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여행가방 - 박완서 기행산문집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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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돌고 돈다. 가장 앞서갔다고 생각되는 게 가장 처진 게 될 수도 있다. 지금 가장 낙후된 고장처럼 보이는 것이 가장 앞선 희망의 땅이 될 수도 있다. 발전이란 이름으로 만신창이가 된 국토에 마지막 남은 보석 같은 땅이여, 영원하라.-48쪽

그러나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내가 일생 끌고 온 이 남루한 여행가방을 열 분이 주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 앞에서는 허세를 부릴 필요도 없고 눈가림도 안 통할 테니 도리어 걱정이 안 된다. 걱정이란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멍을 궁리할 때 생기는 법이다. 이게 저의 전부입니다. 나를 숨겨준 여행가방을 미련 없이 버리고 나의 전체를 온전히 드러낼 때, 그분은 혹시 이렇게 나를 위로해 주시지 않을까. 오냐, 그래도 잘 살아냈다. 이제 편히 쉬거라.-63쪽

"가장 고매하며 커다란 가치의 상징인 소국 바티칸의 전쟁 능력은 무에 가깝다. 그러나 평화에 대한 능력은 무한으로 크다."-70쪽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멀리 백탑을 바라보면서 '내 오늘에 이르러 처음으로 인생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함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 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히 한번 울 만하구나'라고 적고 있다.-91쪽

우리 아이들이 알기나 할까. 저희들에게 그런 과소비를 시키는 부모들이 한때는 유니세프에서 주는 분유와 옥수수빵으로 영양 부족을 근근이 달래면서 공부한 세대라는 것을.
지금 사오십대의 부모 세대는 오직 자식을 여봐란 듯이 호강시키는 걸로 그 때의 쓰라린 궁핍을 복수해왔다.
또한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실력으로 보여준 세대이기도 하다. 이제야 진정코 부끄러운 것은 남의 도움을 받는 게 아니라 받은 것을 더 낮은 곳으로 돌려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거라는 생각에 도달했다면 너무 늦은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건 우리 아이들의 학용품이고 먹을 것이고 도무지 귀한 걸 모르는 흥청망청에 대한 은밀한 반성과도 통하는 민망함이었다.-119쪽

부인들이 차 도구를 끌러놓고 차를 마시는 자리에도 어김없이 개 한두 마리가 끼여 앉아 있었다. 여기 개들은 자신이 개라는 걸 전혀 의식 못 하는 것 같다. 사람을 경계하지도 않을뿐더러 문득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곤 한다. 좋은 데서는 곧잘 차를 마시는 저들과, 경치 좋은 데서는 고기부터 굽고 보는 우리하고 과연 어느 쪽이 더 문화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뚱딴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부인네들이 친절하게 손짓하면서 같이 어울리기를 권했다. - 이하는 티베트 여행기, 모독-179쪽

그러나 라다크에서 보는 검소함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번영을 누리고 사는 데 근원이다. 제한된 자원을 주의깊게 이용한다는 것은 인색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검소함은 적은 것에서 많은 것을 얻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 헬레나 노르베리-호지-188쪽

흔들어댈 나무도, 사람의 집 문짝도, 전깃줄도 없는 바람은 허공에서 외롭게 제 목소리를 낸다. 공기 중에 흔들어댈 불순물조차 없어 조금도 굴절되지 않은 바람의 정직한 목소리를 누가 들어보았는가. 수많은 신을 만들어낸 이곳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허공에 모습을 드러냄 없이 어떤 거대한 힘을 과시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바람의 신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바람소리는 바람의 신이 휘파람을 부는 것 같고, 어떤 바람은 바람의 신이 거대한 날개를 펄떡이는 소리로 들린다.-208쪽

그는 물론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우리한테 구걸하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비루한 거지 근성만 같아서 넌더리가 났었는데 그게 아니라 있는 자에 대한 없는 자의 당당한 요구였다면 어쩔 것인가.-213쪽

밖으로 나와 보니 이 작은 도시 여기저기 뒹구는 게 화학 연료의 마지막 쓰레기인 비닐 조각, 스티로폼 파편, 찌그러진 페트병 따위 생전 썩지 않는 것들이었다. 뚱뚱한 식당 주인을 나무랄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우리의 관광 행위 자체가 이 순결한 완전 순환의 땅엔 모독이었으니.-215쪽

그러나 밤하늘의 별은 놀라웠다. 세상을 잘 만나 여기저기 돌아 다녀본 데도 많고 지상의 모습뿐 아니라 밤하늘의 모습도 나라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팅그리의 밤하늘처럼 신비하게 별이 빛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잃었던 유년기의 신비까지 가슴으로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혹독한 기후를 견디며 불모의 황원에서 노숙하는 유목민도 저런 밤하늘을 이고 자리라. 그들의 상상력이 화려 찬란하고도 천성적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그들 상상력의 총집결이 그 장엄하고도 사치를 극한 사원의 불상들이 아닐까.-217쪽

누가 시켜서 하는 걱정은 아니었다 해도 쓰레기 문제는 줄창 나를 가위눌리게 했다. 썩지 않는 쓰레기들이 싫고 무섭고 꼭 그 쓰레기 때문에 뭔가 불길한 일이 터지고 말 것 같았다. 하여 쓰레기가 없는 고장, 모든 것이 완전 순환되는 고장이 있다는 건 이상향에 관한 정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막상 내가 본 이상향은 쓰레기 더미에 깔려 죽을지언정 도달하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이상향이란 이 세상에 있지 않은 곳, 곧 천국이 아닐까?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왜 그렇게 가혹하게 제한했는지 알 것 같다. 나는 천국에 들기에는 너무 많이 가지고 있구나.-227쪽

네팔에서 어쩌다 우리나라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는 걸으러 온 사람이다.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타는 사람보다도, 나는 사람보다도, 뛰는 사람보다도, 달리는 사람보다도, 기는 사람보다도, 걷는 사람이 난 제일 좋다.-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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