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외딴집 - 하 - 미야베 월드 제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0월
평점 :
'바보'라는 뜻의 '호'가 이름인 아홉 살 소녀가 있다. 태어남부터가 축복받을 만한 일이 못되었던 까닭에 '바보'라는 이름을 받되 누구의 사랑도, 따뜻한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아홉 살까지 자랐다. 태어나서 한 번도 집다운 집을 갖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맡겨지다가 '마루미'라는 바다를 접한 작은 번으로 운명처럼 흘러들어오게 되고, 그 마을에서 이노우에라는 사지가에서 고용살이를 하게 되면서 이 장대한 이야기는 시작된다. 모처럼 이노우에가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게 되었는데, 살아 있는 인간의 몸으로 악귀가 되었다는 '가가 님'이 마루미 번에 유폐가 되어 온갖 사건들을 일으키면서 호는 다시 파란만장한 인생의 파도 속으로 던져지게 된다.
호는 '바보의 호'인 탓에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온갖 위태로운 일들이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바보'이기에 오히려, 다른 모든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 믿고 있는 가가님의 저주를 진실된 눈으로 보게 된다. 진실을 은폐하려는 복잡한 이야기들은 잘 이해하지 못해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겪은 일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에서 순진한 어린 아이만이 임금님의 새 옷의 정체를 제대로 알아보았듯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가가님에게 끝까지 신의를 지키는 호의 모습은 읽는 이들의 눈물을 훔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들이란 얼마나 간사한 존재인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진실'이 있어도 그것이 현실적인 이익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스스로의 감각과 기억을 속여가면서까지, 거짓으로 만들어낸 진실을 믿어 버리는 우리들.
우리 인생을 좌지우지할 만큼 큰 문제가 일어나더라도 진실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기보다는 어떻게든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이야기에 마음의 귀를 기울이게 되는 우리들.
이 이야기 속의 마루미번 사람들처럼 돌림병으로 사람이 죽고 불이 나고 번개가 치는 등 어려움이 닥칠 때에, 그 원인을 누구 한 사람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일이 간단해지겠는가 말이다.
원래 시대물이라면 질색을 하는 나지만, 이 이야기가 시대물이기에 더 재미있었던 점도 있었다. 책 속지에 인용된 미미 여사의 인터뷰 내용에도 나오지만, 에도 시대는 사람이든 자연이든 힘 있는 것이 사람의 목숨을 쉽게 가져가 버릴 수 있는 시대였기에 그만큼 이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의 고뇌가 더 절실하게 그려졌고, 이야기의 긴장감도 한층 더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야기 속 인물들이 현대물 속의 인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순수했기 때문에 이야기가 주는 감동도 더 컸다.
미미 여사의 소설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미미 여사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이 일반적으로 약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인데도(가령 여성, 어린이) 그 내면은 오히려 강하고 진취적이라는 데에 있는데 이 이야기에서 호의 '성님'이 되어주는 우사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우사의 맹활약이 있었기에 이 소설은 그만큼 더 흥미롭고, 감동적이고, 매력적일 수 있었다.
이 멋진 이야기에 대해서 이 정도 수준으로밖에 감상을 쓸 수 없는 내 머리와 재주가 참 안타깝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일본의 에도 시대 용어가 너무 많이 나와서 처음엔 어렵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지만 초반이 어렵고 지루했던 만큼 하권의 사건 전개가 더 흥미진진했고 결말의 감동이 더 먹먹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2007년은 미미 여사의 이런 저런 책들을 읽을 수 있어서 즐거웠던 한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