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도와줄래요?" 백작이 안드레이에게 브랜디 한 병을 건네며 말했다. 이어 ‘대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걸쇠를 푼 다음 마치 커다란 책을 펴듯이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유리잔 52개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유리잔 26 쌍이 매우 안전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는데, 폭이 넓고 풍성한 부르고뉴 와인 잔에서부터 남유럽의 밝은 빛깔 리큐어를 위해 디자인된 조그마한 멋진 잔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유리잔은 목적에 따라 모양을 달리했다. 백작은 그 순간의 기분에 따라 무작위로 잔 네 개를 골라서 옆으로 건넸고, 그러는 동안 안드레이는 병의 코르크 마개를 따는 명예로운 역할을 수행했다.
- P33

그런 다음 책상에 앉아 방에 남겨놓은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전 세계의 찬사를 받았으며 아버지가 몹시 좋아했던 이 책을 읽노라고 백작이 자신과 처음 약속한 것이 분명 10년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달력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이번 달엔 미셸 드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는 데 전념할 거야!‘ 라고 선언했을 때마다 인생의 어떤 악마적인 면이 문간에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뜻밖의 곳에서 어떤 연애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러면 도의상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가 거래하는 은행가가 전화를 하기도 했다. 혹은 서커스단이 마을에 오기도 했다.
어찌 됐든 인생은 유혹할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백작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지 않고, 책을 읽는 데 필요한 시간과 고독을 그에게 제공하는 상황이 마련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책을 손에 꼭 들고 한 발을 농의 구석에 댄 채 의자를 뒤로 젖혀서, 의자가 뒷다리 두 개로만 균형을 이룬 기울어진 자세로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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