만 극복도 잘하는 법이야. 고모가 너보다 많이 살면서 정말 깨달은 거는 그거야."-160쪽

내가 마지막 말을 마쳤을 때 그의 눈빛이 출렁, 했다. 출렁, 하는 그의 눈빛을 보자 내 가슴도 따라 출렁했다. 먼 계곡 양 가장자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어떤 밧줄 같은 것이 우리 사이에 놓여지는 것 같았다. 그것을 잡은 이쪽에서 파르르 떨면 저쪽에서 잡은 손도 파르르 떠는 것 같은 기분...-203쪽

... 다른 품위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 오직 진실이라는 품위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이 형벌을 제 이름으로 불러서 그것이 본질적으로 어떤지 인정하자. 사형의 본질은 복수라는 것을. - 알베르 카뮈-214쪽

인간은 극에 이르면 결국 같은 것을 느낀다. 그것은 무감각이다.-284쪽

"기도해 주거라. 기도해. 사형수들 위해서도 말고, 죄인들을 위해서도 말고, 자기가 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는 안다고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 위해서 언제나 기도해라."-305쪽

그런데 큰오빠는 몰랐다고 한다. 그랬을 것이다. 나도 몰랐으니까. 셋째 올케를 비웃었으니까. 아무리 돈 많이 못 버는 교수 부인이라지만 옷 입고 다니는 게 그게 뭐니. 엄마가 셋째 올케를 비웃을 때, 나도 그랬으니까. 큰오빠가 그동안 어떤 아픔을 가졌는지, 둘째 오빠와 셋째 오빠는 어떤지, 나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아마 쭉 그럴 테니까. 구치소에 들어갔을 때의 그 놀라움.... 그 사람들 가난해서, 그렇게 거기 들어와 영치금 천 원도 못 가지고 사는지 몰랐으니까.... 사람을 셋이나 죽이고 강간한 파렴치범인 윤수가 그렇게 맑게 웃고, 그렇게 아프게 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몰랐으니까. 몰랐으면 하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말대로 우리는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는 '저들'이고, 심지어 우리가 '저들'인지조차 모르는 것이니까.-229쪽

내가 행복이라고 믿었던 행복이 정말 행복일까.-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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