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구판절판


나는 끊임없이 어떤 순간들을 언어로 채집해서 한 장의 사진처럼 가둬놓으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문학으로선 도저히 가까이 가 볼 수 없는 삶이 언어 바깥에서 흐르고 있음을 절망스럽게 느끼곤 한다. 글을 쓸수록 문학이 옳은 것과 희망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는 고통을 느낀다. 희망이 내 속에서 우러나와 진심으로 나 또한 희망에 대해 얘기할 수 있으면 나로서도 행복하겠다. 문학은 삶의 문제에 뿌리를 두게 되어 있고, 삶의 문제는 옳은 것과 희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옳지 않은 것과 불행에 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희망 없는 불행 속에 놓여 있어도 살아가야 하는 게 삶이질 않은가. 때로 이 인식이 나로 하여금 집도를 포기하게 한다. 결국 나는 하나의 점 대신 겹겹의 의미망을 선택한다. 할 수 있는껏 두껍게 다가가자고, 한겹한겹 풀어가며 그 속에서 무얼 보는가는 쓰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고, 그건 읽는 사람의 몫이라고, 열 사람이 읽으면 열 사람 모두를 각각 다른 상념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게 좋겠다고, 그만큼 삶은 다양한 거 아니냐고, 문학이 끼어들 수 없는 삶조차 있는 법 아니냐고.-67쪽

그렇게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여자들은 남자들을 실망시키고 세상의 남자들은 여자들을 실망시키게.-218쪽

…… 살아 있다는 것. 우리가 그 골목에서 간이숙박소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야. 일상에 매여 일 년을 통화 한번 못 한다고 해도 수첩 속에 오래된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다는 것. 내 손을 뻗어 다른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 설령 내가 언니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언니가 이 세상의 어느 공기 속에서 아침마다 눈을 뜨고 숨을 쉬며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가고 있었다면…… 나는 내 열여섯에서 스물까지의 시간과 공간들을 피해오지 않았을 거야. 내가 기억한들, 언제까지나 기억한들…… 그런들……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지? 기억으로 뭘 변화시켜놓을 수 있어?-221쪽

모두들 성장하기 위해 태생지를 떠난다. 대학에 가기 위해 창도 우리가 함께 자란 마을을 떠난 모양이다. 그 마을에 창이 없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그 마을의 불들이 일제히 꺼진다.-347쪽

가슴속에 하지 못한 말들이 하늘로 올라가서 별이 된다고 한 사람은 누구였는지. 조그만 것들은 너무나 많이 모여 있으면 슬퍼 보인다. 자갈이나 모래나 쌀이나 조갑지들. 하늘의 별도 그렇구나. 자갈이나 모래나 쌀이나 조갑지와 다른 점은 저렇게 많은데도 하나하나 반짝반짝 제 빛을 낸다는 것이다.-3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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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10-11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경숙의 책은 하나도 안 읽은 것 같아요. ㅠㅠ
어차피 나오는 책을 다 읽을 순 없지만, 작가도 호불호에 따라 보게 되더라고요!

알맹이 2007-10-11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풍금이 있던 자리 시절의 신경숙을 사실, 정말 싫어했었어요. 그래서 전혀 안 보았거든요. 이번에 기회가 되어 이 책을 봤는데, 제가 나이가 들어 그런지, 책이 좋아 그런지 너무 아름답고 감동적이더라고요. ^^

김샘 2007-10-31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ㅎㅎㅎㅎ 나는 신경숙글이 너무 좋았어요..... 사실적인게 마음에 들었고, 가슴 깊이 너무 슬퍼서 그래서 약간 싫기도......뭐라고 쓰는건지... 마지막 밑줄긋기는 너무 아름답다. 별과 자갈, 모래, 조갑지가 다른 점이 그거였구나.....

알맹이 2007-11-01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샘은 신경숙 좋아할 것 같아요. 이 외딴방은 정말 좋은 작품이어요. 그리고 문장도 무척 아름답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