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골치 아픈 걸 싫어해서. - 어려운 책에 대한 난독증이 있다고 생각한다. - 술술 읽히고 재밌고 가볍지만, 꼭 가볍지만은 않은 일본 소설을 좋아했었다. 대학 때 정말 좋아했던 하루키로부터 시작해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읽어댔던 바나나, 에이미, 가오리.로 이어졌고, 최근에는 일본 소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정말 다양한 작가들의 소설을 읽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좋아하는 두 작가가 미야베 미유키와 이사카 코타로이다. 하루키 때처럼 이 작가들의 팬이 되어버렸다.
먼저 미야베 미유키. 정말 대단하다, 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작가이다. 뭐가 대단하냐 하면, 굉장히 현실감을 주는 문장력. 대화든 묘사든 어색하거나 과장되는 일 없이, 소박하면서도 정말 그럴 법하겠군, 싶게 표현해낸다. 물론 전혀 쉽지는 않았겠지만, 읽는 사람에게 이렇게 복잡한 내용을 이렇게 쉽게 정리해 내나? 싶은 느낌이 들게 한달까. 나는 무슨 글이든 한 문단이라도 정식으로 쓰려면 정확한 단어를 찾는 데만도 진땀이 빠지는데, 이 작가는 컴퓨터 앞에 앉기만 하면 그냥 술술 써내려갈 것 같은 느낌(가수로 치자면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는데 노래는 끝내주게 잘 부르는 바비킴 같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쓸 내용에 대해 참 세심하게 취재를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작가가 쓴 여러 소설들이 거의 '르포'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다. 정말 성실하게 글을 쓰고 있구나, 하는 신뢰감이 생기게 한다.
마지막으로 뺄 수 없는 것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애정이다. <이름없는 독>에서처럼 범죄를 그 범죄를 일으킨 개인의 몫으로만 돌리지 않는, 인간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 범죄를 범인과 탐정의 대결 구도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모방범>에서처럼 피해자의 입장까지 생각하게 하는 세심함과 기발함. 자기 일이 아니라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사회 문제를 독자들의 눈앞에 들이대 주는 씩씩함.. 등이 정말 멋있다.
나만의 미야베 미유키 베스트를 꼽아 보자면,
1. 모방범.
엄청난 스케일의 대작이지만, 눈깜짝할 새 읽어치우게 된다. 흥미, 스릴, 감동, 어느 면에서도 뒤지지 않는 재밌는 작품.
2. 화차
신용불량과 관련된 사회 문제를 소재로 한 소설. 지금 읽으면 약간 예스러운 느낌도 들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 매력적이었다. 다른 작품에 비하면 그다지 복잡하거나 대단한 느낌은 안 들지만, 그래서 더 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매력적인 소설.
3.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
<이름 없는 독>의 옮긴이의 말을 보니 미미 여사가 앞으로 현대물은 스기무라 사부로에 집중하겠다 했다던데. 너무너무 기대된다. 스기무라 사부로라는 주인공 뿐만 아니라 장인인 회장님, 아내 나호코와 딸 모모코, 그 외 사이사이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너무 매력적인 소설들이다. 쿨하지도 않고 거창하지도 않은, 그저 '참견하기 좋아하는' 소심한 탐정이라는 컨셉도 너무 맘에 든다.
그리고, 이사카 코타로. 이 작가의 책을 읽고 있으면 꼭 '돈키호테'가 생각난다.- 돈키호테, 라고 하기엔 등장인물들이 너무 쿨한지도 모르겠지만. - '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해라, 부조리한 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라는 목소리를 자주 내는 이 작가는 언제 읽어도 참 젊다!는 느낌이다. 어떤 때는 사회의 편견이나 우리를 얽어매는 제도들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그런 이야기들도 아주 통쾌하다. 역시, 젊다.
또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은 추리소설은 아닌 것 같은데, 늘 범죄의 요소가 등장하고, 독자가 풀어야 할 문제가 등장해서 나같은 추리소설 팬이라면 더욱 좋아할 법하다. 그 수수께끼가 항상 꽤나 참신하고, 상상도 못했던 결말로 끝날 때가 많아서,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애쓴 작가의 노고에 감동을 품으면서 책을 덮게 된다고나 할까. 이사카 코타로는 이야기를 꾸며내는 데 정말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 심지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정말 평범한 나의 어느 하루를 소설로 쓴다고 해도 이 작가가 쓴다면 정말 재미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할 정도.
나만의 이사카 코타로 베스트를 꼽아 보자면,
1. 러시 라이프
표지의 에셔 그림에 완전히 딱 들어맞는 이야기이다. 등장인물과 이야기가 얼키고 설킨. - 그런데 그 구조가 이야기가 전개되어 가면서 서로 착착 맞아떨어져 가는 그런 느낌. 이 책을 읽고 이사카 코타로를 다시 보게 되었다.
2. 중력 삐에로, 나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요즘 마구 번역되어 나오는 작품들보다 초창기에 나왔던 러시라이프나 중력삐에로 같은 작품들이 더 완성도가 높은 것 같다. (칠드런은 안 읽었지만..) 이 두 작품은 서로 너무나 비슷한 내용. 둘다 각각의 재미가 있긴 하지만..
3. 사신 치바
옴니버스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 만화스럽기도 하고. 거창한 것을 기대하고 읽는 사람이라면 실망할 지도 모르겠지만 재미는 보장할 만하다.
※ 참고로 위에 꼽은 베스트는 내가 읽은 작품 중에서 고른 것.. 내가 안 읽은 것 중에 아니 이것도 안 읽고 이런 페이퍼를 썼단 말야? 하는 작품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